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사문(趙州四門)
조주를 알고 싶은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니라.
조주종심선사(趙州從諶禪師)는 참 많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남기셨다. 세수(歲)도 120살을 사셨으니, 장수(長壽)다. 조주선사는 어린 동자때부터 스승 마조선사(馬祖禪師)를 40년이 넘게 시봉(侍奉) 하면서 다진 수행(修行)의 내공(內功)이다. 조주선사는 60세가 넘어서도 구법(求法) 행각(行脚)을 하며 제방(諸方) 선지식(善知識)을 참방(參訪)하고 일곱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七歲童兒勝我者) 나는 그에게 물을 것이요,(我即問伊) 백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에게 미치지 못하면(百歲老翁不及我者) 나는 그를 가르치겠다.(我即教他) 하면서 80세까지 행각한 선승(禪僧)이다. 오후(悟後) 보림(保任) 행각行脚)이다. 80세가 되어서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觀音院)에 개당보설(開堂普說)을, 하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법호(法號)를 조주(趙州)라 하였으며,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고 시주를 권하는 일이 없어 고불(古佛)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여기서 보림(保任)은 선불교(禪佛敎)에서 깨달아 성불(成佛)한 이후의 수행을 말한다.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이고, 보임이라고 읽지 않고 보림이라고 읽는다. 벽암록(碧巖錄) 구칙(九則)에 보면 조주사문(趙州四門)이 나온다. 하루는 어느 승(僧)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擧 僧問趙州) 어떤 것이 조주(趙州) 입니까?(如何是趙州) 조주스님이 말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니라(州云 東門, 西門, 南門, 北門) 조주선사의 안목(眼目) 견처(見處)를 물었다. 조주선사는 묻는 스님에게 동서남북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활짝 문이 열려 있다고 답을 했다. 조주성(趙州省)은 하북성(河北省) 서쪽에 있다. 조주선사가 조주성(趙州城) 관음원(觀音院)에 주석(住錫)하면서 40년을 선법(禪法)을 펼쳤기 때문에 조주 화상(趙州和)이라고도 하고, 또는 줄여서 그냥 조주(趙州)라고 불렀다. 옛 선사(禪師)들은 사는 땅이나 산 이름을 따서 법호(法號)를 불렀다. 앙산(仰山)도 그렇고 백장(百丈)도 그렇고 위산(潙山)도 다 그렇다. 시집간 여인들의 댁호(宅號)와 비슷하다. 부산에서 왔으면 부산댁(釜山宅)이고 전주에서 왔으면 전주댁(全州宅)이듯이 말이다.
조주성(趙州省) 관음원(觀音院)에 조실(祖室)이니, 어떤 것이 조주(趙州)냐? 다. 묻는 중이 예사 중은 아니다. 묻는 말이 지명(地名)까지 함축된 조주선사 진면목(眞面目)을 함께 물었다. 그 함정에 빠질 조주선사가 아니다. 그래서 노련(老鍊)한 선장(禪匠)답게 조주(趙州)는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활짝 열려 있다는 답(答)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뜻이 담긴 답이다. 대도(大道)는 문이 없는데(無門) 여기 이곳 조주에 올 때 어느 곳으로, 왔느냐? 그리고 눈앞에 있는 조주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제대로 보기나, 하느냐? 다. 설두선사(雪竇禪師)는 송(頌)으로 이렇게 평했다. 글귀 속에 기틀을 들어내 정면에 던졌으나(句裏呈機劈面來) 삭가라안 눈에는 먼지한점 없구나!(爍迦羅眼絕纖埃) 바로 동, 서, 남, 북문이라고 상대 했으니!(東南西北門相對) 끝도 없이 쇠망치로 두들겨 보아도 열리지 않네!(無限輪鎚擊不開) 여기서 삭가라(cakra)는 인도의 범어이다. 금강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조주사문(趙州四門)은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평(評)이다. 왜? 우문현답(愚問賢答)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수자(修者)의 안목(眼目)이다. 어떤 것이 조주냐? 고 말속에 뜻을 실어 조주선사 얼굴에 던졌는데, 금강혜안(金剛慧眼)을 가진 조주선사의 눈에는 티끌 먼지 하나 없다는 평이다. 어떤 것이, 조주냐? 고 물었는데, 조주는 동서남북 네 문이라고 문을 활짝 열어 답을 해버렸으니, 묻는 그 스님은 쇠망치로 끝도 없이 문을 두드리고 쳐도 열리지 않는다고 평을 했으니, 우문현답(愚問賢答) 선문답(禪問答)이라는 설두선사(雪竇禪師)의 평(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