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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예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 일 눅15:1-32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의 하나인 눅1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셋다 뭔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 예수님의 이 세 이야기는 하나같이 즐거운 파티로 끝납니다.
목자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여자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동전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을 위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양을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옵니다.
동전을 찾은 여자는 이웃에게 나와 함께 즐기자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실 때는 잃은 영혼을 찾으신 때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순간 느끼는 즐거움보다 큰 즐거움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호들갑을 떠시며 정말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 찾은 큰 기쁨을 예수님이 흥분된 상태에서 호들갑을 좀 떨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호들갑을 떤다고 우리가 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는 그 마음을 깨달아 알고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세 가지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항상 기뻐하라, 전도할 때도 ...
둘째로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라.
셋째로 즐거움을 회복하자.
첫째로 항상 기뻐하라 전도할 때도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는 것은 전도할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헌신할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의 얼굴은 전도지입니다.
마음먹은 것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은 동물에 없는 사람만의 특징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에서 말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즐겁게 전도사역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복음을 전 하는 것, 이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히 원하는바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기쁨이 넘치고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를 보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고 슬프고 우울하고 기쁨을 상실하고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우울해 보이고 불행하고 자유와 기쁨이 없어 보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주된 이유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요즈음 세대는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크리스천들조차도 낙망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천은 날로 세속화되는 주변을 보고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큰 소망과 확신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가장 큰 경쟁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꿈꾸듯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큰 확신과 감격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대교인들에게 있어 전도는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요 , 삶의 희망이요, 흥미로운 사건 그 자체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본업은 전도였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전도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고 찬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그야말로 꿈꾸듯이 전도하며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인생, 갈수록 열정이 더해가는 영광스러운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는 신비스러운 사건처럼 보입니다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뜬 구름을 잡는 버불이 아니라, 전도를 가능케 하는 힘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는자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 예배드리는 사람]정도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초대교인들은 예수 믿는 자는 예수를 증거 하는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본 그대로 증거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이 빈 무덤인 것을 증거 합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있었던 그 사실을 증거 합니다.
물위를 걸었던 그 현장에서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증거 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 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가족이 되는 것을 증거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명령에 순종하여 153마리의 물고기 잡는 현장을 증거 합니다.
그들이 기뻐하며 복음을 전한 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격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을 말합니다.
이제 나의 생명 나의 안위는 관심 밖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온전히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승천 산에서 오백 명의 성도가 지켜 보는 가운데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 예수님이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구름타고 다시 오실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해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화형도 십자가 죽음도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도 검투사의 실험용으로 쓰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거룩하게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믿는 것처럼 바로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건강과 물질과 자녀의 축복과 명예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올곧은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
이렇게 철저한 복음의 증거자가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그 기쁨과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웃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이며 호들갑을 떠는 예수님 마음을 공명되기 원합니다.
둘째로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라 (6,8-9,21-24)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목자가 양을 어떻게 대합니까?
미국 잡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한국 농부는 하루 종일 밭갈이를 하고 난 다음 소가 쉴 수 있도록 풀밭에 매여 놓고 일을 마친 농부가 무거운 농기구를 지게에 짊어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농기구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타고 오는데 한국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밭 가느라 수고한 소를 생각해서 농기를 지고 오는 지극한 소사랑을 보여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의 목자는 잃었던 양을 어깨에 매고 옵니다. 즉 무등을 태우고 옵니다.
손녀를 무등태울때 보면 할아버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그 양을 때리고 구박하는 대신 어께에 메고 높여주는 것처럼 주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옛 죄는 묻지도 않고 존귀와 영광으로 높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귀하게 여겨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이웃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 합니다. 즉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축제를 벌일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사단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오게 된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성도의 자녀가 악한 자들에게 유괴되어 그 악한 자들에게 유린당하고 악에 물들고 방황하다가 탈출하다가 돌아왔다면 여러분은 몸 버렸다고 환향년이라 내쫓으시겠습니까?
병자호란으로 만주에 잡혀갔던 조선의 규수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도망하여 조선으로 돌아왔을때 유교에 찌든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때국놈에게 몸버린 더러운 년, 환향년(다시 고향에 돌아온 여자)이라고 반가워하기는 켜녕 집안의 수치로 알고 다시 쫓아냈습니다. 그들이 환장(얼굴을 바꾸어 단장하고 )을 하고 나라와 세상을 원망하며 한을 알고 살았습니다.
내 민족 내 가족을 지키지 못한 것이 수치지, 나라가 약해서 전쟁에서 져서 약한 여자가 잡혀갔다가 갖은 고초를 당하고 돌아온 것이 수치란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유교의 체면 문화가 만든 악이며 조선이 망하게 된 근본 원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단에게 속아 살던 사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을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여기고 기뻐하시어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천하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잔치를 베설할 정도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희생시킨 대가를 얻으시기에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죄를 회개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영생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믿어야 비로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신 피의 대가와 열매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때 크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이 따로 잔치를 벌일 일이 있겠습니까?
그곳은 늘 기쁨과 찬양의 축제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계4:1-10)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더욱 기쁜 축제를 벌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8-9절에서 동전 한 개를 잃었던 여인이 그것을 찾은 기쁨을 이웃들과 나눕니다.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결혼할 때 결혼을 기념하는 증표로 남자가 사랑의 증표로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닢을 줄에 꿰어 줍니다.
