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잡초만 우거진, 와칸주랑의 고성들(古城)
(5-5-1) 나마드굿 마을 전설의 하하고성
(5-5-2) 언덕 위의 웅장한 파노라마, 얌춘고성
(5-5-3) 아름다운 비단의 성, 비심콸라
(5-5-4) 토번제국의 체취가 서려있는 랑가르의 라틈고성
(5-5-5) 사르하드의 토번제국의 연운보 요새
-----------------------------------------------
5-5-1) 나마드굿 마을 전설의 하하고성
와칸주랑을 통과하는 실크로드는 예부터 황금어장이었다. 외통수 길이었기 때문에 일당백의 병력으로 손쉽게 이 루트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곳곳에는 유서 깊은 이 길은 지키기 위한 거대한 성곽과 요새들이 흩어져 있었다. 물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목적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의도는 통행세의 징수였다. 본전 안 들이고 남는 장사였기 때문에 곳곳에 통행인을 감시하기 용이한 언덕 위에 다투어 요새를 지었다. 지금은 돌보는 사람 하나도 없고 잡초만 우거진 폐허로 변했지만, 옛날 실크로드가 활발하게 그 기능을 발휘하던 때는 이 외통수 루트를 통과하는 수많은 대상들과 순례승들의 진귀한 물건 중에서 일정한 비율을 현물 또는 은화 같은 화폐로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과 잠자리 등을 제공받았다. 만약 이런 통과세를 물지 않으면 대신 목숨으로 대신 했을 것이다.
혜초사문의 아래 구절이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 호밀국 북쪽 산 속에는 9개의 식닉국이 있다. 아홉왕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는데, (중략) 그 나라 왕은 항상 2, 3백 명의 군사를 파밀천에 보내어 무역하는 호족을 덮쳐서 물건을 빼앗는데 거기서 빼앗은 비단을 창고에 쌓아 두고 못쓰게 되도록 내버려두고 옷을 지어 입을 줄을 모른다.
또한『신당서』권221 하「식닉전」에도 이런 약탈의 기록이 보인다.
큰 골짜기 5개가 있는데, 각자 수장이 다스리고 있어 오식닉(五識匿)이라고 한다. (중략) 사람들은 즐겨 공격하여 대상들의 물건을 강탈한다. 파밀천 네 개 골짜기에는 왕의 명령이 별로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5개 또는 9개 식닉국이란 말로만 왕국이지 실제로는 계곡의 험준한 외통수 길목에 성곽을 세워놓고 지나가는 대상들이나 행인들에게 통과세조로 물건을 빼앗는 일종이 산적들의 집단에 불과하다고 보인다.『당서』라는 공식기록에 그런 사실이 올라올 정도라면 그냥 좀도독은 아닐 것이라는 점도 그런 근거의 배경이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와칸주랑 깊숙이 숨어 있는 고성 순례를 시작해보자. 물론 그곳들은 천년의 세월 속에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잡초만 우거진 상태이겠지만, 그 이름 없는 조약돌 하나, 그 부서진 흙벽돌 하나에 서려 있을 수많은 대상들의 그 처절한 생존의 외침들과 신념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버렸던 그 수많은 구법승들의 숨결은 천년의 시륜의 수레바퀴가 흘렀다 치더라도 그곳에 서려있을 것이니, 우리 모두 고개 숙여 기도하여 그들의 붉은 넋을 어루만져줄 큰 대비원력을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와칸계곡을 비롯한 파미르고원 곳곳에는 기원전에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쿠샨시대의 성터가 여러 개 남아 있다. 그 첫째가 이스카심에서 15km 떨어진 나마드굿(Namadgut)마을 근처에 있는데, 옛 실크로드의 바로 길가 천연 바위산 위에서 지금도 옛 실크로드를 지나는 길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이름이 ‘하하(Khakha Fortress)요새이다. 대로변의 오른 쪽 강가 산언덕 위의 지형을 이용하여 자연석과 흙벽돌로 축조 되어 있지만, 많이 퇴락하여 스쳐지나가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이 성곽에는 타지크의 군인들이 강 건너 아프간을 바라다보며 경계를 서고 있는데, 이곳에서 판지강을 건너 아프간 땅을 내려다보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사이로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 보리밭사이로 보이는 하하 요새의 전경
▼ 아래에서 바라본 요새의 풍경
▲ 하하성의 표지석
▲ 요새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프간 풍경
성터를 대략 둘러보고 필자가 부랑마을까지 편도로 예약한 차의 기사가 이곳 출신이어서 그의 집에 들려 간단한 점심을 먹었는데, 내가 그 폐허의 성터에 대하여 궁금해 하니 그의 부친이 손짓발짓 해가며 고성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내가 며칠 전에 호로그에서 구한『파미르의 역사, 고적과 문화』 라는 책을 달달 외우고 있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이미 내 머리 속에는 이 고성의 역사가 상세하게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추임새를 맞추어 맞장고까지 쳐주었다. 그는 나마드굿이라는 마을 이름이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란 사실도 누차 강조 하였다.
