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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우리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이 사람들이 생활하기 어려운 “들염소 바위”에 있는 한 굴로 숨어든 이유는 순전히 사울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겨우 생각해 낸 도피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울이 바로 그곳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도망자로 들어온 다윗은 순식간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불과 얼마 전, 같은 지파 사람들에 의해 사울에게 팔아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다윗에게 팔아 넘겨졌습니다.
그때는 다윗이 독 안에 든 쥐였지만, 지금은 사울이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사울이 누리던 것을 다윗이 누리게 되었고, 다윗이 당하던 어려움을 사울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사람들이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삼상23:19b-20)라고 말했다면,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24:4a)라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입장이 역전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상황을 통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울 왕도 사실은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굳이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도 언제든지 왕위에서 끌어내리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기대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던 당신의 역전을 맛보는, 감칠맛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나치 독일의 한 수용소 지하 벽에는 “비록 태양이 우리에게 비쳐오지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이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영국과 미국의 포로 이만 여명 가운데 무려 팔 천 여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죽은 원인은 영양실조도, 질병도 아니었습니다.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아카바의 선물”의 저자 “오그 만디노”(Og Mandino)는 “다수의 비난에 초연해 져라. 왕따가 됨을 두려워 말라. 내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가다보면 그들은 언젠가 내가 이룬 것들을 축하 해 주면서 부러워하는 날이 올 것이다. 꿈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 꿈을 꾸는 사람은 가혹하게 냉대 받는다. 멋진 자기만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고 싶다면, 피하지 말고 현재 내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시작하라. 그 곳에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라. 현재가 없는 꿈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스스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특히 세상 모든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절대 절망하지 마십시오. 짜릿한 역전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전혀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의로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림을 받았던 다윗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8-9절입니다.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다윗은 사울을 “내 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11절에서는 “나의 아버지여”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을 여전히 깊이 존경했으며,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요, 자신의 장인(丈人)이요, 연장자로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사울의 충성스런 신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드럽고 유순한 말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잠15:1a)고 말했습니다. 또 원수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잠25:22a)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드럽고 정중한 말은 상대방의 극한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마음을 평안한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무장을 해제시킵니다. 다툼거리를 제거합니다. 유순한 대답을 듣고 조롱하고 더 화를 낼 정도로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화낸 것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실 당시 용맹(勇猛)과 지략(智略)으로 무장한 다윗은 주변 국가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 앞에서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충실한 종처럼 겸손했습니다. 온유했습니다. 유순했습니다. 또 사울이 다윗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은 사람들의 충동질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해 가는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이 마치 누군가의 이간질로 인해 자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를 갖게 된 것처럼 완곡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악한 사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게 반듯한 예의와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자세와 상관없이 사울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도 크게 슬퍼하며 애도(哀悼)했습니다. 그는 신실하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에서 나온 말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한번 입을 떠난 말입니다. 말에 따라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 깊은 절망과 회의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할 수도 있고, 아예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른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상대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충실해야 합니다. 어른다워야 어른 대접하겠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일이고, 어른을 바른 예의로 대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할 죄입니다. 유순한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을 부른 다윗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10-15절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 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지혜자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16:32)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의 문자적인 의미는 “콧구멍이 긴 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콧구멍”을 분노의 감정이 표출되는 곳으로 인식했습니다. 결국 “콧구멍이 긴 자”는 분노를 급하게 발하지 않는 자, 또는 성급하지 않고 인내함으로서 자신의 감정 표출을 절제하는 신중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NIV는 이를 “오래 참는 자”(patient man)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마음”(루아흐 : roo'akh)은 “호흡, 생명, 분노, 영, 경향”등의 뜻으로, 본 절에서는 내면적인 감정의 동요 또는 흥분과 충동 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감정의 동요 없이 냉철한 판단력으로 평안을 유지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증거로 동굴에서 베어낸 옷자락을 보여주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엄숙히 선포했습니다. 자신은 결코 스스로 공의를 행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악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의 속담을 예로 들며, 자신에게는 사울을 죽이면서까지 왕이 되려는 야욕이나 악의가 전혀 없다고 밝혔습니다. 만약 그런 야욕과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기회가 주어졌을 때 굳이 추종자들의 충언까지 뿌리치며 사울을 살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자신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선한 성품에 따라 절대 사울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또 죽은 개나 벼룩 같이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한 자신을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울에게 어떤 해(害)도 끼칠 능력을 갖지 못한, 그래서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자신을 죽여서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외쳤습니다. 또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온유(溫柔)”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악한 일을 당했을 때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악을 쓰거나 싸우지도 않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사람이 어떻게 나오든 정도(正道)를 걷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37:11)라고 외쳤습니다. 예수께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마5:5)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윗은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적을 궁극적으로 동일하게 취급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땅을 차지했습니다. 땅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땅을 정복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생활 속에서 억울하고 화나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신뢰해야합니다.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합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이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친한 친구와 죽이려는 적에게 동일한 마음과 자세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한다할지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친구와 적을 같은 마음과 자세로 대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유순하고 의로운 말과 행동은 사울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놀라운 고백을 쏟아놓게 만들었습니다. 16-19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待接)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律法)이요 선지자(先知者)니라”(마7: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들에게도 베풀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행하든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진실하고 간절한 호소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무디고 강퍅해진 사울의 심금(心琴)을 울렸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르며 대성통곡(大聲痛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요나단에게 “그는 죽어야 할 자”(삼상20:31b) 곧 “죽음의 아들”이라고 외쳤던 것과 비교할 때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상26:1-2절은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다윗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통곡이 진정한 회개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의 말을 들은 그는 일시적으로 감정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보다 더 의롭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매튜헨리는 사울의 고백을 “그의 고백은 다윗의 무죄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했으나, 사울 자신을 참된 회개자로 입증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너는 의롭고 나는 악하다’라고 말해야했지만 ‘네가 나보다 더 의롭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도 의롭지만 다윗이 더 의롭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말은 사실입니까?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애매한 제사장들을 몰살시키기까지 했습니다. 다윗을 죽여야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그는 반복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를 갚을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제시하신 원칙에 입각해서 의롭게 행동했습니다. 오히려 예전과 똑같이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너무 다른 의로운 다윗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너는 나보다 의롭다”가 아니라 “나는 악하고 너는 의롭다”고 고백했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속적으로 선한 삶을 살고 있는 다윗이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보다 조금 더 의로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사28:15a)한 그는 일시적인 감동에서 벗어난 직후 자기 길을 갔습니다.
