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날이 그리 많다고 여겨지지 않는 나이에 무아(無我), 비아(非我)를 논하고 보니 약간 부끄럽다는 생각에 후회되는 마음도 없지 않다. 그러다가 문득 망아(忘我)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서 또다시 자판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또 한 번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침 일찍 습관대로 일어나서 오르페라는 고전음악 전문 채널을 틀었더니 마침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라는 피아니스트가 바흐의 피아노곡 파르티타 5번을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신들린 것 같이 치는 그의 피아노 연주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면서 망아라는 말이 생각났고, 영적 휴머니즘을 끝으로 하여 절필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망아를 말하고자 다시 펜을 들었다. 내가 무아, 비아를 논한 것은 결코 어느 한 종교를 폄하하거나 종교 간의 우열을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무아든 비아든 궁극 목표는 망아에 있다. 망아란 참 자아든 거짓 자아든 자기를 잊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가 부질없는 생각을 여읠 것을 말했나 보다. 그는 자기를 비우는 마음 수련을 좌망(坐忘)이라고 불렀다. 망아는 우리가 어떤 경우든 ‘나’라는 생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경지로서, 마치 우리가 젖먹이 갓난아기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자와 노자는 영아(嬰兒)를 도를 체득한 상태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라훌라 스님도 마음챙기기 수련의 궁극 목표는 나라는 생각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과 기예의 정점이라고 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도 자기를 떠나는 것(sich lassen)을 중시했다, 망아라면 일체의 언어와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누가 살 수 있겠는가? 술에 취하고 약물에 취해 살라는 말인가 하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망아가 왜 필요한지까지는 누군가가 반드시 말로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법이 왜 필요하고 그 많은 경전과 논서들이 왜 쓰였겠는가? 나는 따라서 글을 많이 쓰거나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즐겨도 된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러한 자세로 하는 행위를 선불교에서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라 부른다. 이 마음은 알되 앎이 없는 앎(知而不知)이며 수행 아닌 수행이라고 한다. 모든 말과 일을 불성을 떠나지 않고 불성의 작용으로 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갓난아이처럼 되기란 말은 쉽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매일 매순간 자기 마음 상태를 관찰하면서 자기로부터 떠나기를 단련해야 한다고 영성의 대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는 모두 갓난아이로 태어나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나지만, 살면서 우리의 본심 혹은 본성이 세파에 시달리고 언어에 현혹되면서, 참 나를 잊게 된다. 그래서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돈오점수(頓悟漸修)야 말로 수행의 요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Bach Partita No 5 G major BWV 829 András Schiff
https://www.youtube.com/watch?v=Q_g-FqGrc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