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코스(나아해변~감포항) 18.9km
나아래변~봉길해변~감은사지삼층석탑~나정해변~전촌항~감포항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11코스는 나아해변에서 월성원자력발전소공원을 지나 차도로 들어서서 이곳부터 차량을 이용하여 봉길해변에서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만나고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이견대를 지나 ‘감포깍지길’을 경유해 감포항에 이르는 18.9km의 길이다.
우리나라 토착신앙에는 산신, 용왕신, 칠성신이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칠성신, 국토의 70%가 산지인 탓에 각 산의 봉우리 마다 산신령이 있다고 여겨오는 산신으로 역대 왕이나 충신들이 죽으면 신이 되어 국토를 지킨다고 믿어왔다, 용왕은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바다를 주관하는 신이다, 뱃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수중세계를 총괄한다, 신라 문무대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어 용왕신이 되었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길해안까지는 월성원자력발전소와 산이 가로막아 터널을 지나야만 하기에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나아해변에서 인증 스템프를 확인하고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있는 봉길해안에 도착한 2020년 10월 25일은 날씨가 밝지가 않은 흐린 날이었다. 그럼에도 문무대왕릉 앞의 해변에는 용왕신께 염원을 비는 무당굿이 펼쳐지고 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동해에 장사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는 유언에 따라 불교식 장례법으로 유골은 바닷가에서 약 200m 떨어진 깊이 20m 바위섬 수중 못에 모셨다, 실제 유골함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방으로 나 있는 수로와 석공들이 바위를 다듬은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신라 30대 임금으로 태종무열왕 김춘추(604~661의 아들인 문무대왕(620~681)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아버지의 유업으로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를 물리쳐 과업을 이루었다, 연합을 했던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 신라 땅의 주인행세를 하려 하자 이메 맞서 670년부터 7년동안 당나라와 전투를 벌여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양주 땅 매소성에서 물리치고, 금강하구 기별포에서 수군을 격파함으로서 대 당 전쟁을 끝내고 대동강 아래쪽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왜군은 663년 백강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합세하여 신라와 전쟁을 하였고 나아가 왜구는 우리나라 해안을 끊임없이 약탈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어 왜구를 막으리라 한 것이다,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에서 아들인 신문왕은 용이 된 아버지를 보았고, 또 아버지가 편히 쉬도록 감은사지 금당 밑에 수로를 만들었다, 산처럼 커다란 무덤 속에 편히 잠든 어는 왕들과는 달리, 온 종일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왜구를 막으며 백성을 보살피는 문무대왕의 마음이 가슴에 닿는다,
역사적으로 일본과의 악연은 참으로 참담하고 비극적이다, 수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도 섬나라 인종적 열등감에서 인지 우리 민족을 존재부터 없애려 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명예를 생명보다 중히 여겼다, 잘못했으면 무릎 꿇고 배를 갈랐지만 오늘의 일본인들은 그 사무라이 후손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일본 땅에서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난다 싶으면 영원히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아 버리라고 기도하고 싶다.
아직도 가을이건만 뜨거운 가을 햇살인데도 텅 비어버린 해수욕장 천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대종천을 따라 감은사로 향한다, 대종천 끝자락에 용이 머물렀던 용당리에 감은사 절터가 있다, 동해에서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감은사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절을 짓기 시작하였지만 왕성하지 못하고 죽자 아들 신문왕이 유지를 받들어 완공하였고 부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감은사로 이름 지었다.
동쪽과 서쪽에 3층석탑 두기가 배치하고 석탑사이에는 효의 물길인 금당터가 있고, 금당아래 석축들 사이로 큰 공간이 비어 있어 이 공간을 통해 바닷물과 용이 된 문무왕이 편안히 드나들었다,
감은사 터 뒤쪽 산길을 1km 남짓한 곳에 이견대가 있다, 사람이 찾지 않아 풀숲이 우거져 일부를 제외하고 도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견대는 문무왕릉과 봉길해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정자로 신문왕은 이곳에서 용이 된 아버지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682년 5월 초 동해에 거북이처럼 생긴 작은 산이 물결처럼 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점을 쳐 보니 신문왕이 해룡과 천신에게서 귀한 선물을 받을 거라 했다, 산꼭대기에는 대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진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산으로 다가가는 순간 안개가 밀려오고 용이 나타나 말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이 대나무도 하나로 합쳐져야 소리가 납니다, 이 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해룡이 된 문무대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께서 두 마음을 합쳐 이 보물을 드리라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대나무를 가져와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니 말고 청아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뒤로 피리를 불면 마른 강바닥에 물이 넘치고 폭우가 쏟아질 때 비가 그치고, 아픈 사람은 병이 나았으며 적군은 물러갔다, 이렇게 피리만 불면 만 가지 근심이 사라져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 이란다,
슬픔은 기쁨의 원천이 된다고 한다, 역사의 뒤안길을 더듬어 보고 감포읍 대본리에서 ‘신라 동해구’라고 새겨진 석비를 지나고 다시 해안으로 나간다, 신라 동해구는 동해의 입, 동해로 열린 문이다, 동해의 햇살을 들이마시고 안개로 토해 낸다는 토함산에서 발원한 대종천이 동해바다까지 이어진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룡처럼 생겨 조선시대까지 동해천이라 불렀다, 김정호 대동여지도에 ‘동해천’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나정해변, 전촌항, 감포항을 지나 오류해변까지 해안선과 내륙을 잇는 ‘감포깍지길 1구간’이다, 백사장 앞 큰 바위에 새겨진 가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가 바다를 등지고 서 있다, 이 노래의 작사자 정귀문씨가 바로 이 자리에서 노랫말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멀고먼지 머나먼 고향은~~, 고운 모래해변 나정해변과 전촌해수욕장 백사장을 걸으며 시골어촌 전촌항 뒷산 숲길을 따라 감포항에 도착해 시원한 물회에 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회포를 풀고 고단한 하루의 여정을 마친다.
첫댓글 우리 대장님 멋지고 대단하십니다.
글을 읽다 보니 이 코스를 지나면서 길을 잃어 헤매던 생각이 새롭네요.
감은사지 석탑은 목탑형식을 한 석탑으로
신라의 탑중에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탑 중의 하나로 알고 있는데
볼 수록 웅장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은 느낌 입니다.
내가 지나온 길에 이런 역사적 의미가 숨겨 있음을 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