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는 오래전 섬에 살던 한 남자가 기억 속의 소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운동장에 흔히 있는 ‘책 읽는 소녀’ 동상과 그리스 신화 속의 에코 이미지가 분리되고 겹쳐지면서 자신의 자아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창작극이다. 〈에코〉처럼 문학, 연극, 매체예술, 퍼포먼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 신나라 씨가 꼽는 음악극의 매력이다.
장르 간 융합을 시도하는 ‘음악극’ 자체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무대다. 유럽에서는 현대음악을 이끌어가는 신조류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터다. 그래서 그에게 음악극에 대해 묻는 게 첫 질문이 되곤 한다. ‘신나라’라는 그의 이름 또한 범상치 않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pclass.chosun.com%2Fnews_img%2F1005%2F1005_042_1.jpg)
“음악극(Musictheater)은 유럽에서도 개념이 모호합니다. 음악극 ‘뮤직테아트로’는 형식으로 보면 오페라예요. 그중에서도 음악적 성격이 강하죠. 시각적 이미지나 대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을 음악으로 대치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또 하나의 소리로 해석하기도 하고, 장르 파괴적이고 실험적이지요. 제가 감히 ‘음악극은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리기가 힘들어요. 하하….”
음악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한 장르다. 현대적인 음악에 미래적이고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무대라는 게 기존 오페라나 뮤지컬과는 차이를 둔다.
그는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를 졸업한 후 슈투트가르트 국립오페라단, 또 바덴-뷔르템베르그 주 정부 예술재단이 후원하는 독립 예술가로 활동 중이다. 그 가운데 독일과 서울을 오가며 한국 음악계에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음악극을 알리고 있다. 소설가 이태준의 생가로 잘 알려진 성북동 ‘수연산방’이 있는 골목길 안에 그의 작업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동네가 진중하고 조용해 참 좋다고 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pclass.chosun.com%2Fimages%2Fball_topic.gif)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pclass.chosun.com%2Fnews_img%2F1005%2F1005_042_2.jpg)
‘감히’ 음악극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에 부족하다고 자신을 평하지만, 유럽 음악계에서는 일찌감치 그를 현대음악의 기대주로 주목했다. 2008년 그는 한국 현대작곡가로는 최초로 국제극예술협회(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이하 ITI) 체임버 오페라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국제무대에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ITI 는 연극, 무용, 음악극 등 공연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세계 최대 극예술 단체. 그가 ITI에서 수상한 작품은 ‘SHADOW? The ritual to console the mouth and the eyes’였다.
“섀도에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어요. 그렇다면 사람의 입과 귀, 눈의 수고가 과연 가치 있는 것일까요? 남녀 배우가 나오는데, 남자가 말을 하지만 여자는 듣지 못해요. 그 다음 여자가 말을 하지만, 남자 역시 그 말을 듣지 못합니다.”
인간 사이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통영국제음악제 후원으로 갤러리 쿤스트덕에서 공연됐다. 이외에도 그의 작품으로 ‘6개의 충만된 눈길로 쳐다보다’(2001), ‘말이 없는, 침묵이 없는-음악적 제 어긔야’(2004) 등이 있다.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새로운 것을 내놓는다는 게 음악극의 매력이에요. 장르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점점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갈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20세기 초 이미 음악과 미술이 만나고, 건축과 디자인이 만나면서 서로 자극을 받았듯이 새로운 만남이 결국 무엇인가 만들어내잖아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pclass.chosun.com%2Fnews_img%2F1005%2F1005_042_3.jpg)
〈에코〉 역시 장르를 넘나드는 ‘만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 김경주 씨, 연출가 박정석 씨(극단 바람풀 대표), 지휘자 김영언 씨, 서울무용제 음악상을 수상한 양용준 씨, 무대미술을 전공한 도나정 씨, 비주얼 아트를 담당한 아이잭 신 등 전방위 작가들이 힘을 합해 무대를 만들었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작곡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사람 자체가 매체다. 어떤 정밀한 기계보다 복잡한 프로세스를 갖고 있는 게 사람이다’라고 하셨어요. 음악극을 작곡하는 과정이 전자음악, 무용, 영상 등 성격이 다른 여러 장르를 섞는 거예요.”
그가 음악극이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1996년 독일 유학생활을 시작한 칼스루에라는 도시에서였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공무원 도시로 꽤 보수적인 동네예요. 그런데 그곳에 매체예술연구센터(ZKM:Karlsruhe)와 매체예술학교가 있었어요. 설치, 비디오아트, 새로운 형식의 매체예술 전시회가 늘 열렸지요. 독특한 성격의 도시예요. 전시를 보러다니면서 새로운 예술형식에 눈을 떴죠.”
그는 작곡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경험도 쌓았다. ‘슈투트가르트 새로운 음악극 포럼’이라는 단체는 그에게 작품을 위촉하면서 6개월 동안 배우를 해보라는 조건을 붙였다.
“앙상블 팀 사이에서 음악을 듣고 반응하는 역할이었지요. 소리에서 에너지를 받아 움직이는 거예요.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사람이 연출을 맡았는데, 음악 소리에 인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몸으로 체험한,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opclass.chosun.com%2Fnews_img%2F1005%2F1005_042_4.jpg)
세계 음악계의 새로운 조류인 ‘음악극’에 도전하는 그는 어린 시절, 그저 음악이 좋기만 한 평범한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한글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서 ‘신나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덕분에 저도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어요. 그게 제가 받은 음악 수업의 다였어요. 고등학교 때 진로를 작곡으로 정했죠. 지금 생각하니 작곡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문화적 다양성 면에서 유럽만큼 자유롭지 않은 서울에서 그가 풀어야 할 숙제는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도 ‘풍류’를 즐기는 멋스러운 전통이 있으니, 다양한 음악적인 시도에 마음을 열 것이라며 희망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