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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100년 10월 25일 일반 초대법회
> 제목: 대종사님을 뵙고(추모담)
> 로산 전성완 종사(출가위) 설법
> 타이핑: 나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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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10월 25일 일반법회(로산 전성완 종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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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법문(안암회보)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jnyouth/IWj/1002
설법영상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jnyouth/974Q/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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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온 것은, 대종사님의 법설을 전하러 온 것도 아니고 원불교의 역사를 말씀 드리러 온 것도 아닙니다. 제가 오늘 여기에서 드릴 말씀은 제가 그동안 원불교 내에서 살아오면서 원불교 역사에 실리지 않을, 또는 대종사님의 법설에서도 실리지 않은 숨은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전해 올릴까 해서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대종사님과 우리 집안의 인연>
제가 오늘 교무님께 허락받은 시간은 1시간입니다. 1시간에 맞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자랑할 것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계신 모든 교도님들 가운데에서 대종사님을 가장 먼저 뵌 사람이다’라는 것은 자랑할 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대종사님을 봬온 것은 원기 9년 4월이었습니다. 그 전에 저희 할머니께서 원기 7년 4월 초파일날 가까운 절에 관등구경을 갔다가 거기에서 삼타원 최도화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비단 행상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집에도 몇 차례 들르셨기에 잘 아는 처지였습니다. 그 삼타원님이 저희 할머니에게 ‘부안 봉래산에 생불님이 나셨다, 한번 뵈러가자.’하고 권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그런 종교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쾌락을 하고 삼타원님을 따라 부안 봉래산에 가서 대종사님을 처음으로 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대종사님을 처음 뵙고 그 자리에서 ‘이 어른은 틀림없는 생불님이시다.’하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외아들인 저희 선친을 대종사님 아들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저희 선친은 나중에 생긴 은족법(은부모시자녀법의 줄임말)에 앞서서 대종사님의 아들이 되었고, 나중에 대종사님 아들이 되고 싶은 사람을 신청을 받았었더니 너무 수가 많아서 미혼자만 아들, 딸로 받아들이고 기혼자는 법자라고 별도의 이름을 지어 받기로 하였었는데 저희 선친은 그 때 이미 결혼을 한 사이었었지만 이미 대종사님과 부자 결의를 했기 때문에 기혼자이면서도 은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종사님의 손자가 되었습니다.
<대종사님의 외모>
대종사님은 원기 9년 4월에 총부 터를 계약하기 위해 이리에 오셔가지고 계약을 하시고 나서 다시 전주로 오셨습니다. 저희 집은 그때 전주 완산동에 있었어요. 저희 집은 방이 7자 사방 방이었기 때문에 저희 어머님 말씀으로는 ‘대종사님께서 방에 누우시면 상투는 저 쪽 벽에 닿고 발은 이쪽 벽에 닿았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대종사님께서 키가 한 6자는 될까 생각했었습니다. 나중에 문헌을 보니까 대종사님의 키는 5자 6치었었다고 합니다. 5자 6치는 168센티인데 지금 같으면 보통 키에 해당되겠지만 당시로서는 큰 키였습니다.
