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판서공 윤처관 ( 7 世 判書公 諱處寬) 비문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행 순창군사 신도비명(贈 自憲大夫 吏曹判書 行淳昌郡事 神道碑銘)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누가 공명을 세우고 정이(鼎彝 ①)에 세기지 않고자 하겠는가.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그 뜻을 통달할 수 없고 뜻이 통달치 못하면 사멸되어 후세에 전할 것이 없으
므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자손 된 자들은 조상을 현양 하는데 지극 정성을 다
하게 됨을 아는 윤공의 맏아들인 목사(牧使)가 글을 짓고 묘비(墓碑)를 세우는 것이니 그 뜻이 아
름답다.
목사가 남쪽 지방에서 여묘(여묘②) 할제 아들 계형( 継衡)을 보내 건(楗)에게 비명을 구하니 글이
모자란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삼가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면 윤씨는 대대로 남원의 현달한 씨족으로 높은 벼슬을 한 이가 귾이지
않고 나왔다. 신을(莘乙)은 대구 현령이니 공의 증조부가 된다. 휘 신을이 언재(彦材)를 낳으니 보
승랑장(保勝郞將)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 했고 언재가 휘 희(希)를 낳으니 장사감무(長沙
監務)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했으며 배는 함종곽씨(咸從郭氏)이니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
府使) 휘 주(珠)의 따님이다.
영락(영락;명나라의 연호) 丁亥年(1407)8월7일에 공을 낳으니 휘는 처관(處寬)이요 자는 율보(栗甫)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롭더니 장성하매 거자업(擧子業;과거공부)을 익혔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정통(정통;명나라 연호) 甲子年(1444)봄에 서사(筮仕③)로 의정부 녹사로 벼슬살이를 시작해 경
태(景泰;명나라 연호) 庚午年(1450)에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을 제수하였다. 壬申年(1452) 가을
에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나가 치적으로써 이름나고 만기가 됨에 통선랑(通善郞)전구서령(典廐
署令)을 배수하니 때는 천순(天順;명나라 연호) 丁丑年(1457)이다. 얼마 안되어 세자(世子) 우익찬
(右翊贊)으로 전직 되였고 인수부판관(仁壽府判官),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형조도관정랑(刑曹都
官正郞)으로 여러번 옮기니 무릇 송사의 일을 판결하매 청탁으로 하여금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己卯年(1459)에 통덕랑(通德郞)계급으로 순창군사가 되었고 辛巳年(1461) 가을에 조봉대부(朝奉
大夫)에서 조산대부(朝散大夫)로 가자(加資) 되었다. 壬午年(1462) 가을에 사직하고 남원 중방리
(南原中方里) 옛집으로 물러와 사년 만에 돌아가니④ 성화(명나라 연호) 乙酉년(1465) 정월 十三
일이요 나이는 五十九이다. 四月九日 己酉에 북십리(北十里) 산동(山洞) 왕치(旺峙) 손향 (巽向)언
덕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광산정씨(光山鄭氏)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휘 존(存)이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
하동(河東)정청(鄭淸)의 따님을 취처하여 영락갑신년(1404) 正月十一日 계축에 부인을 낳았다. 공
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섬기며 제사 받들기를 정성으로서 하고 공을 존경하기를 큰손님과 같이
하였다. 공이 의중인(意中人;마음속으로 지목한 사람)을 보고자하매 반드시 집안을 청소한 후 모
시고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아들을 옳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매사에 은혜와 신의가 많아서 비
록 이웃의 비복과 상민이라도 모두 즐겨 따랐다. 하루는 추녀 끝에 깃들인 제비가 꼬리에 흰 깃을
매고 실이 늘어져 뒤치며 날거늘 부인이 나무 가지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제거하여줄 것을 생각하
였더니 제비가 홀연히 부인의 어깨에 앉거늘 부인이 풀어서 날려 보냈다. 집에 어미 닭이 죽어 새
끼 병아리가 슬피 울으니 옆에 닭이 날개로 덮어주고 또 두 마리의 개가 서로 새끼를 젖 먹였다.
