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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쿠르스크 전투를 개괄한 부분이 나와야 하지만 개괄 수준의 쿠르스크 전투는 워낙 곳곳에 많이 볼 수 있는 지라 굳이 올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개괄 수준으로 알고 싶으시면 위키피디아나 엔하위키의 항목을 보셔도 충분할 겁니다.
소총병 사단의 전술적 방어
-소련 제25 근위 소총병 군단 VS 독일 제3 기갑 군단
소총병 사단들의 방어 구역에서 나타난 전투들을 들어다보면 소련 보병, 포병, 전차병의 중대한 역할을 알 수 있다.
미하일 슈밀로프 중장의 소련 제7 근위군 소속 제25 근위 소총병 군단은 벨고로드 동쪽 18Km 정면을 도네츠 강 북쪽 동안을 따라 방어하며 켐프 분견군 소속 독일 제3 기갑 군단을 상대했다. 군단장 가니 사피울린 소장은 2개 소총병 사단을 제1 제대로, 1개 소총병 사단을 제2 제대로 배치해 20Km의 종심을 확보했다. 제81 근위 소총병 사단은 1개 전차 연대로 증강되어 벨고로드 동쪽 미하일롭카에 생긴 독일군 교두보를 상대했다.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도네츠 강 북쪽을 따라 남쪽으로 전개해 라줌노예 마을을 중심으로 12Km의 정면을 담당했다. 후방에서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이 제2제대로서 쿠트로이 로그 동쪽 고개에 주둔했다.
총 전력 7,854명의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제223, 225, 228 근위 소총병 연대, 제158 근위 포병 연대, 제81 독립 대전차 대대와 기타 지원 부대로 구성되었고 제1617 포병 연대 소속 1개 대대와 야전군 직할 제4 대전차포 대대로 따라붙었다. 모든 사단의 연대는 3개 대대-9개 중대-27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사단장은 부대를 2개 제대로 나누어 우익에 무게를 두어 제1 제대 2개 연대로 도네츠 강 분견 동안을 따라 배치했고 제2 제대 1개 연대를 게네랄롭카와 쿠트로이 로그 뒤에 배치했다.1 사단 우익의 연대(제228 근위 소총병 연대)는 5Km의 좁은 정면을 라줌노예 북쪽에 2개 대대를 배치해 제1 방어 지점을 형성했고 제3 대대는 제125 근위 포병 연대의 1개 포병 대대의 지원을 받게 하며 제2 방어 지점에 배치했다. 2개 대전차총 중대와 2개 대전차포 포대로 증강된 제228 근위 소총병 연대의 임무는 게네랄롭카를 향한 적의 돌파를 막아 내며 위치를 지키는것이었다. 각 대대는 2~2.5Km의 정면을 방어했고 연대 대전차 구역은 라줌노예 북쪽에서 연대 좌익의 전투 지경선을 메꾸었다.
제225 근위 소총병 연대는 제228 근위 소총병 연대의 좌익에서 7Km 정면을 방어하고, 2개 소총병 대대를 도네츠 강 북쪽을 따라 배치했고 제3 대대를 쿠트로이 로그에 배치했다. 1개 대전차총 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중대의 대대들은 3.5Km의 정명늘 방어하고 대전차 화점은 대대 전투 지경선에 배치했다.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의 제2 제대는 제223 근위 소총병 연대(1개 대대가 부족한)로 게네랄롭카에서 쿠트로이 로그를 뚫고 올 적을 막고 역습을 시도할 것이었다. 연대는 좌익인 크투로이 로그 남쪽에 대전차 구역을 만들엇다. 제223 소총병 연대의 1개 대대는 제81 대전차 대대의 1개 포대를 증강받아 단 우로자예 근처에 사단 예비로 자리잡고 1개 대전차포 포대가 사단 대전차 예비로 라줌노예 동쪽에 배치되엇다. 사단의 선두 대대들과 중대들은 사단 직할 공병의 지원을 받아 참호를 구축하고 철조망을 깔았다.