(지금부터 드릴)이 말씀은 제가 추모담을 하고 다닌 데가 20여 군데 되는데 그 속에서 단 한군데에서 말씀드린 것을 여기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종사님께는 삼남 일녀가 계십니다. 그 삼남의 마지막 막둥이에 해당하는 박길연 선생님이-나중에는 원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되었습니다만- 하관이 대종사님을 꼭 닮으셨습니다. 이 양반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곁에 갓을 쓴 영감님이 앉았다가 박 교장 선생님의 얼굴을 이리 보고 저리보고 하더니 ‘당신 부처님 상이오,’ 하더라는 것입니다. ‘당신 부처님 상이오.’ 만약에 얼굴 전체가 대종사님을 닮았더라면 그대로 부처님이 되셨을 텐데 요리만 닮아서 부처님이 못 되셨던 거 같은데, 하여튼 그 영감님이 관상은 잘하셨다고 생각됩니다. 관상학적으로도 대종사님은 부처님이셨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아이를 대하실 때>
제가 보통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이 되었습니다. 일본강점기에서도 식목일이 있었습니다. 날짜도 똑같은 4월 5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느티나무 이만한 묘목을 전부 주어서 집에다 갖다 심으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묘목을 받아다 집에서 심었습니다. 저희 집은 총부에서 세 번째로 지은 집이었습니다. 저희 집 앞에는 연못이 있었어요. 1면이 10미터쯤 되는 정사각형 연못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그 연못가에 저희 집에 있는 그 느티나무를 옮겨 심었으면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어머님을 부르셔가지고 ‘너희 집에 있는 그 나무 옮겨 심자’ 라고 하셨으면 되었을 것입니다. 어머님은 당장에 갖다 심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를 부르셔가지고
‘너희 집에 있는 그 느티나무, 총부에다 심어놓으면 총부를 찾아오는 사람마다 다 볼 수가 있어. 너희 집에다 심으면 너희 식구밖에 못 봐. 그러니 옮겨 심는 게 어떠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한번 섭섭이 들면 뇌에 꽉 박혀가지고 지워지지 않아. 어른들이야 섭섭이 들었더라도 이해할 줄이라도 알아. 이해해서 지울 수도 있는데 어린아이들은 한번 뇌에 박히면 그 섭섭이 오래가. 그러니 어린아이들을 다룰 때에는 특히 조심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도 제가 심었던 느티나무를 총부에 옮겨 심었더라면 제 마음에 속에 혹 섭섭한 마음이 들까봐 저를 직접 부르셔서 이해를 구하셨던 것입니다.
<대종사님의 사업방침>
제가 구조실 앞에, 지금은 정원이 되었습니다만 옛날에 마당이 있었어요. 그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그 때 나이 한 7살 되었습니다. 대종사님은 구조실 앞에 서 계셨고 그 앞에 산업부원 두 사람이 있어 대종사님께 말씀을 여쭙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약초를 재배하면 붐이 일어가지고 크나큰 이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부에서도 약초를 한 삼천 평 재배할까 생각 합니다.’ 하고 여쭙고 있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그러지 말고 ‘한 백 평 쯤 심어서 그 동안에 요새 말로 노하우도 쌓고 세상 변천해 가는 것도 보고 차차 키워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사업 방침으로써 이소성대를 모토로 삼으셨습니다. 아무리 붐이 일어 이익이 많은 일이라 해도 절대로 단번에 크게 시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꼭 이소성대로 작은 데서부터 차차 키워나가는 것을 근본 방침으로 삼으셨습니다.
<대종사님과 병든 개>
저희 할머니께서 하루는 새벽에 좌선을 갔다 오시더니, “혼자 복을 얼마나 받으시려고, 복을 얼마나 받으시려고.” 자꾸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 하고 들었더니, 그 때 총부의 개가 병이 났어요. 그래서 코에서 고름을 질질 흘리고 다녔습니다. 선방에 있었던 세탁부 건물 앞마당에다가 그 고름을 질질 흘리고 돌아다녔습니다. 그것을 대종사님께서 일일이 신발로 지우고 다니시는 것을 할머니가 뵙고 와서, ‘복을 얼마나 받으시려고. 지금 부처님이 되어서 복을 최고로 받으시고 계시는데 거기에 더 복을 짓고 계신다.’ 하며 탄복을 하고 계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을 시키셔도 될 일을 대종사님 직접 손수 하시는 어른이셨습니다.
