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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펠러 쪽에 노란색 페인팅이 독특한 Bf 109)
이야기를 시작함에 앞서서 몇가지 명칭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듯 합니다.
첫째, 메서슈미트 Bf 109 전투기의 명칭을 "Me 109"로 부르기도 합니다. 보통 연합군측에서 부를 때 Me(메서슈미트)109 라고 불렀고, 독일 공군에서 부를 때는 주로 Bf 109 (제조업체 이름 : Bayerische Flugzeugwerke Messerschmitt)에 앞부분을 따서 부르는 공식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일단 Bf 109로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Me 109라는 명칭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둘째, 독일 공군을 루프트바페(Luftwaffe)라고 부릅니다. 루프트(Luft)는 공기(Air)라는 뜻이고 바페(Waffe)는 군대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미국 공군을 Air Force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뭐 똑같은 얘기인 셈입니다. 하지만 "루프트바페"라는 명칭은 2차대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을 갖춘 제3제국의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하였던 명칭입니다. 물론 현대 독일 공군도 루프트바페라고 부르지만 2차대전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치 독일 공군"이라는 명칭보다 "루프트바페"라는 명칭으로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제1장 : Bf 109의 기원
(미국 라이트 형제의 최초의 비행기 - 1904년 촬영)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엔진이 장착되어 자체 추진력을 가진 비행기라는 것을 "발명"(이때는 발명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겠네요.)하여 최초로 12초 동안 무려(?) 37m를 비행하는데 성공했던 것이 1903년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무거운 엔진을 장착하고도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라는 것에 열광하게 되었습니다. 결과 불과 10년을 조금 넘는 기간동안 비행기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유럽에서 1차대전이 발발했던 때가 1914년이니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이후 불과 10년 남짓 시간이 지난 후였지만 이미 유럽 상공에서는 기관총으로 무장된 비행기들이 적의 꽁무니를 쫓으면서 총격을 가해 살상하는 공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게다가 비록 조잡한 수준이었지만 지상의 적 보병부대나 시설들을 비행기에서 폭탄을 투하해서 파괴하는 소위 "폭격"이라는 "새로운 공격 수단"이 시작되었습니다.
(1913년에 영국이 개발한 최초의 폭격기, 4.5jg 무게의 폭탄을 12개(총 54kg) 투하할 수 있었습니다.
1치대전에는 이정도 폭격도 지상군들에게는 큰 공포가 될 수 있었습니다.)
(25년이 지난 1939년 미국 노스아메리카社에서 생산한 B-25 미첼 폭격기.
무려 5,000kg에 가까운 폭탄을 7,500km를 비행하여 폭격할 수 있습니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열강들은 저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로 생산한 전투기들을 가지고 공중전을 벌였고 붉은 포커 3엽기를 몰고 전쟁 기간 내내 80기의 연합군 전투기들을 격추시킨 독일 최고의 격추완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토벤과 같은 "창공에 영웅"이 탄생하기도 하였습니다.
(1차대전 최고의 에이스 독일 공군 만프레드 폰 리히토벤,
1918년 공중전에서 격추되어 사망할 때까지 80대의 연합군
전투기가 그의 대기록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1차대전 격추왕 랭킹 2위인 프랑스 공군의 르네 퐁 대령이 몰던 SPAD XIII 쌍엽기.
퐁 대령은 "붉은 남작"의 기록에서 5대 뒤진 75대 격추를 기록하였습니다.)
