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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41.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막1:40-42)
40 A man suffering from a dreaded skin disease came to Jesus, knelt down, and begged him for help. “If you want to,” he said, “you can make me clean.”
41 Jesus was filled with pity, and reached out and touched him. “I do want to,” he answered. “Be clean!” 42 At once the disease left the man, and he was clean.
* 다른 요구
제가 설교를 통해서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고 있습니다.
하도 반복하다 보니 말하는 제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이 주제를 반복할 생각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한국 교회의 고질병이기 때문입니다.
또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자 당장 그 저녁 가버나움 마을이 난리가 났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 모여들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할 겁니다.
이른 새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을 고쳐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38)
가버나움 사람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사람들을 피하시는 것일까요?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면 이런 말씀입니다.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치는 것은 말씀 선포와 다른 일이다.
나는 바로 그 다른 일을 위해서 왔다.
옆 마을로 가서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특별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죽게 생긴 나병 환자였습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이제 발가락에 염증이 생겼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이제는 발가락이 떨어질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처지였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무슨 부탁을 드렸겠습니까?
“주님, 이 병 좀 고쳐주세요.
나 죽게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발가락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이렇게 많이 지었길래.......”
이 병자는 다른 요구를 예수님께 했습니다.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you can make me clean.”
나를 깨끗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다른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주의를 드리자면 병을 치료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40.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40 A man suffering from a dreaded skin disease came to Jesus, knelt down, and begged him for help. “If you want to,” he said, “you can make me clean.”
* 원하시면
그는 나병 환자입니다.
병에 무슨 예고가 있습니까?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것이 대부분 뜬금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건강한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보면 저 사람 죄 때문이라고 확신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길로 나서면 아이들이 문둥이 나타났다고 돌팔매질을 합니다.
걸리고 싶어서 병에 걸린 사람이 없습니다.
도둑놈 날강도 병이 그들에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쯤 떨어져 나간 코에 귀가 제대로 붙어 있나?
몰골이 이 모양이니 생업에 전념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는 없으니 구걸 해야 됩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는 모세의 법까지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을 금지 시켰습니다.
코로나에 양성반응을 받은 사람이 돌아다니면 처벌을 받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나병이 그랬습니다.
그는 진 밖에 따로 살아야 합니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한다.
46. 병에 걸려 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 한다.(레13:45,46)
그런데 이런 일들보다 더 치명적인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아갈 때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사람들에게 크게 외쳐야 합니다.
모든 사람 들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자신을 두고 자신의 입으로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쳐야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남도 아닌 스스로를 시궁창에 처박는 일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하다 부정하다!
그것은 가냘프게 남은 자존감마저 싹을 자르는 일입니다.
이 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과연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께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태초에 그 분이 나를 지으셨는데 내가 여전히 자비의 대상인가?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그 질문부터 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눈에 나는 누구입니까?
당신은 내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당신께 버려진 존재는 아닙니까?
그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암이 나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망했던 사업이 다시 흥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 분은 자신이 세상에 버려진 존재인 줄로 알고 여태껏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말씀에 아이고 예수님하고 꼬꾸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다니!
물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20.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마12:19,20)
* 예수께 와서
그는 율법에 따라 회중 예배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남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남에게 들은 말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주님이라면 단숨에 그의 나병 정도는 고치실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그를 충분히 깨끗케 하실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날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 날은 어부 베드로에게도 처음이었습니다.
그 황당한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물고기 잡는 일에 참견하셨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고기들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끌어올린 그물을 구경하는데 터질 듯이 많은 고기들이 그물 안에 잡혔습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데 제법 큰 광어는 큰 죄로 보였습니다.
작은 멸치는 작은 죄로 보였습니다.
얼마나 많고 얼마나 다양한 죄들이 그 그물 안에 있던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그것은 틀림없이 셀 수 없는 허다한 자신의 죄들이었습니다.
7.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눅5:7,8)
나병은 그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을 병을 쳐다보는데 그것은 자신의 불의로 보이는 것입니다.
눈을 씻고 다시 보았습니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의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멸을 결정지을 문제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많는 사람들이 그 분의 능력으로 귀신에게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병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통해 죄를 보듯이 이 사람은 죽음의 질병을 통해서 의의 문제를 관심했습니다.