아! 주역(周易)에 일컫기를 『신의가 돼지와 물고기까지 미친다』 하였으니 이 세 물건이 또한 부
인의 덕에 감동한 것인가? 성화 (成化;명나라 연호) 丁未年(1487) 三月 二十 六日에 돌아가니 나이
는 八十四이다. 그해 五月 二十 二日 辛酉에 공의 묘소 북쪽 삼보(三步)쯤 되는 같은 언덕에 장사
하니 부인의 뜻 대로였다. 사남 을 낳으니 맏은 효손 인데 癸酉年(1453) 과거에 급제하고 또 丁丑
年(1457) 중시(重試)에 재차 합격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다음인 중손(仲孫)은 공보다 먼저 죽었고 종손(終孫)은 별시위(別侍尉)요 다음 말손(末孫)은 절도
사(節度使)이다. 목사 효손은 영의정(領議政)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
元亨)의 따님을 취처 하여 일곱 아들과 한 딸을 낳으니 계형(繼衡)은 진사로 벼슬은 봉사(奉事)요
승형(承衡) 복형(復衡)이요 세형(世衡)은 진사요 함형(函衡) 지형(止衡) 완형(完衡)은 모두 학문에
힘쓰고 따님은 생원으로 참봉인 許衡에게 출가하였고 별시위(別侍衛)는 호군(護軍) 하추(河湫)의
따님을 취처 하여 일남 이녀를 낳으니 남은 백형(伯衡)이요 따님은 신효돈(申孝敦)에게 출가 하였
다. 절도사 말손(末孫)은 군사 정승소(鄭承韶)의 따님과 결혼해 1남3녀를 낳으니 아들은 시형(時
衡)이고 딸들은 권서(權瑞) 신윤손(申潤孫) 권옥(權沃)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증손 남녀가 무릇 十
八인 인데 모두 어리다.
목사가 성화 갑오년(1474)에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자 공에게 자헌대부 이조판서와 부인에
게 정부인을 증하여 은혜가 선공(先公)에게 미치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사람을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며 돌아간 이 섬기기를 생존한 이 섬기
듯 하여 매번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통곡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아니 하였다. 마음이 너그럽고 화평
하여 심상한 사람도 포용 할 수 있었으며 벼슬에 나가면 청렴하며 삼가고 동료를 대함에 일체 신의
로서 하였다. 효도와 우애로 가법을 삼고 화초와 시주로써 유유자적하고 평생에 집안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담담한 듯 하였으니 공같은 분은 참으로 삼가고 후덕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아! 공의
덕으로 지위가 이것으로 그쳤는가? 사람은 덕을 두텁게 쌓고도 박복한 이치가 없는 것이므로 반드
시 후손에게 복을 남기게 될 것이다. 목사공이 가정의 교훈⑤을 본받아 두 번 과거에 급제하고 어
버이 섬기는 효도를 옮기어 왕가에 충성을 다하므로 전주에서 부윤이 되었고 영남에서 관찰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표창하는 유지를(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 받았으니 대개 공의 올바른
교훈이 격려하여 이룬 것이므로 앞으로도 공의 은덕으로 경사가 계속될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
는것이니 이것은 공 자신이 뜻을 얻어 세상에 크게 쓰인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건(楗)이
손을 모으고 머리를 굽히면서 순서대로 행적을 적어 비석에 새겼으나 어버이를 현양 하는 뜻을 다
했다고 하기 부끄럽다. 명에 이르되
뿌리가 깊으면 지엽이 무성하고 근원이 멀면 흐름도 길다네. 윤씨는 대성으로 대방의 이름난 씨족
이로다. 공은 너그럽고 화평하며 또 효도하고 청렴 하였도다. 하나만도 드문데 공은 모두 겸비했
지. 두번 목민관(牧民官)으로 나가자 백성들은 넘치는 사랑을 칭송했네. 백성 또한 은의를 가슴에
품기에 이르럿도다
진실 된 마음을 전원에서 수양하고 시와 술로 유유 자적하셨네. 가정에서 훌륭한 아들을 교훈 하여
기마(驥) 자식 같고 봉새 새끼같이 키웠네. 아리따운 부인은 덕과 곧음으로 도왔지. 부드럽고 착한
것만을 본뜨니 오직 가정의 상서로다. 이렇듯 적선하면 반드시 후대가 창성 하나니 아들 손자가 아
름다움을 계승하고 훌륭한 교훈을 전하였으며 맞아들은 착한 덕망과 순수한 효도를 갖추었네. 영
귀를 사양하고 어머니 봉양만을 호소하였으되 효도로 옮기는 것이 충성인지라. 임금이 등용하기
에 이르렀도다. 교지를 내려 표창하매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도다. 왕티 북쪽은 공의 영혼이
묻힌 곳 일세. 비석에 새겨 천 억년에 밝히노라
弘治(명나라 연호) 己酉 (성종20년.1489년)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議政府)우찬성(右贊成) 박건(朴楗)지음
조봉대부(朝奉大夫)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예문관(禮文館)응교(応敎) 최부(崔溥) 전(篆)
불초손(不肖孫) 승형(承衡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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