이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식었다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가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조그만 동전을 찾으려고 가루를 들어내고 짚을 거두고 온 방바닥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찾은 후에 이웃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입니다.
이 잔치에 한 드라크마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수고와 희생에 대한 비유입니다.
사랑의 증표인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방의 짚을 거둬내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빗자루질을 하듯 우리 주님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사마리아 갈릴리 예루살렘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여인이 방바닥을 등불로 비취며 샅샅이 이잡듯 찾듯이 천국 복음을 죄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바리새인들의 조롱와 멸시가운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더 큰 비용을 지불한 것처럼 주님도 죄인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룩하고 의로운 주님의 생명을 십자가에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주님은 엄청난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주님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고 구원 받는 일을 주님은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맛보시기 위해 희생과 수고와 손해를 감수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믿음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수고로 이루어졌기에 우리 영혼과 몸을 주님의 거룩한 의의 병기로 드려야 될 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이 피 흘려 구원하신 이웃 성도들도 나처럼 존재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귀하게 대하며 사랑해야 될 줄 믿습니다.
21-24절은 돌아온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환대와 사랑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많으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 대해 신경도 안쓰고 언급도 안한다는 것은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받게 되어 다시는 정죄를 당하지 않는 축복을 얻습니다.
주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옷을 입혀 존귀한 자로 높여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 가락지를 끼워 아버지의 귀한 권한을 위임받아 결재권자임을 말하며, 신발을 신겨 준 것은 노예가 아닌 집주인 가족의 일원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죄인에게 영원한 사죄의 축복을 주시고 ,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입혀 주시며, 성령으로 인쳐 주십니다.
주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은사로 공급해 주시고 ,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기업을 상속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24) 말씀은 큰 고생과 위기를 겪은 작은 아들이 타국에서 아버지와 분리되어 온갖 시련을 겪은 일을 아버지는 죽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다시 찾은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큰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각도 없고 말씀도 듣지 못하고 순종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죄로 인해 죽어있던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직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음을 유념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것으로 온전히 헌신하기로 다짐하시길 원합니다.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은 목적은 그저 즐기려 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환영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장남에게 동생을 찾은 일로 인하여 잔치를 벌이는 일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장남에게 동생을 되찾은 일로 인하여 잔치를 벌이는 일이 합당하다고 가르치는 일은(32)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종교적 특권을 죄인들에게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창기와 세리들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은사를 풍성히 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은사를 풍성히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십니다.
사단의 권세를 파하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특권은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의무를 다하라고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만민에게 구원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셋째로 즐거움을 회복하라 하십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 성도들은 [예수 믿는 자]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 ‘예배드리는 사람’정도로 인식하고 있진 않으신지요?
하지만 초대교회 시대에는 ‘예수 믿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을 의미 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전도는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힌 자연스러운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초대교회 성도들 같이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큰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감격과 열정과 벅찬 가슴으로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전도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전도는 전하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어색함, 황당함, 곤혹스러움, 비상식적임 등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앞뒤로 띠를 두르고 외치며 해병대 군복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그 구호와 외침을 듣고 누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돌아오겠습니까?
손가락질하고 혐오감을 느끼며 예수 믿는 자들과 괴리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시는지요?
동전주 노회 은퇴목사님이신 정회웅 목사님은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며 하루에 몇 시간씩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도지를 전하며 “ 예수 믿고 복 받고 새생명을 얻으세요!”라고 시민들을 축복합니다.
은퇴목사님으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가까운 교회에 등록하고 인생의 의문이나 고민이 있으면 상담하라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촌교회에서 은퇴하셔서 아무런 연고도 없으니 본인이 섬기는 교회부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이해 관계없이 영혼을 사랑해서 전도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자원하여 자비로 전도하며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껴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즐거움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전도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전도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될 수 없을까?
어떻게 하면 전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신나고 재미있는 즐거움, 보람이며 인생의 긍지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전도자의 일상생활이 풍성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도전적인 삶이 되어 만나고접촉하는 모든 관계를 통해 예수를 닮은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을까?
전도자의 말이 유머와 재치가 흘러넘치는 재미있는 표현이 될 수는 없을까?
진리의 말씀과 상관없는 음담패설이나 신변잡기를 통해 억지웃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통해 심령을 터치하므로 근본적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까?
부흥회를 한다고 성도들이 모아놓고 욕설이나 겁을 주는 말들로 인해 상처입고 떠난 성도들을 사랑의 주님의 품으로 다시 불러오게 해야 합니다.
한 성도가 죽으면 천국 문이 열립니다. 천국에서는 한 죄인이 회개하면 다른 활동이 중지되고 천국의 온가족이 기뻐합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한 영혼이 구원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만사 제쳐두고 마음껏 기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의 가슴이 터질듯 흥분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지요?
한 영혼이 구원 받을 때 예수님은 축포를 33발이나 올려 터뜨리며 기뻐하십니다. 한강 변에서 불꽃놀이 하는 것 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한 영혼의 구원을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 우리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서 그 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쳐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님께서 어떤 일로 호들갑을 떠십니까? 주님께서 호들갑을 떠실 정도로 좋아하고 기뻐하는 일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인 줄 믿습니다.
첫째로 항상 기뻐하라, 전도할 때도 ...
둘째로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라.
셋째로 즐거움을 회복하자.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전도할 때도 기뻐하고 즐거움을 회복하며 온전한 상태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