그의 죄의 문제를 이 분을 통해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기필코 예수님을 찾아가야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예수님을 찾아가는 길은 아주 멀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그 인파를 뚫고 예수님 앞으로 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환자이다 보니 그 일이 더 어려웠습니다.
그는 병으로 약합니다.
이 뿐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가다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도움을 구하러고 예수님께 가는 일은 단순히 이런 물리적 문제만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가려는데 이 일은 오히려 죄에 죄를 자신에게 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어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유익을 위한 수고가 자신을 해치는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 난관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갔는데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실까?
너 모세의 법을 어겼구나 하시며 끝장입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의 위협과 신학적 문제를 두고 밤새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한 후에 내린 결론입니다.
예수님께로 가자!
이 문제가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대체 정리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그냥 목숨 걸고 예수님께 가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예수님께 가라!
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14:6)
신앙은 기도를 하며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은 신앙의 적입니다.
가련한 나병 환자에게 구원의 예수님께 가는 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이 막혔을 때가 예수님께 가야 할 때입니다.
나병으로 인해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안 갈 수도 또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판사판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 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 질병이 예수님께로 가게 하는 추진력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적당한 죄인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더니 이제는 손목이 떨어져 나갈 차례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도 목숨 걸고 예수님께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입니다.
죄인으로 내어놓은 사람들 창녀와 세리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흑암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길을 잃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될 대로 되라고 자신을 팽개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꺼져 가는 자신에 대해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상해버린 자신을 꺽지 않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결정이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꿇어 엎드리어
하지만 알고 보면 이 환자는 가장 큰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무릎 꿇어 엎드려야 할지 그 대상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곳에나 엎드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복있는 사람을 이렇게 이릅니다.
“그 엎드린 대상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이 복이 있다.”
2.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20:2-4)
사람들은 왜 아무 데나 엎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문을 보니 전광훈이 교회 건물을 가지고 유치한 알박기에 성공한 것 같습니다.
80억 보상 받을 땅을 억지를 부려서 500억을 받아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하는 말이 자신들은 알박기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알박기가 성사되자 곧바로 제 아들 전도사에게 그 재산 관리를 맡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신은 교회를 세습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노골적인 사기꾼이 전하는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이겠습니까?
왜 거기에 엎어집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믿는다는 사람들이 꼭 김진홍 김장환씨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물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 맞습니까?
알박기 하나님?
무당 하나님?
뉴라이트인지 이데올로기의 하나님?
이런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왜 이리도 많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인 모양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오직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제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오직 이 하나님을 섬기느냐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탁월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께 꿇어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 불행한 처지였다면 대놓고 하나님께 대들기 일쑤입니다.
대들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병 환자는 그 하나님 앞에 엎어진 것입니다.
* 탁월함
이 나병 환자의 탁월함은 그의 관심사에 있습니다.
그의 몸에서는 고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흐르는 고름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깨끗하게 됨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비참한 처지에서도 자신에 대해 진지했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 앞에 엎드리러 갔습니다.
자신의 병든 몸을 끌고 예수님께 간 것이 위대한 일입니다.
율법을 어기면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나병 환자의 탁월함은 첫째로 의에 대한 관심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 갔다는 것입니다.
41.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41 Jesus was filled with pity, and reached out and touched him. “I do want to,” he answered. “Be clean!”
*불쌍히 여기심
율법의 말씀을 정확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지키는 일에는 전념했습니다.
그는 대충대충 말씀을 지키는 시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성전을 찾아 일사천리로 기도했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잘하고.......!
바로 옆에 세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놈에게 빌붙어서 사람을 등쳐먹으면서
나 자식만 잘 챙기고
나만 잘 먹고.......
그를 배 채우는 쌀이 하나님 배신의 결과물입니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제 한심한 정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살고 싶었지만 현실이 무서웠고 사람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결국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비겁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세리는 시궁창에서 자신의 발을 빼내려 해도 그것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한심한 자신을 두고 성전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다고 기도했습니다.
13.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눅18:13)
세리는 기도문이 막혀서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안타까워서 성전을 찾기는 했는데.......
그래서 그는 도무지 내가 기도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에게 기도란 자기모순이었으니 기도하다가 숨 막혀 죽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신만만했던 바리새인은 헛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18:14)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까지 뒤집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교적 업적을 보신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그의 낮아짐을 보셨습니다.