전해오는 전설을 채록한 책에 의하면, 하하요새는 1~3세기 경 쿠샨왕조1) 시기에 처음 축조되었는데, 판지강가의 린(Lyn)이란 돌산 위에 3년 동안, 연인원 7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소요된 벽돌을 만들 진흙은 강 건너 아르구(Argu)라는 곳에서부터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돌산 위로 옮겨져 흙벽돌을 만들어 성곽과 성루를 만들었다고 한다.
참 ‘하하’의 표기는 알파벳으로 ’Kha-kha‘라고 쓰니 ‘카카’ 라고 읽어야 하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K'자 발음을 못하는지 그냥 계속 ‘하하’ 라고만 되풀이 한다. 별 수 있나? 나도 ’하하‘ 해야지…마찬가지로 ‘와칸’도 ‘와한’이라고 발음해야 마땅하지만, 이미 ‘와칸’으로 습관화된 용어이기에 여기서도 그대로 표기하니 이점 혼동 없기 바란다.
이야기에 의하면, 이 성을 처음 쌓은 사람들은 ‘하하’라는 이름의 거인 장수 와 그의 부인과 딸 그리고 두 명의 누이와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와칸계곡을 다스리며 불을 숭배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에 모바시르(Mobashir)라고 하는 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이전에 이슬람에 전염되었기에 틈틈이 이 요새를 예언자의 힘으로 성역화하려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그의 주인은 그로 하여금 성안에 망루를 지어놓고 와칸계곡의 입구를 지나가는 나그네들 중에 녹색 옷2)을 입은[녹색깃발의 이슬람교도] 사람들의 침입을 감시하라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주 하하의 부하중의 한명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그의 꿈속에서 나타나,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고 다니자, 하하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아침에 사형을 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 죄수는 밤중에 탈옥을 하여 먼 아라비아의 메카(Mecca)3)까지 3개월간 달려가 예언자를 만나 하하요새의 실체를 고자질하면서 그들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예언자는 1만 명의 군사를 보내 그 요새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중략] 이에 원정군은 오랜 행군 끝에 요새 건너편에 도착하긴 했지만, 현지 지리에 밝은 하하군대의 야습에 의해 대부분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이번에는 예언자의 사촌이자 사위인 하즈랏 알리(Hazrat Ali)4)가 직접 시종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달려왔다. 그리고 내부 조력자인 모바시르를 만나서, 일이 성공하면 주군인 하하장수의 딸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분을 속여서 평범한 순례자로 가장하여 성으로 잠입하여 직접 성주인 하하를 만났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승부내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 대목에서 전설은 장황하게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또한 생략한다] 결국은 각본대로 알리가 승리하여 하하요새와 와칸계곡의 지배권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알리 편, 즉 이슬람의 ‘시아파’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여기서 사족을 달자면, 오래된 종교적 전설답게 수많은 이름들과 지명들이 등장하지만, 필자의 임의대로 주요치 않은 주변인물의 이름을 생략하였고 줄거리도 대폭 줄여서 옮겼다. 