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討議하고 實踐에옮기고
대자연속에 몸이 푹 놓인 때의 한없이 여유로운 해방감, 산에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새로운 “발견”과 “감동적인 느낌” 힘들여서 도달한 정상에 펼쳐지는 웅대한 Panorama앞에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피로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뿜과함께 솟구치는 “성취감,” 이 감동, 태양이 동쪽 하늘에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면 하늘이 Orange색으로 물들여지면서, 먼동이 트는 장엄한 광경, 산들은 우리에게 한없이 아름다운 연출을 보여준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의 발견” 감동을 얻기 위해, 필자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필자가 처음 산을 좀 알기 시작하게 되던 초창기에는 정신없이 무턱대고 막연히 산에 심취되면서 산을 심도있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알려고 정신없이 몰두하게 되었었으며, 좀더 높게, 좀더 곤란(困難)함을 지향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일류Alpinist로서 손색없는 수준으로의 목표와 이념에 가득 차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는 와중에도 산에 온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많은 정예(精銳)Alpinist들이 귀중한 생명을 잃어가는 비보가 세계도처에서 들려오기도 하였었는데, 이러한 비통한 조난소식을 접할 때마다 깊은 충격과 때로는 좌절감마저 생길 때도 있었으며, 산에 대한 숭상심(崇尙心)이나 동경심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바뀔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이미 등산이란 생활의 일부분이며, 언젠가도 이란을 통하여 논했듯이 산은 필자에 있어서는 “종교”요, “신앙”의 대상인지 오래이며, “삶”의 보람이며, “인생” 그 자체로 변해져 있다.
또한 산이란 필자에게 있어서는 교사(敎師)이며, 도장(道場)이며, 진정한 학교였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함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경우 체력단련이라던지 정신수양이라는 것보다는 단지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면서 한가지 목적에 열중하는, 자연속에 푹 빠지는 것이 좋다는 것, 그 일념뿐인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취미를 가진 악우들을 사귈 수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더 한층의 보람된 즐거움이였었다.
그러나 여기 이웃나라 일본국의 신년도 월간 산악지(月刊 山岳誌)에 실린 오합지졸적 등산(烏合之卒的 登山)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띠어 실어본다.
200자 원고지 5매분량의 문장이긴 하나, 왜 신년호부터 이런 기사를 실었나 하면서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느껴져 인용해본다.
세계가 개인중시 풍조의 흐름으로 변해 가는 탓인지는 몰라도 소위 선진국에서의 언론임으로 필자
의
시선이 끌린 것 같다.
필자가 수차에 걸쳐 그 나라에서 보고 느낀 것과, 또한 그 동안 그 나라 여러 계층의 인사들과의 교분을 통하여 알고, 또한 느끼고 있는 그 나라는 단합심이 강하고 사명감의식=책임감의식이 투철하고 공중도덕심 또한 부러울 정도로 감명을 받았었는데, “진화(鎭火)보다 방화(防火)”라는 우려의 뜻이 담긴 예비적 성격차원인지는 몰라도 이런 기사가 필자로선 의아(疑訝)하게 생각되는 것이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다.
등산의 형태의 하나로 Party등산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일컬어는 Party등산이란 몇몇이 스스로가 임의로 모여진 Party를 일컬어는 것이며, Party등산에는 활동의 장(場)과 그리고 목적이 있고, 또한 Leadership, Followership, Partnership의 상태 및 이의 관계 등, 여러가지 견지(見地)에서의 논의를 하는데, Party등산을 하는 측에서는 자연적으로 Party가 왜 필요한가가 큰 과제임으로,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협의”을 갖고, 또한 이에 필요한 Rule을 만드는 등의 토의가 거듭되어지게 되며, 등산준비활동의 하나로 등산목적, Member 각자의 임무, 조난 등,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에 대비한 주의사항 등을 토의하기 위한 모임을 갖고, 여기서 모든 것을 “승인”하고,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장(場)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임자체를 단순히 시간을 소모하는 것으로 생각해 귀찮게 여기거나, 등한시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모독이 시작되는 것이며, 오합지졸적 등산(烏合之卒的 登山)의 요인이 되는 것인데,
이런 Party일수록 눈에 띄게 요란하고 시끄러우며, Hegemonie의 쟁탈전이나 일삼는 등, 오합지졸이 무엇인지, 또한 이미 오합지졸로 낙인찍혀져 있음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그간 그 산악회가 지니고 있는 값지고 고귀한 명예와 전통을 지키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Party들을 보고 있으며, 반면, 부지중 자취없이 사라져간 산악회도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등산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Party를 개인의 주장만이 우선하는 오합지졸로서 끝맺음하기보다는, 서로의 개성(個性)을 존중하면서도 규율있는 집단의 한사람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첨언(添言)한다면 공(功)은 상대방에게 돌리려는 미덕이 아쉬운 요즈음이다.
