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하고 버린 쓰레기를 통해 그 지역 주민의 실태를 파악하는 쓰레기사회학(garbology)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쓰고 버린 물건들이 아니라 쓰고도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더 잘 말해준다.
그 물건들이 ‘당장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이라면 더욱.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을 숨기지 못한다. 집에 있거나 없는 물건들, 그것들이 놓인 자리와 모양, 사용한 흔적에 의해 드러나는 것은 집의 어떠함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의 어떠함이다. 사람이 집을 떠나 있을 때도 집은 충실한 집사처럼 그 사람을 표현한다.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처럼 그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 집을 방문할 때마다 죽은 지 3년도 더 지난 어머니의 개 ‘다롱이’의 체취를 맡곤 했다. 집은 사람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기를 원하는 기억까지 가지고 있다. 사람의 내부에 집이 있다.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 사람이다.
멀리까지 가야 하는 일이 있다. 보아야 할 것이 멀리 있을 때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보기 위해 멀리까지 가는 사람은 없다. 멀리 ‘있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을 보기 위해 가거나 가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 멀리까지 가지 않으려면 멀리 있는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멀리 있기 때문에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그것이 하필 멀리 있을 뿐이지 않은가. 거리가 매혹의 이유가 된 것이 아니라 매혹이 거리를 넘어서게 하지 않는.가. 어떤 것들은 시간이 가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 예컨대 ‘독립영화’. 안타깝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멀리까지 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 초대 받았으므로, 그리고 초대 받은 사람이 소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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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논리 아니면 논리적 감성.
서로 배반적인 둘이 이루는 조화의 맛.
이승우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