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 악한 마음을 가졌어도 겉으로 선한 것을 보이고 싶을 때는 속마음을 숨기고 선한 것처럼 보이게 행동할 수 있다.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살아서 자기과시를 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화를 낼 때는 자기과시를 하려고 생각할 겨를 없이 즉각 나타내므로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관대한 말을 할 때는 남을 속일 수 있어도 화를 낼 때는 남을 속이지 않는다. 어쩌면 화를 내는 마음이 자신의 진실을 여과 없이 드려내는 모습일 수 있다.
선한 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바른 기준이 될 수 있다.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의식에 입력된 위치가 달라서 나타나는 순서도 다르다. 인간이 가진 의식의 표면층에는 성냄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의식의 중간층에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성냄은 의식의 표면층에서 쉽게 나타나기 때문에 좀처럼 통제하기가 어렵다. 다음으로 의식의 중간층에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어서 욕심을 부리는지 알기 어렵다. 어리석음은 의식의 깊은 층에 있어서 알기 어렵다.
이처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의식의 층에 다르게 위치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과정도 각기 다르다. 인간이 사소한 일에도 화부터 내는 것은 성냄이 의식의 표면층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화를 내는 것을 쉽게 제어하기가 어렵다. 화는 아무 때나 쉽게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천박한 마음에 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화를 내는 것으로 한 인간의 마음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청정해져 가장 먼저 화를 내지 않는 것부터 나타난다. 이처럼 한 인간이 의식이 고양되는 과정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이 화를 내는 것이므로 화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때 의식의 표면층에 있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의식의 중간층에 자라 잡고 있는 탐욕이 줄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일을 쉽게 멈추지 못하는 것은 의식에 중간층에 있는 탐욕이 화를 내도록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탐욕은 성냄처럼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탐욕은 의식의 중간층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할 일을 한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척하면서 욕심을 부린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차츰 지혜가 성숙하면 처음에 성냄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탐욕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때 의식의 중간층에 있는 탐욕이 줄어든 것은 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 있는 어리석음이 줄었기 때문이다.
탐욕은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이 약해져야 탐욕이 줄어든다. 어리석음은 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 도사리고 있어서 있는지도 알기 어렵고 그래서 쉽게 제어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핵심에 해당한다. 이렇게 순서대로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통찰 지혜다. 이와 같은 선하지 못한 마음은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생긴 단계적 과정의 통찰 지혜에 의해서만 순서대로 소멸시킬 수 있다.
있는지도 모르고, 잘 드러나지도 않는 어리석음을 치유해야 근본원인이 제거되어 최종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오랫동안 키워온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치유하여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바꾸려면 반드시 선한 일을 해서 공덕을 쌓는 일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두 가지를 실천하기 위한 인내가 없으면 결코 해탈의 자유를 얻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