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행복

지난날의 행복 나의 신혼은 하얀 눈밭에서 시작되었다. 해발고도가 높아 유난히도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그곳은 3월인데도 오금까지 덮이는 눈으로 설국을 연상케 했다. 청옥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태백산을 발원으로 백천을 흐르는 물이 합일을 이루는 그곳에서 남편과 나도 하나로의 길을 나섰다. 하얀 설원에 쏟아지는 햇빛의 눈부심으로 눈을 뜰 수 없었던 아침. 오금까지 쌓여있는 눈길을 헤치고 신랑이 옹달샘에 물을 길으러가는 것으로 신혼의 아침은 열렸다. 3월인데도 온 천지가 눈으로 하얀 그곳의 풍경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이국적인 정서를 불러왔다. 양손에 빨갛고 파란 물바께쓰를 들고 눈밭을 헤치고 집집의 신랑들이 물 길러가는 모습은 남극의 펭귄이 뛰뚱뒤뚱 걸어가듯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순백의 자연위에 나도 하나의 자연이었다. 냇물은 얼음 밑으로 저들만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흘렀다. 냇가 얼음에 구멍을 내고 시냇물의 은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경쾌한 물소리로 전해주는 시냇물에 빨래를 헹군다. 빨갛게 달아오른 손으로 빨래를 하다오면 신랑은 안쓰러워 내 손을 꼭 잡아 녹여주었다. 문명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던져졌다는 외로움보다는 순백의 설원과 하늘과 맞닿은 높은 산, 맑은 물이 쉬지 않고 숨 가쁘게 흐르는 것의 신기함이 좋았다. 방 한 칸에 부엌이 하나인 학교사택은 살만한 보금자리였다. 이어져 있는 사택에는 비슷한 또래의 새댁들이 있어 그런대로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에 새댁들은 바가지를 들고 두부를 사러간다. 맷돌로 갈아 금방 만든 두부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았던 그때 두부를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 연탄재를 깨트려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밀어내고는 손수 연탄재를 퍼내던 신랑의 배려도 사랑이었고, 혼자 울고 있을 거라며 쉬는 시간마다 달려오던 것도 사랑이었으리라. 냇가에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로부터 봄은 살며시 왔다. 진달래 색깔보다 고운 한복을 입고 분홍의 댕기로 머리를 묶고 개울가로 봄을 맞으러 가곤했다. 연탄불에 점심밥을 뜸들여놓고 개울가 우거진 숲으로 가면 반찬이 지천이다. 뾰족이 잎을 내밀고 있는 앙증맞은 횟잎하며 수풀 속에는 부드럽고 살이 오른 곤드레가 한가득 이다. 향이 순한 횟잎과 곤드레는 삶아서 우려내지 않고 무쳐먹어도 좋을 만큼 순한 산나물이다. 곤드레 몇 포기만 뜯어 와도 점심밥상은 성찬이다. 연탄불에 뜸 들여 굼실굼실 기어가듯 찰기 있는 밥과 곤드레에 된장과 마늘,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조물조물 무친 나물,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뚝배기속의 된장찌개, 이만한 성찬이 어디 있을까. 상 앞에 마주앉은 신랑이 맛있게 먹어주며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던 만족감. 그게 행복이었음을...... 봄이 깊어감에 따라 산나물도 얼굴을 달리했다. 횟잎이 피는가하면 곤드레가 지천이고 뒤이어 살이 통통한 두릅이 돋아난다. 고사리 밭에는 고사리가 낮으로 베도 될 만큼이고 취나물 밭에는 취나물로 산을 덮는다. 계곡의 응달진 물가에는 참나물이 자라고 향긋한 더덕은 향기로 발길을 붙잡는다. 둥치가 유난히도 늠름한 금강송의 발그레한 가지를 흔들고 불어오는 바람은 산속 생명들의 향내를 함께 실어다준다. 큼직한 바위 사이를 돌고 돌아 흐르는 시냇물의 몸짓. 흐르는 물처럼 세월도 나도 흘러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호랑이 태몽을 꾸고 딸은 내게로 찾아들었다. ‘점심식사를 하던 중 반찬이 신통치 않았다. 백천의 계곡에 대궐의 기둥만큼이나 커다란 오이가 열려있었다. 오이를 따다 반찬으로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천의 골짜기로 가는 도중 집채만한호랑이를 만났다. “내 색시가 되어주면 예쁜 아기를 낳게 해 줄게” 커다란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호랑이의 색시가 되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덤볐다. 엉겁결에 색시가 되어주겠노라고 호랑이를 달래놓고는 굴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굴속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날 밤의 꿈속장면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살아있다. 유난히도 입덧이 심하여 밥이라고는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었던 고통. 