1차대전은 1918년 독일 진영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지만 연합군 열강들의 뇌리에는 대전 기간 내내 독일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맛보았던 끔찍한 공포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을 체결하면서 열강은 독일의 재무장을 철저하게 봉쇄하려고 합니다. 1930년대를 넘어서면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의 나치당은 보다 강력한 독일의 군력 증강을 위해서 공군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하인켈社나 아라도社와 같은 독일의 항공기 제작회사들에게 베르사이유 조약의 허점을 찾아내서 강력한 차세대 전투기 개발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1차대전이 끝난지 16년이 지난 1934년 당시 독일 공군이 보유하던 신형 복엽기 He 51(하인켈)이나 Ar68 (아라도)은 1차대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전투기였지만 1차대전 이후에 무섭게 발전하는 열강들의 항공기 개발 움직임을 보았을 때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우수한 신형 전투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로 히틀러는 결정하게 됩니다.
(2차대전 루프트바페의 격추왕 아돌프 갈란트의 애기(愛機) He 51. 유럽 상공에서 이런 복엽기로 영국이나 미국의
신형 전투기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의 허리케인이나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열등한
단엽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그리 떨어지는 성능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보다 강력한 신형 전투기의
개발은 2차대전을 획책하던 나치에게는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사실 1차대전 승전국 입장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조차 2차대전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고, 항공기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던 1930년대 중반 (즉 2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싯점에서) 바짝 서둘러서 획기적인 전투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결과 서구 열강들이나 소련보다 한발 앞선 성능의 전투기들을 보유하게 됩니다.
1930년대 당시 독일에는 4개의 우수한 항공기 제작회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우수한 개발 능력을 동원하여 나치가 요구하는 차세대 전투기에 낙점 받기 위해서 혁신적인 전투기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게 됩니다. 우선 선두 기업이라 할 수 있는 하인켈社는 H112V1이라는 단엽기를 제작합니다.
(하인켈에 혁신적인 항공 엔지니어 귄터 형제가 설계한 H112, 2차대전 후에 동생인 지그프리드 귄터는
소련 스파이에게 포섭되어 소련으로 넘어가 Mig 15 전투기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됩니다.)
한편 아라도社는 Ar 80V1이라는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쟁 초반에 이 기종은 성능의 열세와 몇가지 중요한 결함으로 인해서 일찌감치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세번째 업체는 2차대전 루프트바페의 양대 전투기 중에 하나인 Fw 190으로 유명한 포케볼프社였습니다. 이회사는 Fw 159 V1이라는 기종을 제작하였습니다. 다른 3개 업체가 독일제 엔진을 사용하지 않고 보다 신뢰성이 높은 영국 롤스로이스 케스트럴 V 엔진을 사용하여 샘플을 제작한데 반하여 포케볼프는 독일제 610마력의 융커스社 엔진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머지 회사들이 영국 엔진을 사용한 이유는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한 제약으로 당시까지는 독일 엔진의 성능이나 신뢰성이 외국제 엔진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은 상황이었으므로 일단 경합에서 앞서 가기 위해서 안전한 엔진을 선택하고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파워에서도 밀릴 뿐만 아니라 엔진 자체 신뢰성에서도 문제를 노출한 포케볼프 역시 탈락하게 됩니다.
(시험 비행 중 불시착한 포케볼프 Fw 159. 전투기라면서
현대에 세스나 경비행기에서 볼 수 있는 파라솔 형 날개를
도입한 것도 빗나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자! 드디어 네번째 경합에 참가한 회사가 바로 바이예리쉐 플룩조이베어케 메서슈미트 (Bayerische Flugzeugwerke Messerschmitt)라는 발음하기 아주 힘든 회사이며 동시에 4개 회사의 경합에서 최종 승리하게 되는 Bf 109 전투기의 제조사입니다.앞으로 일반적으로 이회사를 부르는 약칭인 BFW社로 편의상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메서슈미트는 Bf 109 V1이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였습니다.