그들의 이름은 대체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한편은 ‘검은 옷[Siah-Posh: Black robe]5)’을 입은 잔기바르(Zangibar)같은 ‘불의 숭배자’ 와 다른 한편으로는 ‘녹색 옷’을 입은, 무슬림 특유의 접두사가 붙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이 전설은 기득권을 가진 조로아스터를 밀어내고 이슬람이 승리하는 과정을 미화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거처 여러 사람에 의해 각색되어 오면서 내려온 한 편의 거창한 에픽(epic)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역사적으로도 와칸주랑에도 불의 숭배사상이 전파되어 있었겠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실존인물인 이슬람 4대 칼리파이며 시아파의 알리가 실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한 예로, 요새의 건너편 마을에는 알리의 무덤[Shah-i-Mardan Hazrat Ali]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데, 이 또한 먼저 번에 이야기한바 있는, 마자-이-샤리프에 있는 것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에 도처에 산재해 있는 알리의 상징적인 무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나마드굿 다음 목적지는 20km 떨어진 다르샤이 다라(Darshay dara)마을인데, 그곳 골짜기에는 6~9세기에 세워진 퇴락한 성터와 망루가 하나 있다고 해서 기사를 재촉하여 그 곳으로 차를 몰았다. 물론 성곽도 보아야하지만, 성곽아래 바위에는 많은 석각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아랍어이지만, 개중에는 쿠샨왕국의 공용어인 카로슈티(Kharoshti script)문자6) 라기에 부쩍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잠시 꼬박 조는 사이에 차는 이미 다르샤이를 지나서 그 다음 목적지에 나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누굴 탓하랴. 연일 강행군으로 파김치가 된 내 몸을 탓해야지 하면서도, 신강박물관에서 많이 보아왔던 그 카로슈티 글씨들이 눈에 가물거려서… 한 동안 두고두고 아쉬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이곳 초소에서는 타지크의 군인들이 강 건너 아프간을 바라다보며 경계를 서고 있는데, 이곳에서 판지강을 건너 아프간 땅을 내려다보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사이로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 하하요새 아래 민가에서의 점심
▼ 나마드굿 주민의 ㅂ조부와 손녀
▲ 흙벽돌로 지은 요새의 잔해가 쳔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 요새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프간 풍경
▼ 쿠샨왕조의 동전
이 요새를 처음 지은 쿠샨왕조의 선조들은 원래 중국서부의 현 타림분지의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족인 월지(月氏)족이었는데, 기원전 176~160년경 북방의 흉노족에 쫓겨 서쪽으로 서쪽으로 정착할 곳을 찾아서 이동하다가 당시 발흐(Balkh)를 중심으로 한 그레코-박트리아로 몰려가 그 나라를 무너뜨리고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여기서 ‘쿠샨’의 어원은 한자 '귀상(貴霜)'에서 비롯되었지만, 서양쪽 자료에서는 쿠샨으로 전해졌고, 한편 중국쪽 사서에서는 계속 그냥 월지라고 불렸다. 중국 최초의 여행가인 장건(張騫,?~114BC)7)의 목적지였던 바로 그 월지가 바로 쿠샨이다.
그들은 정복한 나라의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여 그리스를 본 따 동전을 만들고 인도양을 통한 무역과 실크로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등 동서양 문화를 포용하여 그리스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간다라문화를 꽃피웠고 나아가 대승불교를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등 역사문화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제3대 카니슈카(Kanishka)1세8)는 인도의 아소카와 함께 불교를 부흥시킨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되고 있는데, 타림분지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제국의 후반기인 1세기~2세기에 그들은 북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엣 선조들의 고향인 타림분지의 일부까지 점령하면서 중국의 한(漢) 나라와 문화적인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때 중국으로의 길목인 와칸에 ‘하하’ 같은 요새가 세워졌다고 비정된다.
