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 발에 차였다고 하지 말자. 먼지 뒤집어썼다고 하지 말자. 그게 나일지 모른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아름다움의 근원
김일연
우주 먼지 알갱이가 만들어내는 별빛
못난 돌멩이들이 만들어내는 물소리
이 밤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돌멩이다,
먼지다
세상 등불이 꺼진 깜깜한 어둠이라도
난 그런 돌멩이
그런 먼지다 생각하면
사랑도 혼자 가는 길도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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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수십 번 읽기 전에만 해도 필자는 ‘돌멩이’와 ‘먼지’의 근원을 지구와 땅에 편중해 찾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사고의 에러 error였음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화려한 것, 멋있는 것, 심금을 울리는 것 또는 눈물이 나는 것과 같은 눈을 즐겁게 해 주거나 가슴을 흔들어놓는 또는 조금은 자극적이거나 원색적인 아름다움에 빠져 그 근원이 다채롭게 채굴되어왔다. 아니, 지구 위의 풍토병이 되어왔다.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은 주관적이고 보는 입장에 따라 처한 여건에 따라 정도의 차이도 확연하기 때문이다.
‘별빛’은 주변이 더 어두울수록 더 많이 보이고 더 뚜렷이 보인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캄캄한 터널 같은 곳을 지나는 우리가 반짝이는 희망을 볼 수 있음도 그것 때문이다. 네온사인이나 조명 등 별빛 아닌 빛들이 현란한 대도시에서는 ‘별빛’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지만 별빛만이 빛인 캄캄한 사막에서는 ‘별빛’이 하늘에 점묘點描 된다. 그 ‘별빛’, 그 ‘아름다움’의 배후에 있는 ‘먼지’를 본다.
오감 중에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것이 청각이라는데 시인이 건져온 그 ‘물소리’, 그 ‘아름다움’의 배후에 있는 못난 ‘돌멩이’를 본다. 더 나아가 그 배후의 껍질마저 벗기고 한 단계 승화시켜 ‘근원’이라고 시인은 정의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 사유에 빠져들게 된다. 더욱이 그 배경이 ‘밤’이다. ‘밤’이 인수 분해된 것이 캄캄한 터널이고, 좌절이고, 실망이고, 절망이기 때문에 그 근원이라는 말에 울컥하게 된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제 껍질을 벗기고 뼛속까지 스며들어 스스로 돌멩이라고, 먼지라고 수용하는 극한의 사유에 이르러 자가치유의 입지를 굳히고 만다. ‘사랑’까지도 ‘혼자 가는 길’까지도 ‘아프지 않다’, 고 ‘외롭지 않다’고 할 수 있는 내성이 생기니 말이다. 사랑아, 어디 있느냐?, 나 홀로 그 길을 가겠노라.
돌멩이 발에 차였다고 하지 말자. 먼지 뒤집어썼다고 하지 말자. 그게 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