다시 다윗을 잡을 기회가 주어지자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여전히 다윗에 대한 과대 망상적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을 뿐 진실한 회개를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나보다 의롭다”는 사울의 고백에 주의해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게 반드시 들어야할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야할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촛불 정국 속에서 “개독교”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도, 의롭지도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는 내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수장이라는 대통령은 더 합니다. 그리고 섬겨야할 국민들을 물대포와 분말소화기로 상대하는 정부를 두둔하기에 바쁜 원로 목사들의 발언은 더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백성들을 향해 사탄의 무리라는 폭언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북한 김정일의 사주를 받았다고 폄하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도 예수 믿으라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일이면 천주교 사제단이 주최하는 대규모 시국 촛불 미사가 열립니다. 그 동안 기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촛불 집회에 참여해왔던 그들은 지난 26일 촛불 미사에 대해서 공고하면서 공권력이 저지르는 폭력 앞에 더 이상 절제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불교계마저도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 원로들과 대형 교회 목사들은 마치 불에 기름 붓는 듯한 말만 골라서 내뱉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이곳 저곳에서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대한 민국에서의 기독교의 암담한 미래가 눈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부터 저는 나라를 IMF의 위기로 몰아넣은 김영삼 정부의 전례가 또 다시 재현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정직하십니까? 거룩하십니까?
의로우십니까? 도덕적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돈 많고, 명예 있고, 권세 있고,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요셉과 다니엘을 높이 세우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될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죽더라도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것은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피해갈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제시하신 원칙을 고수하는 삶을 통해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또 사울의 고백을 통해 “다윗,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20-22절입니다.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그일라의 배신으로 인해 광야 황무지로 쫓겨난 다윗을 찾아온 요나단은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삼상23:17b)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읫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사울도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떠나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윗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온 백성들이 자신을 떠나 다윗을 칭송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조차 다윗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면 왕위가 요나단에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그 동안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몸부림 쳐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그의 모든 수고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후손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삼 천에 달하는 사울의 최 정예 부대가 함께 있었습니다. 다윗의 추종자 600명도 역시 함께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장차 다윗의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인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들 앞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전혀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선지가 갓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3천6백 명의 백성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갖추어야할 지도력을 검증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 못한 상황에서 당신의 뜻과 말씀과 원칙에 따라 누구보다 의롭게 살아왔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일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b-9)는 하나님의 말씀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인정받을 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최소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제시하신 원칙에 따라 사십시오. 세상보다는 조금 더 의롭고 정직하게 사십시오. 그것을 통해 절대 절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불과 1년 사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한 흑인 소년은 인종 차별과 가난 속에서 수십 번도 더 학교를 그만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에 새긴 그는, 최고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잘 참고 견뎌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소아마비에 걸렸고, 가정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UN에 진출한 그는 국제 사회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가 바로 흑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랄프 번치”(Ralph Bunche)입니다.
대한민국 포철의 신화를 일군 박태준 전 회장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는 “절대적 절망은 없다”입니다. 클레어 루스는 “절망스러운 상황이란 없다. 절망한 사람만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의 시민, 웨이크필드의 목사”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골드 스미스(Oliver Goldsmith)는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을 때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명성은 실패했을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에머슨(Emerson Ralph Waldo)은 “불행은 과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불행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희망은 좋고, 절망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엔 “희망 중독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희망이 남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일 때 제대로 절망해보지도 않고, 성급한 희망을 갖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경박한 희망을 갖는 것보다는 진지한 절망이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 훨씬 더 낫습니다. 깊은 절망을 통해 참된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기즈칸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들쥐를 잡아먹으며 목숨을 유지했습니다. 목숨을 건 전쟁이 그의 직업이고 일이었습니다. 그림자 말고는 친구가 없을 정도로 외로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군사라고 해야 겨우 십만에 불과했고, 백성 역시 어린애와 노인까지 포함해 채 2백만도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적(敵)인 자신을 극복한 그는 인류 역사 속에 전무후무한 위대한 칭기즈칸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깊고 깊은 절망을 몸으로 견뎌내며 희망을 창조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절망적인 상황을 단번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을 때,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계시된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절친한 친구와 똑같이 대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바로 그 원수를 통해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순간이 주어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삶의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조금 더 거룩하고, 의롭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의로운 당신의 백성을 절대 절망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