(Bf 109 V1 프로토타입 샘플의 도면)
1935년 10월에 루프트바페는 4개의 샘플 기체를 한곳에 모아놓고 성능을 비교하는 시험 비행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성능이나 안정성 면에서 아라도와 포케볼프는 탈락하고 하인켈과 BFW의 2파전으로 좁혀지게 됩니다. 1936년 고심끝에 루프트바페는 최종 선정 기종으로 BFW社의 Bf 109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성공의 원인으로는 BFW社가 타 경쟁업체에 비해서 후발 주자이며 비교적 명성도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최종 선정된 결과에 대해서 경합 싯점에서 10년 전부터 경쟁업체를 추월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자와 연구를 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는 항공공학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던 빌헬름 메서슈미트 박사를 영입하였고, 메서슈미트 박사의 추천으로 아라도에서 설계자로 근무하던 발터 레델 박사까지 스카웃을 하여 연구진을 강화하게 됩니다.
천재적인 항공기 엔지니어 빌헬름 메서슈미트 (1898년 ~ 1978년)
영국에서 스핏파이어를 설계한 레지널드 미첼과 함께 당대 가장
우수한 항공 공학자였습니다.)
메서슈미트 박사와 레텔 박사는 Bf 109의 직전 모델인 Bf 108을1934년에 스포츠용 항공기로 개발하여 BGF에서 생산하여 실제 여러 유럽 국가들로 판매하게 됩니다. Bf 109와 흡사한 모양의 Bf 108의 개발은 메서슈미트 박사와 그가 속해있는 BGF에게 단엽기 설계와 생산에 풍부한 경험을 갖게 했고 이점이 다른 3개社에 비해서 강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여기서 메서슈미트 박사가 Bf 109를 설계하면서 얼마나 앞서가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고민했는지 기체의 특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째, Bf 109는 당시 아직도 건재하던 복엽기들은 물론이고 단엽기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납작하고 날씬한 디자인으로 되어있습니다. 날렵한 모양은 항공 공학적 측면에서 스피드를 최대화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고 공중전의 상황에서 피탄 면적이 줄어든다는 전투기로써 중요한 강점을 지니게 됩니다.
둘째, 기체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아예 주익 날개에는 기관총과 같은 무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설계했습니다. 주익 대신에 동체에 2정의 기관총을 장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아이디어는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개발 중인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가 주익에 기광총을 무려 8정이나 장착한다는 정보를 받게 되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지게 됩니다. 또하나의 날개 경량화 설계로는 랜딩 기어 구동부를 날개 속이 아닌 동체 가운데에 위치하여 날개를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덕분에 다른 단엽 전투기들과 달리 Bf 109는 랜딩기어가 바깥 방향으로 접히면서 닫히는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착륙하는 Bf 109, 랜딩 기어가 바깥에서 안쪽으로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날개 자체는 매우 가벼워지게 됩니다.)
(Bf 109의 독특한 랜딩기어 도면)
1936년 선정 발표 후에 메서슈미트 박사에게는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게 됩니다. 즉 앞으로 적이 될 영국에서 생산하는 엔진을 장착하는 전투기를 생산하게 되면 막상 영국에서 엔진 공급을 금지하게 되는 경우 생산을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파워가 떨어지더라도 포케볼프가 고집하였던 독일제 융커스 유모(Jumo) 엔진을 장착한 두번째 프로토타입의 제작을 서두르게 됩니다.
(Bf 109 V2(두번째 프로토타입)에 새롭게 장착된
융커스 유모(Jumo) 엔진)
(Bf 109 V2에 장착한 융커스 엔진을 생산하는 융커스社는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의
생산 업체로 유명합니다. 융커스社는 하인켈과 함께 루프트바페 주력 폭격기 생산
업체로 유명합니다.)