<여가의 중요성>
대종사님께서는 여가를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시고 선용하시는 데 힘을 쓰셨습니다. 그 때 선을 나면 한 번에 삼 개월 씩 일 년에 두 번 선을 납니다. 요즘에는 스피드 시대가 되어가지고 1박 2일로 그냥 후다닥 강습하고 맙니다마는 옛날에는 3개월씩 6개월을 선을 났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겨울에 5시에 기침하여 7시 까지 여름에는 4시에 기침하여 6시 까지 두 시간 좌선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경전공부를 두 시간 했습니다. 오후에는 정기 일기를 두 시간 했습니다. 밤에는 염불, 강연, 회화를 여럿이 번갈아 가면서 두 시간씩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점심을 먹고 공부가 시작되는 두 시까지 두 시간 여유가 있었어요. 그 두 시간 여유에 선방에 다들 모여가지고 대종사님 모신 가운데 참 그야말로 한가한 시간을 선용을 했습니다. 그 때 총부에는 전기가 안 들어왔기 때문에 축음기를 갖다놓고 그 축음기로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이 세 창을 주로 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유행가도 틀었습니다. 그 때 유행가가 오리엔트 레코드사에서 나왔던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봄은 찾아왔다고 아장아장 걸어가네. 산들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 타령이 절로난다. 응으으응~~’ 하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저는 노래에는 소질이 없지만 어려서 들었던 그 가사는 지금껏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언제나 정신소창을 강조하셨습니다. ‘맨 공부만 한다고 틀어 앉아서 정신을 너무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걸 확 풀어주는 소창-소창은 소풍간다는 얘기죠- 정신을 소풍 보내 좀 쉬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 소창을 언제나 강조하고 계셨습니다.
<삼십 계문에 대한 일화>
유산 유허일 선생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이 어른은 영광에서 제일가는 한학자로 쳤습니다. 한학자, 한문학자 입니다. 그 어른이 불법연구회에 입회를 했습니다. 그것이 원기 17년 입니다. 이러한 대 학자가 불법연구회 입회를 해가지고 정전을 한 번 읽었어요. 그 속에 계문도 나오지요, 30계문. 모르는 글자가 있겠어요? 거기에 있는 한자 모를 글자 하나 없고, 뜻 모를 말도 하나 없고. 그러니 딱 덮어버렸어요. 그 때 최초의 선을 하면서 밤에 강연이 돌아왔습니다. 유산 선생님도 거기에 강연을 하시게 되었는데 거기의 강연 주제는 삼십 계문이었습니다. 유산 선생님이 강연을 하셨더니 대종사님께서, ‘갑이다.’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평가를 하셨습니다. 의견을 제출해도 평가, 강연해도 평가, 회화를 해도 평가, 모든 것을 다 평가를 하셨어요. ‘갑이다.’ 평가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갑은 갑을병정 가운데 최고점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갑보다도 더 윗점수를 주기 위해서 갑상을 줬습니다. 갑상, 갑, 갑하 이렇게 줬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 평가는 그게 아닙니다. 갑은 위에서 12번째 밑에서 4번째. 대종사님의 평가는 12갑이 최고입니다. 갑 12개가 최고입니다. 그리고 을, 병, 정 해서 총 15개로 평가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산 선생님이 갑을 받으신 것은 위에서 12번째 평가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이 양반이 대단히 섭섭해 했습니다. ‘아무려면 내가 대 학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이제 열대여섯 살 먹은 아가씨들도 다 육갑, 칠갑을 받는데 내가 갑이라니.’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을 찾아 뵀습니다. 대종사님, 그 때는 종사님이십니다. ‘종사님-대종사님은 나중에 정산종사님께서 법을 내셔가지고 대종사님이 되셨고 그 당시는 종사님 이셨습니다. 종사님, 제가 아무려면 이제 열대여섯 살 먹은 아가씨만도 못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대종사님께서는 ‘허일은 삼십 계문을 외웠는가?’ 이 말씀에 다시 말씀을 못했습니다. 