신랑이 출근할 때면 현관에서 세숫대야에 쓰디쓴 위액을 토해내던 요란한 입덧. 유별스러운 입덧은 임신 8개월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철부지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는 나에게 “어린 아기가 아기를 가졌으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눈길에 정이 흘렀다. 겨울이 길었던 그곳에는 과일이라고는 가을이 되어야 구경할 수 있는 머루나 산 다래뿐이다. 지금이야 교통사정도 좋고 과일도 계절과 관계없이 많지만, 내가 새댁일 때의 두메산골에는 과일이란 구경할 수 없었다. 시쿰한 오렌지도 먹고 싶고, 빨간 홍옥도 먹고 싶고, 입안에 가득 물이고이는 오이도 먹고 싶은데 그곳에는 없었다. 봉화로 출장 가는 학교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봄에 나는 토마토며 복숭아를 가끔 먹는 게 고작이었다. 집집의 새댁들이 시샘이라도 하듯 잇따라 구역질을 했다. 할아버지의 출장가방에는 올망졸망한 집집의 과일들이 가득했다. 과일을 먹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새댁들은 배불뚝이가 되어갔다. 그때의 할아버지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겠지? 신랑이 손수 따다주던 산딸기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입덧으로 야위어진 색시를 냇가 반석에다 앉혀놓고 날렵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산딸기를 따왔다. 떡갈나무 잎을 얼기설기 엮은 속에 핏빛보다 고운 산딸기가 가득했다. 새콤하고 달콤하던 산딸기의 맛을 어떤 과일의 맛으로 잊게 할 수 있을까. 산딸기의 맛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딸기 꿈을 꾸었을까. 딸아이가 태어나던 전날 밤에 산딸기 꿈을 꾸었다. ‘유난히도 하얗게 펼쳐진 설원 위를 별들이 내려와 반짝였다. 그곳에는 눈 속을 헤집고 솟아난 빨간 산딸기 하나가 눈빛과 별빛에 더욱 빨간빛을 발했다. 하늘에는 유성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자꾸만 딸기주위로 쏟아졌고 나를 향하여도 별똥별은 쏟아졌다. 어느새 초록의 산딸기 잎은 내가되고 산딸기는 예쁜 아기가 되어 가슴에 안겨 있었다.’ 소한을 앞둔 겨울의 한복판에 딸을 낳았다. 눈처럼 고운 피부에 딸기처럼 앙증맞은 입술,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예쁜 딸이었다. 산고의 고통도 잊을 수 있을 만큼 벅차게 밀려오던 감동의 순간. 두 팔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오던 생명의 온기. 깊이를 모를 잔잔한 떨림으로 다가오던 생명의 파동. 엄마가 되었다는 행복을 무엇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딸기 같은 앙증맞은 입으로 그리도 힘차게 젖을 빨던 힘은 어린 생명의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가르쳐 주지 않아도 먹고 싸고 자신의 욕구를 울음으로 표현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딸이 자라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간이 영원히 머물러 버렸으면 하는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우리를 걱정시키지 않고 대학에 입학해준 일, 훌륭한 사회의 일원으로 잘 자라준 일, 우리의 뜻에 따라 결혼하기까지 우리에게 수도 없이 많은 행복을 날라다 주었다. 가정의 경제도 안정이 되어가고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 순간이 영원히 머물러 버렸으면 할 만큼 내생 최대의 행복한 순간이었으리라. 청옥골과 백천의 물이 합일을 이루며 흐르다가 황지를 발원으로 흐르는 물과 석포에서 만나 강을 이루며 낙동강은 흘러왔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우리의 삶도 함께 흘렀다. 급류에 휩쓸리기도 했고 빠르게도 느리게도 흘러왔다. 청량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가슴에 안고 흐를 때도 있었다. 바위에 부딪혀 고통스러워할 때도 있고 때로는 잔잔한 흐름 속에서 평화스러울 때도 있었다. 힘들고 고단할 때, 지난날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위로받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바다가 보이는 낙동강하구의 어느 모래톱에기대어 돌아갈 수 없는 세월너머의 행복을 그리움으로 더듬는다. 우리네 삶이란 것이 고단해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돌아볼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흘러올 수 있지 않았을까? 지나가버린 날의 행복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세월을 거슬러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