드디어 Bf 109A라는 이름의 최초의 양산품의 생산을 앞두고 메서슈미트 박사는 영국의 신형 전투기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가 주익에 총8정의 기관총을 장착하면서 각 총 당 300발의 탄환이 공급된다는 정보를 듣고 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Bf 9의 경우 동체 캐노피 바로 앞에 장착된 2정의 7.92mm MG 기관총은 각 1,000발의 탄환이 공급되어 총 2,000발이 준비되는데 반해 영국 신형기의 경우 300발 X 8정 = 총 2,400발의 탄환이 장착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8정의 기관총이 동시에 300발씩을 발사하는 것보다 2정의 기관총이 1,000발씩을 발사하는 것이 "더 오래 사격을 할 수 있다"는 장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공중전에서는 순간에 발사되는 탄환들이 적기를 얼마나 강력한 타격으로 맞추느냐에 격추 여부가 달려있는 탓에 실제 사격 가능 시간보다는 순간 사격 집중도를 더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발되었고 결국은 영국 상공에서 Bf 109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되는
영국 최고 걸작 전투기 스핏파이어. Bf 109의 기관총 무장 계획이 널을 뛰게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합니다. )
분명히 스핏파이어의 초기형(A 타입)은 무려 8정의 7.7mm 브라우닝 기관총을 주익에 장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핏파이어도 파생형이 계속 나오면서 무장에 대한 원칙은 수시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어쨌든 Bf 109 입장에서 무장의 강화는 절대적인 과제였습니다. 특히 1차대전이 끝난 후에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나무에 천을 씌운 허약한 기체가 아니라 최소한 중요한 부분은 철판으로 보호를 하는 구조거나 심지어는 전체 기체의 표면 재료를 철판으로 사용하는 튼튼한 기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1차대전 당시 공중전은 어차피 나무 뼈대에 천을 씌운
전투기들이 똑같은 조건에서 공중전을 벌이다 보니 1~2정
의 기관총들을 사용하더라도 정확히 맞추기만 하면 충분히
격추가 가능한 허약한 기체들이었습니다.)
서로가 어정쩡한 화력으로 사격을 받는 경우에 쉽게 파괴되거나 격추되지 않는 상황이다보니 이제부터는 얼마나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하였느냐가 경쟁 우위를 점하게 만드는 새로운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메서슈미트는 최초의 양산 모델로 준비중이던 Mf 109 A의 진행을 멈추고 서둘러서 주익에 기관총을 장착하려고 하였으나 워낙 얇게 만든 주익 안에 간신히 기관총은 집어넣었지만 탄창을 집어넣으려 해도 공간이 협소해서 불가능했습니다. 탄창에 있는 탄환을 길게 빼서 주익 속에 집어넣는 방안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기계적인 결함으로 자칫 탄환 공급이 제대로 안되서 사격이 멈춰질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결함을 해결하려면 좀 더 긴 시간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냥 세월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롭게 강구한 대안은 프로펠러 동축에 기관총을 심어서 이미 본체에 장착된 2정의 기관총에 1정이라도 추가해보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즉 MGFF 20mm 기관포가 2정의 기존 기관총과 함께 발사되는 경우 적의 신형 전투기에 비해 열세였던 화력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동축에 뚫린 총구에서 20mm 기관포가 발사되도록 되어있는 초기형 Mf 109)
결국 기관포는 엔진 위에 V자형 실린더 사이에 장착되어 총구가 동축 구멍으로 연결되는 설계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높은 온도로 가동 중인 엔진위에 올려진 기관포는 쉽게 과열이 되어 사격을 한지 얼마 안되어 고장이 나버리거나 사격 중에 불규칙한 진동이 발생하여 비행 자체가 위험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양산 일정에 쫓긴 기술진은 20mm 기관포대신 기존 기관총과 동일한 7.92mm MG 기관총을 추가하여 3정의 기관총이 장착된 최초의 양산 모델 Bf109 B-0의 생산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축 기관포 장착 계획은 무기한 연기하고 실용성의 확보를 위한 연구를 계속 진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최초의 양산 모델인 Bf 109B는 그동안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점으로 인해서 기술진을 당황하게 만드는데 바로 양력 증가를 극대화하려는 주익 설계가 착륙할 때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서 큰 각도로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자칫 활주로에 머리를 쳐박고 추락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접지 직전에 기체가 좌측으로 기우는 불안정한 현상이 일어났고 심지어는 고속으로 비행시에 주익의 진동이 발생하고 미익도 불안정해진다는 결함이 발견됩니다.
