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거지(謫居地) 제주에서 사랑하는 부인의 부음(訃音)을 접한
추사선생(秋史先生)의 도망시(悼亡詩)
사단법인 한국한시협회 상무이사 草溪人 鄭 亮 元 謹識
도망시(悼亡詩)란 부인을 사별(死別)한 남편이 그 기막히고 애처로운 심정과 가슴에 맺히는 갖가지 회한을 시로서 표현하는 것으로 만시(輓詩, 弔詩)의 한 종류이다.
추사선생은 55세 되시던 해(1840 憲宗 6년)부터 63세(1848 憲宗 14년)까지 햇수로 9년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서 귀양살이를 하셨다.
선생이 이토록 오랜 세월 유배(流配)생활을 하시게 된 이유는 그때로부터 이미 10년 전인 1830년(庚寅)에 당시 부사과(副司果)의 벼슬로 조정에 있던 윤상도(尹尙度)가 그의 아들 윤한모(尹翰模)와 함께 이미 3년전에 병사(病死)한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덕망(德望)이 없었다는 것과 호조판서(戶曹判書) 박종훈(朴宗薰)이 나랏돈을 남용(濫用)한 탐오(貪汚)한 관리(官吏)라고 논척(論斥)한 상소(上疏)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노한 임금 순조(純祖)는 윤상도 부자를 중신(重臣)을 무함(誣陷)하고 군신을 이간(離間)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라고 하여 매를 치고 전라도 추자도(楸子島) 섬으로 귀양을 보내 위리안치(圍籬安置)를 시켰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인 경자년(庚子年,1840)에 조신(朝臣)인 김홍근(金弘根)이 윤상도 부자의 죄를 다시 논할 것을 상소하여 추자도에 있는 죄인들을 의금부(義禁府)로 압송(押送), 국문(鞠問)하는 과정에서 윤상도 부자의 경인년(庚寅年) 상소문이 실은 추사선생이 초안(草案)한 것이라는 허위진술이 나왔다.
이러한 허위자백이 나오자 삼사(三司)에서는 선생을 국문하여 크게 벌을 주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임금 순조도 대노(大怒)하여 선생의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다행이 당시의 권신(權臣)이자 시임(時任) 우의정(右議政)인 조인영(趙寅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사선생을 변호함으로 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제주로 유배(流配)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하시게 된 것이다.
선생은 21세 되던 해에 초취부인(初娶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를 여의고 3년 후에 예안이씨(禮安李氏)를 재취(再娶)로 맞이하셨는데 약관(弱冠)의 연세에 부인과 사별(死別)한 아픔에 크게 느끼신 바가 있으셨던지 예안이씨 부인과의 금슬이 참으로 자별하셨다고 한다.
先生이 제주도로 유배되신지 3년째인 선생 57세 되던 해의 섣달 14일에 적거지(謫居地)에서 30여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시던 부인 이씨가 그 전달인 동짓달 13일에 별세(別世)하셨다는 부음(訃音)을 접하셨다. 내외분의 금슬이 남달리 좋으셨던 선생은 제주로 오신 뒤 인편이 있을 때마다 예산(禮山)의 본댁(本宅)으로 서신을 보내셨는데 그때마다 빠짐없이 부인에게 별도로 언문(諺文)편지를 보내어 당신이 부인을 신애(信愛)하는 심중을 피력하시고 가사를 당부하셨다 한다.
선생이 제주로 가신 후 2년여 동안에 부인에게 보낸 언간이 상당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 간찰의 내용 중에는 남다른 두 분 간의 정분(情分)을 촌탁(忖度)할 수 있는 많은 사연들이 있다고 한다.