연대 포병 지원 집단의 화력 투사점은 방어 정면에서 3~5Km 뒤에 위치했고 사단 사령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대전차 화점은 각각 5~7 문의 대전차포와 1개 중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사단의 가장 약한 곳은 좌익으로 소련군이 라줌노예 강이 독일군의 공세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익은 요새화된 마을과 더 많은 무기들이 최종적으로 배치되어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7월 5일 0410시, 40분간의 포격과 항공 공격이 끝난 뒤 제3 기갑 군단이 도네츠 강 북안을 건너며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의 방어 지역으로 쇄도했다.2 제3 기갑 군단 소속 제19 기갑 사단은 달니 페스키에서 도로고부지노의 78 사단 병력을 강타했고 그 동안 제7 기갑 사단은 솔로미노에서 라줌노예와 크투로이 로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합동 공세는 300대의 전차가 주력이었다. 북쪽 제168 보병 사단은 제6 기갑 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미하일롭카 교두보에서 박차고 나와 제81 근위 소총병 사단의 포화를 뚫고 나가려 했지만 소련군의 포화에 교두보 확보를 방해 받자 제6 기갑 사단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제19, 7 기갑 사단의 합동 공격은 제228, 225 연대의 전투 지경선을 강타했고 전방 중대의 방어 병력들을 박살냈다. 전차 30대를 대가로 지불하며 제19, 7 기갑 사단은 도로고부지노에서 니즈니 올샤네츠의 소련군 방어 거점들을 휩쓸며 라줌노예 남쪽과 북쪽으로 쇄도했다. 제19 기갑 사단의 제27 기갑 연대는 제228 근위 소총병 연대 제3 대대를 분쇄하고 제2 대대가 지키는 제2 방어 거점으로 몰려들었다. 이 공세는 저녁에 라줌노예의 강력한 대전차 방어 구역이 불을 뿜음으로서 정지되엇다. 그 동안, 제7 기갑 사단의 선봉인 100대 이상의 전차가 제225 근위 소총병 연대 제2 대대의 방어 지점을 압도했고 대대의 대전차 화점을 무너트리며 라줌노예 남쪽의 제3 대대를 밀어붙였다. 제3 대대는 내부까지 몰려온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독일의 포화가 제1 기관총 중대에 집중됨에 따라 1800시 이후 독일군은 대대 방어 구역을 돌파해 제223 근위 소총병 연대 제3 대대가 지키고 있는 크루토이 로그 방어 지점으로 진격했다.3
독일의 맹공격을 늦추기 위해 제25 소총병 군단장은 제443, 477 근위 박격포(방사포) 대대에게 제81 근위 소총병 사단을 지원하고 크투로이 로그 동쪽에 방열해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2200시, 2개 대대가 자리르 잡자 소련군은 크루토이 로그로 진격하던 독일군 전차와 보병에 카츄샤를 쏟아부어 제7 기갑 사단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다. 7월 6일 0200시에 제443 방사포 대대는 다시 카츄샤를 퍼부어 크루토이 로그 근처의 일련의 독일군 전차들을 박살냈다.4
7월 5일 저녁,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의 방어는 3개 구역으로 쪼개졌다. 제228 연대의 제1 대대는 달니 페스키 근처를 방어했고 제2 대대와제3 대대 일부는 합류해 제19 기갑 사단의 선봉을 달니 페스키 남쪽과 철도 동쪽에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제225 연대의 우익은 무너졌다. 제2 대대의 일부는 라줌노예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했고 제3 대대는 크루토이 로그에서 절망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제1 대대는 몇개 중대가 포위당하거나 전멸당한 채 강 너머로 밀려났다. 제1 대대는 우측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제72 근위 소총병 사단과 합류해 그레먀치로 향했다.
7월 5~6일 밤 사이, 제25 소총병 군단 사령부는 제2 제대인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의 1개 연대를 차출해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에 증원해 주고 크루토이 로그 근처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이 결정은 제7 기갑 사단의 진격이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걸 인정한 것이었으며 제7 기갑 사단은 아직 멀쩡한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 병력을 상대하게 된 다는 걸 뜻했다.
명령서에는 제73 사단에 85mm 포 1개 포대와 SU-122, SU-152 자주포를 보유한 제1438 자주포 연대를 증강시킨다고 써 있었다. 더 나아가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부는 제25 소총병 군단의 위기를 막기 위해 더 많은 부대를 보낼 것을 명령했다.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바투틴)은 제111, 270 소총병 사단을 제69군에서 차출해 제7 근위군에 배속시켰고 제94, 92 근위 소총병 사단을 제35 근위 소총병 군단에서 차출했다.5 4개 사단이 제72 근위 소총병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으며 코로차로 가는 도로를 방어했다.