(최초의 양산 모델 Bf 109B)
루프트바페의 수장 괴링은 1936년 최초의 프로토타입 Bf 109 V1를 선정한 후에 거듭되는 문제의 발견을 보고 받았지만 비밀리에 해결할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독일 공군의 위용을 자랑하여 자신의 보스인 히틀러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싶은 욕심에 결함이 해결되지도 않은 첫번째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같은 해에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 기간 중에 세계 각국의 보도진을 불러서 시험 비행을 하고 과시하는데 급급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험 비행을 마친 후에 무려 1년 동안 결함 해결을 위해 기술팀이 온갖 노력을 쏟아붓게 되어 더이상 언론매체 앞에 신형 전투기를 과시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자 유럽 국가들의 기자들과 군사 관계자들은 괴링이 자랑을 늘어놓았던 신형 전투기가 실제로는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합니다.
(헤르만 괴링 루프트바페 사령관(1893년~1946년) 유난히 튀는 패션
감각으로 과시욕이 지나쳤던 그는 히틀러에 이어서 자신이 2인자라는
생각으로 친위대 사령관 히믈러와 줄곧 권련 암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 때 그는 "붉은 남작"과 같은 전투기 에이스로써 영웅
대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결국 전범 재판 도중에 독약을 먹고
음독자살을 하며 추악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당황한 괴링은 무엇보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의 루프트바페와 신형 전투기에 대해서 비웃지 않을까 걱정되어 1937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국제 항공 레이스에 Bf 109B형 3대를 급히 출전시킵니다. 그때까지 상당 부분 결함은 해결된 상태지만 여전히 루프트바페 최고의 실력으로 선발된 3명의 조종사들이 이 "위험 천만한" 전투기를 조종하게 됩니다. 이유는 여전히 이착륙시에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조종사가 아니면 추락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의 조종사들만이 조종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과는 3대의 Bf 109들이 대회의 주요 종목을 휩쓰는 쾌거를 올리게 됩니다. 최고 속도, 평균 속도, 급상승 능력, 급하강 능력등에서 다른 나라 비행기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여기에는 승부에 집착한 괴링의 꽁수가 숨어있었습니다. 즉, 3대의 Bf 109는 전부 양산 모델 Bf 109 B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중 한대는 무려 960마력의 다이믈러 DB600 엔진을 장착한 특수 제작기 Bf 109 V13이었습니다.
(Bf 109 V13 - 당시로써는 최고 파워의 1,000마력의 다이믈러 엔진을 장착하여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던 이 프로토타입 제작기는 훗날 2차대전 기간 중에 독일 최강의 전투기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될 Bf 109의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스위스 대회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괴링은 이번에는 무려 1,000마력의 다이믈러 DB601 엔진을 장착시켜서 비행 신기록 도전을 발표합니다. 대대적인 선전과 함께 당시 세계 비행기 신기록을 세우겠다고 호언장담한 후에 비행 시범을 시작하는데 당시로서는 입이 떡 벌이질 엄청난 기록인 시속 614km 최고 속도를 보여주며 긱극 언론매체 및 특이 영국과 프랑스의 공군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이 속도는 당시 최고 기록에서 무려 시속 50km가 증가한 신기록이었습니다.)
