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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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 1598-1664)은
17세기 스페인 여인의 복장을 한 매혹적인 성녀들을 연작으로 그렸다.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638-42년에 제작된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는
스페인 여인의 복장을 한 성녀들의 연작 중 하나인데
성녀 엘리사벳을 현실적인 얼굴 생김새를 한 중후한 여인의 모습과
17세기 스페인 여인의 복식을 한 모습으로 독특하게 그렸다.
성녀 엘리사벳은 스페인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1271년에 태어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을 따라 같은 이름으로 지었다.
그녀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디니스 1세는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을 친자식처럼 기르고,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설립하였다.
그녀는 아침엔 일찍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 참례를 한 후 성경을 읽고 맡은 바 집안일을 하였다.
그 외에도 가난한 자와 환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궁중의 호화찬란한 생활을 피하고,
매일 빵 세 조각과 물로써 연명할 만큼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감탄할 만한 극기와 애덕의 생활이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였던지
그녀를 통하여 가끔 기적이 일어났는데,
눈먼 아이의 눈에 손을 대자 눈이 밝아졌는가 하면
환자에게 십자성호를 그었을 때 즉시 완쾌되는 일도 있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와 불신앙을 끝까지 참고 인내했다.
그리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들 아폰소 4세(Afonso IV)가 반란을 일으켜
디니스 1세 왕과의 부자간 싸움이 일어났으나
그녀가 전투부대 사이를 가로질러가서
부자간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아폰소 4세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을 받아
한때 알렝케르(Alenquer)로 유배되기도 했던 그녀는
1324년 남편 디니스 1세가 병을 얻자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해주었고,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코임브라(Coimbra)의 집에서 은거하였는데,
그곳에는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수도회가 있어,
수녀들과 함께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 제3회원이 되어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였다.
1336년 그녀의 아들 아폰소 4세 왕과 사위인 케스틸 왕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건강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무더위를 무릅쓰고
에스트레모스(Estremoz)로 달려가 양자 간의 화해를 이루었으나
과로와 열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병고를 잘 참았고 조금도 그 아픔을 내색하질 않았다.
어느 날 머리맡에서 간호하던 자부를 보고
“미안하지만 거기 오시는 부인에게 자리를 좀 양보해 줄 수 없겠니?” 하고 말하였다.
자부는 “아무도 안 계신데 누구신데요” 하고 물으니,
“바로 거기 계시지 않니, 흰 옷을 입으신 분이…”라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분이 그녀를 영접하러 오신 성모님이셨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성총의 모친, 자애하신 모친이신 성 마리아여!
원수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임종 때에 나를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1336년 7월 4일에 65세로 에스트레모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코임브라의 클라라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으며,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
수르바란이 그린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은
그녀의 신분을 알려주듯 금관을 쓰고,
진주 목걸이를 하고,
화려한 장식을 한 녹색과 갈색 비단드레스와 황금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그녀의 치마폭에 들려 있는 장미는 자선에 대한 기적적인 일화에서 나온다.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의 자선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디니스 1세 왕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려는 아내에게
치마폭에 감춘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장미라고 말했는데,
진짜 빵이 변하여 장미가 되었다는 전설을 반영하고 있다.
성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왔고,
성녀의 자선행위도 세상에 평화를 주었으며,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중재하다가 생명을 바쳤다.
부부간의 평화,
부자간의 평화,
국가 간의 평화,
부자와 가난한 이들 간의 평화를 위한 그녀의 기구와 희생과 노력은
많은 불행과 재난을 막아주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오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