슈밀로프 중장도 제31 대전차 여단, 제167 전차 연대, 제1438 자주포 연대, 제262 포병 연대, 제309, 97 방사포 연대, 제329 공병 대대로 충격 집단을 만들고 제73 사단을 지원하게 했다. 이 조치는 제7 기갑 사단의 임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7월 6일,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독일군 진격의 충격을 흡수하는 임무를 다시 시작했다. 짭은 준비 포격 이후, 제19 기갑 사단은 제7 기갑 사단이 라줌노예 동쪽과 크루토이 로그를 공격하는 동안 제228 소총병 연대가 있는 라줌노예 북쪽을 공격했다. 제6 기갑 사단은 벨고로드 남쪽에서 전개해 도네츠 강 북쪽의 안정적인 도하점을 찾다가 정오에 도하하여 제19, 7 기갑 사단과 합류했다. 이로 인하여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 구역에 400대의 전차가 맹공을 가했다.
7월 6일 1200시, 제19 기갑 사단 제27 기갑 연대는 게네랄롭카로 가는 길에서 제223 소총병 연대 제2 대대와 격전을 벌이다 진격을 멈췄다. 그 동안 제228 소초병 연대가 달니 페스키로 밀려나 새로운 방어 지점에 1개 대대를 남겨 놓고 지형 지물을 이용해 후퇴를 숨기며 2개 대대를 게네랄롭카 북쪽으로 이동시켰으며 제81 근위 소총병 사단의 좌익에서 제19 기갑 사단의 제73 기갑척탄병 연대와 교전했다.6 독일군의 진격은 라줌노예에 남아 있던 소련군 잔존 병력을 박살냈고 제223, 25 소총병 연대를 크루토이 로그에 포위했다. 제6, 7 기갑 사단이 크루토이 로그 복서쪽으로 밀려들 동안 포위된 2개 연대는 야음을 틈타 포위망에 보병들이 도착해 더 견고해지기 전에 탈출을 시도했다. 7월 6~7일 사이 연대들의 병력이 마침내 제72 근위 소총병 사단이 형성한 그레먀치 근처의 새 방어선에 도달했다.
7월 6일 오후, 독일 제6, 7 기갑 사단은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과 격전을 치른 후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과 크루토이 로그 북서쪽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7 제7 기갑 사단은 소련군 방어선을 밀어붙였지만 큰 손실을 입고도 돌파하지 못했다. 1400시, 제7 기갑 사단 좌측의 제6 기갑 사단은 100대의 전차로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의 우익인 제120 근위 소총병 연대를 휩쓸고 소련군 방어망 깊숙히 진격했다. 제7 기갑 사단은 결국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의 방어를 뚫지 못했고 제6 기갑 사단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7월 7일 저녁,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적 공세의 약화라는 역할을 완수했다.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2개 기갑 사단의 강력한 공세를 받아 내었고 충격력을 분산시켰다. 좁게 보면, 방어는 실패했다. 소련군이 50대의 독일 전차를 주저앉혔다고 주장해도 말이다. 하지만 크게 보면, 제25 근위 소총병 군단의 관점에서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81 근위 소총병 사단과 제73 근위 소총병 사단은 시간적으로 제3 기갑 군단과 제2SS 기갑 군단이 프로호롭카에서 합류하는 걸 막음으로서 더 큰 중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은 작전 동안 7000명 이상, 전 전력의 40% 이상 손실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렀다. (3주 후 재정비를 통해 제78 사단의 전력은 6,000명이 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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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감하고 갑니다..
선플을 달아주신 건 고맙지만 부디 다음에는 제발 게시판에 자료 선별 이후 퍼오시길 바랍니다.
무슨 논문이네 못 알아먹겟음 ㄷㄷ
한 줄 요약 : 더러운 떡진지
너의 주먹에 맞서는 나의 비계
소련군 방어전술을 중심으로 보는건 또 색다르군요.
쿠르스크를 볼때 마다 느끼는거지만 저 떡진지를 30Km나 뚫고 들어간 호트가 괴물인거임? 아님 호트에게 30Km만 내주고 막은 소련군 방어진이 괴물인거임?
듈 다.
사실 호트의 실패도 심했어요. 판터를 티거급으로 생각하고 좌우 측면 배치.
근데 정작 소련군 전차 상당수는 그 결함많은 쿠르스크시절 판터에게 잡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