유창한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그 잘난 종교적 공로로 인해 종교의 본질을 잃었습니다.
관건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대책 없던 나병 환자가 바로 주님의 불쌍하심을 입었습니다.
*그에게 대시고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했던 이유는 그것이 모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의를 얻기 위해 모세의 법을 위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되려다가 자신에게 죄를 쌓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세를 거역하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의외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의 법을 어기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환부를 만지셨습니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한다.
46. 병에 걸려 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 한다.(레13:45,46)
주께서 자신의 불결한 몸에 손을 대시다니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 분이 스스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사람이 받아야 할 징벌을 의인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죄의 값으로 당해야 할 회초리질을 그가 당하셨습니다.
사람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법의 의미가 명확히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법을 주셨겠습니까?
그것을 지켜서 의인이 되라고 주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법의 의미가 무엇인가?
19.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롬3:19,20)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통해서 우리는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법이란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며 그 성취감에 좋아할 일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법을 지키다가 본인이 죄악의 암흑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을 성취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법을 지키려 할수록 그들은 불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암흑 속에서 그들은 다른 구원의 통로를 찾아 헤맬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율법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롬3:21,22)
사람들은 이제 율법의 실천이 아닌 믿음이라는 엉뚱한 장소에서 구원을 찾게 된 것입니다.
법이 구원의 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법은 그 법의 실천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법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죄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 했을 것입니다.
법이 없었더라면 사람이 제 죄를 모르고 예수님께 나아갈 필요를 느끼지도 못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믿음을 통해 의인이 됩니다.
모세의 말씀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의를 보장하시는 진정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성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42.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42 At once the disease left the man, and he was clean.
*두 가지 사건
오늘 42절 본문은 이 환자에게 일어난 사건을 첫째 나병이 치유된 것과 둘째 그 사람이 깨끗하게 된 것으로 구분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병 치유와 깨끗게 됨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병을 치유 받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을 하며 병 나았다고 할렐루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소지가 틀렸습니다.
병 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의롭게 된 것에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병 나은 많은 경우 죄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병 나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주의하십시오!
신앙을 가장 헷갈리게 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기적들입니다.
이 말세의 기적들이 부정적입니다.
9.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작용을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10. 또한 모든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미혹하게 하는 힘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살후2:9-11)
병을 치료받고 구원받았다는 착각을 한 채 죄로 죽게 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친구의 중풍병을 고치려던 친구들이 지붕을 뚫더니 그 친구를 예수님께 달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먼저 이 사람을 치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2:5)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하셨던 일은 이 환자를 깨끗케 하신 일입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4명의 친구가 원했던 대로 이 때 예수님께서 병을 치료하셨더라면 율법학자들과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서로 적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워있던 중풍병자가 말씀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났더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죄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은 그 사람은 들것에 그대로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죄의 용서는 질병의 치유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6.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할까?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막2:6,7)
주님께서 하신 그 죄 용서의 선언은 율법 학자들에게 명백한 신성모독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벌떡 환자를 일으키신 다음에 죄 용서를 선언했더라면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병 치유와 구별하셔서 죄 용서부터 하신 것입니다.
그 부딪힘이 예수님의 전략이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부딪히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주님의 역할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병 치료하시는 주님은 사람들이 몰라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 주님만큼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막2:10)
그 사건이 난 다음에 주님께서 병자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난 것은 일어나도 그만 안 일어나도 그만인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덤으로 해주신 것입니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막2:11,12)
이 사람이 죄 용서만 받고서 다시 들것에 실려 갔어도 할렐루야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이 두 번째의 일이 더 경이로웠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 나병 환자가 요구한 깨끗하게 하심이 더 근원적인 예수님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유일의 소망은 중풍 병자가 벌떡 일어나 제 들것을 챙겨 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 유물론적 가치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바꾸어 놓는 일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도란 바로 사람들의 가치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썩을 가치를 추구하던 이를 불러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만지신 것입니다.
모세가 금지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마치 모세의 율법을 폐한 것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5:17)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님을 확인시키셨습니다.
그 환자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4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막1:44)
주님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법을 완성 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법을 존중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