한번 읽고 덮어 버렸는데 욀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 다음날부터 유산 선생님은 대각전에서-빈 건물은 굉장히 울립니다. ‘제 일조,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 제 이조, 도적질을 말며, 제 삼조, 간음을 말며...’ 하고 사흘 동안을 열심히 외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유산선생님 보고 그 삼십 계문을 외워라 해봤자 잘 안 들으실 것 같아요. 왜냐, 자기 머릿속에 대 학자라는 생각이 꽉 찼는데 이 삼십 계문은 글도 별 것도 아니고 한 번 읽어보면 다 아는 것, 무엇 하러? 또 읽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방편을 쓰셨어요. 심적인 모욕감을 느끼게 하여 사흘 동안 열심히 삼십 계문을 외게 하셨어요. 삼십 계문 세 가지를 완전히 삼위일체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첫째는 외워야 하고 둘째는 정확하게 해석을 해야 되고, 셋째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완전히 해야 삼십 계문을 지키는 것이지 외지도 못하고 어떻게 삼십 계문을 지킨단 말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 추모담에 하려고 생각하면서 그러면 ‘너는 어떠하냐? 너는 다 외웠냐?’ 하고 한번 시험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런데 두 군데에서 탁 막혀서 암만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늙으니까 묘한 것이 있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한 번 막히면 절대로 생각이 안 납니다. 그 대신에 이틀 안에 생각도 안 했는데 머릿속에 떠올라요. 그래서 걱정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날은 추모담을 하러 가야하는데 저절로 떠오르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책을 떠들어 봤습니다. ‘두 사람이 아울러 말하지 말며‘에서 딱 걸렸어. ’ ’두 아내를 거느리지 말며‘에서도 딱 걸렸어요. 이 두 가지가 당최 생각이 나지 않았어. 해석을 제대로 잘 하셔야 합니다. ’두 아내를 거느리지 말며‘하니까 여자 분들은 ’아 그것은 남자 계문이지.‘ ’남자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지.‘ ’두 아내를 거느릴 사람은 남자니까 여자는 해당이 없지.‘ ’여자는 30계문이 아니라 29계문이다.‘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되지요. ’여자는 두 번째 마누라는 되지 말라.’ 하고 경계를 하신 것입니다. 두 아내의 두 번째 아내가 되지 말라는 것이에요. 뿐만 아니라 요새 세상에 누가 나머지 첩이 되어요? 첩은 안 된다 하고 남자 꼬셔서 강요해서 이혼시켜가지고 자기가 그 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 이것도 거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요새 뇌물을 먹지 말며 하는 것이 제일 문제가 되고 있어요. 벼슬이 높은 사람들 그것으로 다 걸리고 있어요. 그런데 삼십 계문 어디를 봐도 ‘뇌물을 받지 말며’가 없어요. 그러면 원불교 신자는 뇌물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게 해석을 해서도 안 되지요. 이것도 도적질을 말며‘에 해당이 됩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지인이 갖다 줘서 받았는데 내가 언제 도적질을 했나. 그렇게 말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공무원에게 국가 공권력을 맡긴 것은 그것을 정당하게 써 가지고 국민들을 이롭게 하라고 맡긴 것이지 그 놈 팔아서 뇌물을 받아먹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무원이 뇌물을 받는 것은 국가 공권력을 도적질 하여 팔아먹은 거예요. 그 팔아먹은 뇌물을 산 사람이 장물을 산 사람이지요. 이렇게 해석을 하면 제대로 삼십 계문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법강항마위의 자리>