(1940년 영국 상공에서 격돌한 독일과 영국의 최강 전투기들에게 최대속도 시속 600km는 양쪽 다 가능한 성능
이었지만 불과 3년전이었던 1937년 Bf 109가 보여준 시속 600km 이상의 속도는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
하였습니다. 사진은 1940년 "Battle of Britain" 당시 치열했던 공중전)
처음에는 괴링의 객기와 과시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Bf 109와 만나게 된 DB600과 DB601 엔진은 당시에는 그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시작품이었지만 엄청난 신기록을 수립한 후에 다시 한번 최고 속도 기록 돌파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기종으로 1939년 4월에는 시속 759km를 기록하며 종전의 자신의 기록을 갈아 치우게 됩니다. 당시에 제대로 성능 제원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이 특수 제작기를 언론에서는 "Bf 109R"이라고 불렀는데 단지 속도 기록 수립을 위해 특수 제작기였일 뿐 실제 Bf 109의 계보에서는 전후 상관 관계가 별로 없는 버젼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링이 이렇게 루프트바페가 선정한 Bf 109의 끊임없는 속도 기록 수립에 집착한 이유는 단순한 과시욕뿐만 아니라 선정에서 탈락한 업체 중에 하나였던 하인켈이 Bf 109의 독주를 저지하고져 기존의 HE 112를 개조하여 속도 경쟁에 도전장을 내밀자 그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1937년으로 돌아가서 630마력에 독일제 융커스 유모 엔진을 적용한 첫 양산 모델인 Bf 109B-101이 본격적으로 양산을 시작하게 되자 드디어 루프트바페 비행 편대에 배치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Bf 109를 공급받은 비행단은 1차대전 영웅 "붉은 남작"의 이름을 따서 "리히토벤 비행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JG 132(JG=Jagdgeschwader는 Jagd(전투) + Geschwader(편대)를 합친 "전투 비행단"을 의미. 즉 132 전투 비행단이란 뜻)에 최초로 공급됩니다. Mf 109B-101은 또 다시 몇가지 개선을 마친 상태였는데 최초의 목제 프로펠러 대신 미국에 해밀톤社로부터 기술을 구입하여 생산한 금속 프로펠러를 적용하였고 최초 생산분이 적용한 630마력 융커스 엔진을 다시 업그레이드한 670마력 융커스 유모 210 엔진을 장착하였습니다. 그결과 4,000m 상공에서 시속 473km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하였고, 9.8분만에 6,000m 상공을 급상승할 수 있는 성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훗날 지속적인 성능 개선을 통해서 Bf 109 G 버전에 이르면 최대속도는 시속 640km까지 증가하게 되는데 당시 경쟁 기종이었던 영국의 스핏파이어의 최대속도가 시속 605km였던 점을 감안하면 메서슈미트 박사와 괴링이 그렇게도 집착했던 "가장 빠른 전투기"의 소원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1943년에 유럽 상공에 등장한 미국의 P-51 무스탕은 최대속도를 시속 700km를
돌파하면서 Bf 109의 아성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어쨌든 무스탕이 등장할 때까지 유럽
상공에서 속도만 놓고 봤을 때 가장 빠른 전투기는 Bf 109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다음 회에는 1937년 Bf 109의 실전 테스트를 위해서 당시 스페인에서 발발했던 내전에 히틀러가 24기의 Bf 109B를 지원한 사건부터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쉴틈을 안주십니다!!!. 비행기에 관심도가 좀 낮았는데 슬슬 올라가고 있습니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좋은내용도 올려주시고 감사드리고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사실 어제 밤에 가게에서 철야 작업이 있었습니다. 자정에 가게 문 닫고는 시간 맞춰 온 일꾼들 들여보내서 작업하는 것 지켜보면서 지하실에 있는 제 사무실에서 쉬엄 쉬엄 글 하나 써서 올렸습니다. 즐거움을 드렸다면 저도 기쁩니다.
전투기의 개발과정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갑자기 비행기들이 만들어 지고 싶어집니다. 큭~
더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이야 재미있다~~~~
형님 고맙습니다. ^^
아이쿠! 감사!!!!
요새 김준만님 글에 댓글을 단 것이 등록이 안 된 게 많았네요. 이상하다... 하여간, BF109는 아주 작은 비행기던데 뛰어났군요. 흥미진진~!
감사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