그러니까 현재까지 와칸계곡을 지키고 있는 이 요새의 기능성과 기원전에 세워진 연대로 감안하면 5세기 초의 법현, 6세기의 송운 혜생, 7세기의 현장 그리고 8세기의 혜초 등 모든 입축순례승이 이곳을 통과하면서 이곳에서 행장을 다시 정비하여 인도로 또는 중국으로 떠났을 것이다. 며칠 동안 정 들었던 요새를 돌아보며, 그렇게 낙타방울 울리며 떠나갔을 것이다.
1) 월지족는 AD 1~3세기에 인도아대륙 북부지역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의 일부를 지배한 민족으로 2세기에 그리스 식민지인 박트리아를 점령하고 이곳을 5개의 소국가로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쿠샨[貴霜]이었다. 100년 후 쿠샨의 수장 쿠줄라 카드피세스는 월지의 5개 국가를 하나로 통일하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카니슈카 1세(1세기에 활동)와 그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쿠샨 왕국은 전성기에 달했다. 쿠샨 왕조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고 대승불교와 간다라 미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존재는 그리스·로마, 이란, 힌두, 불교 신들의 모습과 변형된 그리스 문자가 새겨진 수많은 금화동전들에 의해서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란쪽에서 사산왕조가 등장하고 북부 인도에서 토착세력들의 침공으로 쿠샨왕조는 막을 내렸다.
2) 녹색 옷의 녹색 깃발은 무슬림의 상징적인 색깔이다. 반면에 배화교도들은 시아포쉬라고 부르며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3) 이슬람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사우디의 종교·행정·상업의 중심지로 히자즈(Hejaz) 지방의 홍해 연안에서 약 80km 떨어진, 민둥산이 두 줄로 늘어선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유명한 이슬람의 성지로서, 신성한 검은 돌을 모신 카바신전에는 평생 한번은 메카를 순례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4) 예언자의 사위라면 시아파의 창시자인 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 해당되지만, 이 자료에서는 하즈랏으로 표기 되어 있다.
5) 이슬람에 의해 와칸에서 쫒겨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아프간의 누리스탄 지방으로 옮겨가 지금도 배화교를 신봉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6) 러시아의 베르스탄(A.N. Bernstham)의 보고서에 쓰여 있다고 하는데, 이 카로슈티 문서는, 일명 간다라글씨체라고도 부르는데, 영국의 고고학자 아우렐 스타인이 신강의 타클라마칸 사막 니야유지에서 목각에 쓰인 글자를 대량 발굴함으로써 해독이 가능해져 쿠샨왕국의 존재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는 바로 그 글씨체이다.
7)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8) 쿠샨왕조의 제3대 왕으로 아소카 왕 이래 대국가를 건설하고 페샤와르에 도읍을 정하였다. 당시에는 불교가 성하고,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불상 제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불교 미술은 불상이 만들어진 지방이 북서 인도의 간다라 부근이었기 때문에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린다.
불교도는 그를 아소카 왕과 함께 불교의 전륜성왕으로 불러왔다. 그의 재위시에 제4회의 불전 결집이 행하여졌으며, 또 불교 시인 아슈바고샤(馬鳴)나 나가르주나(龍樹)가 활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니슈카왕이 불교와 함께 그리스 여러 신의 숭배와 조로아스터교·힌두교 등을 보호한 것은, 이들 신상(神像)이 당시의 화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첫댓글 카카가 아니라 하하로 읽어야 하는 것군요
카와 하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릴 들려줄 수도 없고
네 중간쯤 되는 소린데 우린 발음하기도 듣기도 힘듭니다. ㅎㅎ
고 전쟁터에는 뭔가 특별한 기운이 감도는가 봅니다.
아마도 구천을 떠도는 한 많은 영혼이 많아서 그럴겁니다.
점입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