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의 YouthPective 제 60회
사모아 논쟁의 명암
오래전 이 칼럼을 통해 사모아의 10대들(28회)과 정상적인 10대들(29회)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 바 있다. 모든 청소년들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Margaret Mead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였다.
Mead의 연구 중에서도 1950년에 발간된 “사모아의 청소년(Coming of Age in Samoa)”은 Stanley Hall이후 청소년기는 불가피하게 동요하는 것으로 당연시되어 온 것을 사모아와 같은 사회에서는 그러한 동요가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청소년기를 불가피하게 질풍노도로 보는 관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평가된다.
Mead는 당시 미국령이었던 사모아의 한 작은 섬에서 수개월동안 사춘기 소녀들의 삶과 성장과정을 관찰하고 감정과 경험을 인터뷰한 결과를 당시의 미국 청소년들의 성장과정과 비교하였다. 그녀의 결론은 사모아의 소녀들은 심각한 정서적인 위기를 겪지 않고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성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Mead를 비롯한 문화인류학자들의 주장은 인간의 연령에 따른 성장단계가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신체 변화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그러한 변화에 대한 해석을 강조하며 사모아와 같은 일부 문화권의 소녀에게서 나타나는 발달적 연속성은 미국과 같은 서구 문화에서의 발달적 불연속성과는 대조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이른바 “본성 대 양육(nature and nurture)”과 관련하면서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생물학적인 것인지 환경적인 것이지 그 상대적 중요성을 둘러싸고 상반되는 입장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타고난 유전적 요인이 “본성”이라면 문화적 환경은 “양육”으로 대별된 것이었다. Mead의 “사모아의 청소년”은 사람들이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방식과 인종, 문화는 물론, “본성 대 양육” 논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Mead의 연구결과는 뉴질랜드의 인류학자였던 Derek Freeman에 의해 전면적으로 반박되면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편견과 학자적 윤리는 물론, 인류학적 현지조사의 방법과 이론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Freeman은 Mead가 사망한 이후 그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1983년부터 몇 권의 책을 통해 Mead가 사모아 섬에서 추진한 연구가 의문투성이라고 증거자료와 함께 주장하였다.
Freeman은 Mead가 단지 25명의 소녀를 대상으로 성경험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참여자들의 진술의 사실여부, 행동주의 이론에 대한 신념을 가진 채 사모아 섬에 왔다는 주장에 따른 Mead의 선입견 문제, 사모아 현지 언어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비판을 제기한 것이다. Freeman의 비판은 “마거렛 미드 치명적 날조(The Fateful Hoaxing of Margaret Mead)”라는 저서의 제목을 통해서도 어떠한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Mead에 대한 이러한 비판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지속된 학계의 논쟁을 통해 여러가지 쟁점에 대한 인정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Mead가 인류학에 새로운 이념과 변화의 계기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물론 Freeman의 연구에 대해 미국 인류학자들의 비판도 맹렬했지만,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결국 사모아에 관해 무엇이 정말 진실인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보게 된다.
과연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 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인간행동에 대한 “본성 대 양육”의 논쟁에서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결정적인 증거는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생물학적 과정을 거치는 청소년들이 각자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청소년기를 어떤 식으로든지 각기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Mead의 연구가 진실성을 의심받았다고 해서 또 오늘날의 현지조사연구기준에서 보면, 그녀의 연구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도 그래도 그녀의 “사모아의 청소년”이 공헌한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Stanley Hall을 중심으로 질풍노도의 특징을 강조하는 생물학적 결정주의에 대해 문화결정론적 입장을 대두시켰고, 인간행동의 유전적 토대와 환경에서 받는 영향의 중요성 등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촉발시킨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모아의 소녀들은 과연 스트레스와 갈등의 증상들이 없이 성인으로 성장하였을까? 미국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는 청소년기 자체의 본질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사모아가 아닌 미국이란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가?
Arnett는 청소년시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행동 중 하나 이상에 대해 강조한다. 즉, 첫째는 타인과의 갈등, 특히 부모와 다른 권위적 인물과의 갈등, 둘째는 변덕스러운 기분, 셋째는 모험적인 행동 등이 다른 연령층보다는 청소년층에서 더욱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행동을 모든 청소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청소년들 중에는 질풍노도적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시기에 큰 어려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크게 심각한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많은 경우 일시적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Mead의 “사모아의 청소년”은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본이 발간되어 있다. 사모아 논쟁의 명암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책 내용을 직접 읽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아 소녀들의 삶에 비해 미국 소녀들의 삶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Mead의 말을 적용하면, 오늘날의 우리의 사춘기 소녀, 그리고 청소년들의 삶은 사모아나 미국에 비해 어떤 모습으로 그릴 수 있을 지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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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의 글이었습니다. 인용할 때는 다음의 출처를 밝혀주십시요. http://cafe.daum.net/ewelfare CJ의 YouthPective 제60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