즉 졸렬한 권모술수(權謀術數)에 의해서 얻어진 칭찬(稱讚)은 가치없고 창피스러운 칭찬임을 본인 스스로 느낄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즈음 느닷없이 변해버린, 어떻게든지 성취(成就)하고 보자는 왜곡된 사회풍토의 흐름도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토의 흐름으로는 확고하고 굳건한 전통적으로 역사에 남을 Party로 뿌리가 내려질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넓은 시야(視野)로 볼 줄 모르고, 즉흥적인 것에 치우치기 쉬운, 주입식교육의 병폐(病弊)의 치유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필자의 소속산악회, 심지어 등산경력이 많다는 원로임을 자처하는 산각인들을 맞날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등산”을 하는 것은 단지 “건강증진”이나 “여가선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란 주입식교육의 영향에서 비롯된 탓인지는 몰라도, 등산을 거듭하다보면 다양화시대(多樣化時代)에 걸맞는 산에 대한 시야(視野)도 차차 넓어져서 자연에 대한 인식(認識)도 깊어지고, 넓어져서 자연보호운동을 선진국들처럼 일반 환경단체가 아닌 산을 너무나 잘 아는 우리 산악단체의 몫이어야 하는데, 2선(線)으로 물러서서 남의 일처럼 처다만 보고 있다니, 잘못되어도 너무나 많이 잘못되고 있다.
우리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반성(自己反省)의 힘이 있는 법임으로, 이질적(異質的)인 소수들도 대다수의 진실된 계층의 행위에 동화되게 마련이나, 이질적인 계층이 많아질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항상 내 주장 일변도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는 마음가짐만 잃지 않는다면 오합지졸이란 발붙이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지론이다.
여기 문뜩 76년 6월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산악회 “회지”에 기고했던 “Alpinist의 내면 조건”이란 기사중 “전(全)”과 “개(個)”의 대목이 머리를 스친다. 전체의 전제조건은 각 개인인 것이며,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글이었었다.
필자가 알기로는 분명 그 나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이 배어져 있는 나라로서 이웃과의 유대가 돈독하고, 매사에 분명하며, 필자개인의 예를 들자면, 95년 7월, 직장관계로 10여년간 일본국 동경에서 거주하다 아이들의 장래 교육문제로 영주귀국한 필자의 막내사위의 체험담으로서, 최종 그곳 거주지에서는 약 2년여정도밖에 거주치 안았는데도 불구고, 그곳 Apart주민들이 오직 한 세대뿐이던 한국인에게 대대적인 환송회를 베풀어 준 사실과, 또한 외손자의 경우, 의무교육법에 의거 그곳 초등학교에 봄에 갓 입학하였던 그 학교 유일한 한국인학생인데도 학교에서 성대한 환송회를 열어줬었다는 사실로서, 해방 후까지 이어져왔던 Tonarikumi정신(隣り組=이웃 사촌정신?)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우리 나라의 대도시 Apart의 경우라면? 하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동 어린 추억거리가 되어있다.
한가지 두고두고 부럽게 생각되는 것으로는 지난 96년 11월 6일로 만 94세를 맞이했던 Yoshizawa Ichiro(吉澤一郞)라는 일본국의 원로산악인에 관한 것으로서, 지금도 그 나라 월간 산악지 “산과 계곡(山と溪谷)”에 매월 1 Page식을 할애해서 그분의글을 실어드리고 있는데, 요 몇년사이의 글은 고령의 탓으로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지면(紙面)을 할애해 드리고 있는 점이다.
동격대(東京大)출신으로서 일본산악협회 부회장도 역임했고, 일본산악협회 77년 Mt, K2 원정(遠征)때에는 총대장으로(대장 Sinkai isao=新貝 勳) 고령임으로 Base camp까지 오르는데 있어서 젊은 대원 2명이 앞뒤로 긴 장대 2개를 양옆에 들고 그 노선배(老先輩)를 그 안에 들어가게 해서 계곡을 건너는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서 매우 흐뭇했었으며, 이 역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점이다.
우리나라도 기존의 반상회제도만 잘 활용한다면 삭막한 사회상은 개선될 수 있으리라고 보며, 급기야는 우리 산악계도 현재보다는 “질”이 훨씬 높아지는 계기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철저하고, 분명하고, 특히 선후배가 분명하면서, 서로서로 도우면서, 용서해주고 양보해 주려고 하는, 그리고 상대방을 부추겨세워주는 정신이 그 나라 국민성으로 되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옛날에는 우리도 그랫었는데하고 필자로 하여금 새삼 마음을 다시 가다듬게 해주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요즈음은 앞 뒤 생각지않고 그저 덮어놓고 좋은게 좋다는 사고일변도(思考一邊倒)로 얼버무리는 못된 병폐가 문제로서, 그러나 직접적인 일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양보가 없는데, 요는 우리 모두의 장래를 생각하는 안목위주의 판단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1997,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