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사십부터,또는 00부터,라고 쓰인 축하카드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세례에서 시작된다.
예수님 친히 세례를 엄격한 의무의 관점에서 말씀하셨다."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새 신자들이 첫 번째 교황인 베드로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분명히 말했다.'회개하십시오.그리고 여러분 모두 세례를 받으십시오.'
자연적 삶이 출생 없이 진행될 수 없듯 초자연적 삶은 세례없이 진행될 수 없다.
세례를 받기 전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우리 모두 형제자매이므로 사이좋게 잘 지내자는 말은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여기는 것을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은 구원에 대한 예수님 복음의 핵심 진리다.
세례로 새롭게 태어날 때 우리는 인간의 혈통으로가 아니라 천상의 혈통으로 태어난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그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처럼 되셨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2베드 1,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분 안에서 살 수 있다.
성 바오로는 세례를 갓태어난 남자아이에 대한 유다인의 할례식 이행으로 이해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를 벗어버림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으며 세례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습니다.'(콜로 2,11_12)
그래서 갓난아기의 할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의 세례의 원형이
되었다.옛 의식은 아브라함의 자녀로서의 '출생'을 나타내고 새 의식은 훨씬 더 중요한
하느님 자녀로서의 출생을 나타낸다.
할례는 옛 계약의 탁월한 표지였다.
할례는 고통스럽고 큰 대가가 따르는 일이다.
4세기에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는 (할례) 세례는 '십자가의 성사'라고 썼다.
구원은 고통을 면해 주지 않는다.
세례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친구 가운데 가장 박식하고 영리했던 니코데모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풍부하고 중요하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세례는 단순히 하나의 예식도 아니고 통과의식도 아니다.세례는 새로운 계약 관계,
새로운 가족,새로운 생명,새로운 출생,새로운 창조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생일을 기억하는 것처럼 세례일도 기억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