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홍수 시대는 죄악이 관영하였고
하나님께서 의로운 노아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였습니다.
죄악의 관영, 그 타락한 소굴을 향한 정의의 십자포환은 멸문지화요,
그 황폐한 곳에서 사막의 시내가 흐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타락의 늪, 그 곳에 임하는 정의와 사랑은 심판과 구원의 종말론적인 경륜입니다.
정의와 사랑의 통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으로 나타나지만
정의는 죽음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사랑은 생명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성서지대의 범죄와 타락은 인류의 몫이요,
정의의 심판과 긍휼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죄의 처벌과 용서의 구원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프레임이었습니다.
죄진 사람의 변화, 곧 회개를 통하여 용서받고 구원받은 경우는
구약의 성서지대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구약 성서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였지만
죄악으로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의 구원, 곧 회심의 역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고라의 패역은 회개의 여지가 없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범좌와 타락, 그 곳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자와 진리, 은혜와 긍휼이라는 구원의 프레임이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홍수의 심판, 그것으로 끝이었고
광야의 이스라엘은 사망의 모래 무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으로 심판 받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공의, 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새 일을 통한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새 일은 인자와 진리를 따라
그 선한 뜻을 이루는 생명의 구원입니다.
생명의 구원, 그 종말론적인 경륜은
성서지대의 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심판과 언약의 말씀을 이루는 사랑의 정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온 몸의 소름이 돋는
하나님의 정의, 그 칼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득 신약의 복음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바로 그 틈새의 구원인 것을 꺠달았습니다.
죄악의 탁락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틈이야말로 은혜의 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미투, 위드유 운동은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회심할 수 있는 그 틈새마저 타락으로 일관하다가 매맞는 정의의 채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파들의 성문화, 그 타락의 늪은
민주와 인권과 정의의 옷을 입은 주체이념의 공동체적 삶의 향유입니다.
좌파들의 타락은 곧 좌파 문화의 예술적 가치요,
어느덧 우리 사회는 좌파의 문학과 예술로 점령되었습니다.
드러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좌파의 썩은 뿌리는 빛을 가장한 어둠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작금의 큰 뱀이 작은 뱀을 잡아먹는 미투 운동은 사회 정의 구현도 아니요,
그저 약육강식만 존재하는 짐승의 생존 법칙일 뿐입니다.
범죄와 타락은 지속성과 연속성의 관성이 작동하여
틈새의 회심, 그 구원의 길을 찾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죄악의 수레는 구르는 돌과 같아서
파멸의 나락, 그 아득한 절곡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누구든 한 번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실수는 두 번의 실수와 더 가깝고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번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실수는 두 번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상습적인 범죄로 이어져 죄악의 굴레가 됩니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은 그나마 도움의 여지가 있지만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람은 구원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행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고 용감하면
하나님의 정의, 그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종말론적인 구원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해, 그 때를 놓치면 무저갱의 절망 밖에 없습니다.
죄악에 대한 정의의 채찍은 직무의 유기가 없고
폭풍처럼 질주하는 심판의 병거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순간의 찰나입니다.
순간의 찰나, 그 구원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은 살리라는 신탁을 받은 하박국 선지자는
그 묵시를 판에 새겨 달렸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쉰들러 리스트는
소돔과 고모라의 성에서 롯을 구출하는 긴박한 구조의 순간입니다.
죽음의 길은 크고 넓은 문이요, 그 대로이지만
두만강을 건너는 탈북의 길은 숨이 멎는 긴장의 순간입니다.
사선을 넘는 생명의 길은
사망의 덫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만나 인자와 진리로 얻는 생명의 구원, 그 순풍의 돛입니다.
종말론적인 구원은 생명의 구조를 요하는 긴박한 구원의 역동적인 드라이버요,
그 구원의 책임은 은혜의 구원을 받은 복음의 생명줄입니다.
긴박한 순간에 복음의 생명줄을 내리지 않는 것은
구원의 직무 유기요, 그 책임은 자기의 생명으로 대신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불타는 가운데 에스겔 선지자에게 내려진 특명은
패역한 시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알리는 선지자가 있음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2:5-7)
☞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겔3:10-11)
☞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9)
☞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겔3:27)
☞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33:9)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여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는 것은
에스겔의 전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전도요, 또한 사도 바울의 전도였습니다.
관계 전도, 셀 전도, 태신자 전도 새생명 축제 등 효과적인 전도의 연구는
포스트 모던의 실용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한 인본주의 신앙의 교회 성장 프로그램입니다.
성서지대는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명은 전하여 믿게 하는 변화까지 책임을 묻지 않고
전하였느냐 전하지 않았느냐의 책임만 물었습니다.
전하는 것으로 죄인에게는 심판을 고지한 것이요,
듣고 믿어 구원받는 의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각종 교회성장 프로그램은 심판과 구원을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종교적 성장의 목적을 가진 인본주의 신앙의 세속적인 사이비 종교정책에 불과합니다.
☞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2-15)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
☞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
☞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
☞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527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5-17)
☞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5-6)
☞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5-29)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음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3:16)
☞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
☞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7-18)
그러므로 사죄의 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받은 은혜의 말씀을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온 천하에 전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선지자의 신탁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요
사회적 변화와 개혁이 아닙니다.
사도적 복음의 명령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종말론적으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나 사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전도는
성서지대 밖의 세속적인 종교적 목적을 수행하는 인본주의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요,
에큐메니칼 선교입니다.
일반적으로 선교는
복음적인 선교와 통전적인 선교와 에큐메니칼 선교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의 뜻을 품은 성서지대 최고의 전도와 선교의 정서일 것입니다.
참으로 사망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스텔스 선교는
생명의 향기도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고지하는 전도와 선교는
에스겔과 사도 바울처럼 그 말씀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푯대를 향하여 달렸던 율법의 정의를 사랑의 복음으로 성취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뜻을 그 언약의 말씀으로 영원히 이루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영생의 구원으로 가득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