부인이 돌아가신 그날에 보낸 추사선생의 서신
부인이 별세하시고 한달이 넘은 시점에서 부인의 부음을 접하신 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니 선생이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보낸 편지는 부인 사후 7일째 보낸 것이고 그 앞에 보낸 것은 부인이 돌아가신 그날에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 수륙 이천리 밖 적거지의 위리 가운데서 사랑하는 부인이 오래 동안 중병(重病)으로 신고(辛苦)를 하다가 숨을 거둔 것도 모르고 그날 편지를 보낸 일이나 이미 고인(故人)이 되어 이레가 지난 사람에게 당신의 간절한 신애의 정을 절절이 담아 편지를 써 보냈던 일을 생각하니 선생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이고 그 비통하고 애절한 심회는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음을 접한 선생은 물론 당시의 예법(禮法)대로 비록 적거지일망정 마당에 짚자리를 깔고 소반에 정화수(井華水)를 올린 후 상투를 푸신 다음 본댁인 예산이 있는 북쪽하늘을 향하여 일장망곡(一場 望哭)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죄인의 몸이라 처상(妻喪)을 당하시고도 달려가 치상(治喪) 장례(葬禮)를 치를 수 없는 당신의 처지를 애통해 하시다가 체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당신의 그 비통한 심회를 표현할 방법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여기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추사선생이라고 하면 의례히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서예(書藝)의 대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행서(隸, 行書)의 독특한 필체(筆體)를 개발한 절세(絶世)의 명필(名筆)이라거나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유미,선미(儒味, 禪味)가 넘치는 산수(山水), 죽난화(竹蘭畵)를, 그리고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린 그림의 대가, 조금 더 아시는 분은 북한산(北漢山)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고증(考證)한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도 물론 사실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선생의 그러한 지엽적(枝葉的)인 천재성(天才性)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선생의 본령(本領)은 유학(儒學)으로 대단한 학자라는 것을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다
선생이 24세 되던 해에 사행(使行)으로 가시는 부친을 배행(陪行)하여 북경(北京)을 가셨을 때 당대 중국 최고의 석학(碩學)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그로부터 선생의 대단한 학문을 인정받음으로 서로의 교유(交遊)가 막역(莫逆)한 관계가 되었던 일이나 30대 초반에 대과(大科)에 급제한 후 청환(淸宦)을 두루 역임(歷任)하고 환로(宦路)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한 것 등이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고매한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생이시니 아마 선생은 부인의 부음을 접하시고 먼저 제문(祭文)을 지어 부인의 넋을 위로(慰勞)하고 당신의 비통(悲痛)한 심회(心懷)를 달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귀양을 오시면서 부인과 마지막으로 헤어지시던 기억을 회상(回想)하며 그 장면을 그림으로도 그려 보셨을 것이다. 그러나 제문(祭文)도 별리도(別離圖) 그림도 당신의 부인을 향한 지극(至極)하고 애틋한 심회를 모두 표현하기에는 미흡(未洽)함을 느끼시고 드디어 읊으신 시가 우리나라 도망시의 백미(白眉)로 온 나라 모든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많은 사람의 심금(心襟)을 울린 다음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한수이다.
필설(筆舌)로는 나의 이 기막힌 슬픔을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으니 저승에서 남녀간의 인연(因緣)을 주재(主宰)하는 월하노인(月下老人, 月下氷人)에게 송사(訟事)라도 하여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가 부부간으로 환생(還生)하되 그때는 부부가 서로 바뀌어서 당신이 지금의 나의 처지에 있어 보아야 그때에야 비로소 나의 이 비통한 심정을 그대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시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정교(精巧)하고 가장 깨끗하게 나타낼 수 있는 도구이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묘기(妙氣)가 있으며 언외언(言外言)이 있고 언외지(言外志)가 있으며 욕언미토(欲言未吐)의 경지(境地)까지를 유추가능(類推可能)케 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 한수 스물여덟자 속에는 우리가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무한(無限)한 함의(含意)가 있는 것이라 그 시를 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다음 백번 천번 음송(吟誦)을 한 후라야 비로소 그 시의 진취(眞趣)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대단히 변변치 못한 사람이 분수에 지나치는 졸문(拙文)을 쓴 것이 참으로 외람(猥濫)된 바가 많습니다. 한번 웃으시고 서량(恕諒)하십시요.
甲申 유월 晦日에 草溪人 鄭 亮 元
謹識配所輓妻喪 귀양지에서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노라
근직배소만처상
那將月老訟冥司 어떻게 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빌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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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世夫妻易地爲 내세에는 당신이 남편 되고 나는 당신 아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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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死君生千里外 나 고향집에서 죽고 그대 천리밖 귀양지에서 그 소식 듣는다면
아사군생천리외
使君知我此心悲 그때는 그대 아마 기막히는 내 이 심정 아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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