서동풍 선생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교사 보셨으면 서중안 선생님이라고 나옵니다. 이 서중안 선생님의 형님이 서동풍 선생님이십니다. 이 분은 전라북도 김제군에서 한의사를 했어요. 이 어른이 열반을 하시니까 중천에 성의가 뻗었어. 중천에 성의가 뻗었다는 말씀을 대종사께서 들으시고 정식 법강항마위에 올리셨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최초로 법강항마위에 오르신 어른입니다. 이 어른을 법강항마위로 올리시면서 구인 선진님 가운데 그 때 열반하셨던, 오산 박세철 선진님도 같이 법강항마위에 올리셨습니다. 그러고 조실에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제자 분들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실수 할라 하더냐,’ 법강항마위라는 그 법위가 어떤 자리입니까. 첫째, 법과 마가 싸와서 법이 백전백승해야 오를 수 있는 자립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법강항마위에서 내려와야 해. 둘째,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연구력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아까 백전백승은 취사력을 얻었다는 말씀이고 연구력을 얻어야 법강항마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양력을 얻었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취사력, 연구력, 수양력, 삼대력을 얻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정식 법강항마위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대종사님께서 쓰시던 문서를 정리하면서 보니까 그 속에 정식 법강항마위 후보자로 일곱 어른의 함자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종사님께서는 그것도 발표를 하지 않으시고 열반에 오르셨습니다. 이렇게 법강항마위라는 자리가 대단한 자리인데, 대산종사님께서 문을 확 열어놓으셨어요. 그래서 무관사에 동하지만 않으면 법강항마위에 올린다 하여 많은 어른들이 법강항마위에 오르셨는데 그 법위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입니다. 자기 속을 다른 사람이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어요. 자기가 제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생각해봐서 법강항마위에 조금이라도 모자란다 싶으면 열심히 노력을 해서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을 하루바삐 갖춰야 합니다. 이 셋, 삼대력을 얻은 후에- 대종사님께서 하나 더 보태셨어- 견성을 해야 합니다. 견성을 하지 않으면 법강항마위에 오를 수 없다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공부를 하셔서 모자란 점을 하루 속히 보충을 하셔서 명실상부한 법강항마위가 되도록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소싸움 대회 일화>
전국 소싸움 대회가 이리에서 열렸습니다. 거기에 전국에서 소가 모여들었는데 부산에서 산더미 같은 소 두 마리가 왔습니다. 총부 산업부도 산업부 소가 거기에 참가를 했습니다. 소싸움은 어떻게 하는 고 하니 처음에는 이렇게 부딪쳐요 그래서 밉니다. 밀다가 힘이 약하면 도망을 가요 그러면 승부가 납니다. 도망을 가야 승부가 납니다. 뛰어다니는 소는 살짝 비껴서서 배를 받아버려요 그러면 놀라서 도망을 가버려요. 그래서 승부가 나요. 그런데 우리 산업부 소가 부산 소와 붙었어. 부산 소는 원체 커요. 힘이 세요. 우리 산업부 소는 힘이 약해서 울타리 까지 밀렸는데도 도망을 안 갔어. 그래서 부산 소 임자가 우리가 이겼다고 본부에다 항의를 했어요. 그러나 본부 사람들은 ‘아니다, 도망을 안 갔으니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니 부산 소 임자가 화가 나가지고 ‘우리는 간다.’ 하고 소 두 마리를 데리고 가버렸어. 그 통에 우리 산업부 소가 일등을 해 버렸어. 비록 미물일망정 ‘불법연구회 소가 일등 했다.’ 해서 그 때 이리 시내에 있던 택시 7대를 대절해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이리 시내를 한 바퀴 돌았어.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에 어떤 분이 가서 대종사님께 ‘점잖으신 분께서 그런 데를 다 참석하셨습니까.’하고 여쭈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다음에 선방에 나오셔가지고, ‘그래, 내가 조천자나 자천자처럼-그 때 전라북도 정읍에 강증산의 제자 두 분이 보천교와 태을교를 세우고 있었어요. 그러고는 자기네들이 도천자라고 하여 도임금이라고 하여 조천자 자천자라고 했어-그 조천자 자천자처럼 나도 용상에나 앉아서 임금노릇을 해야겠느냐.’ 이 말씀 속에는 ‘나는 중생들과 같이 기뻐하고 중생들과 같이 슬퍼하고 중생들과 같이 생활한다.’ 는 그 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만민평등의 사상을 가진 어른이 대종사님이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의 꾸짖음>
대종사님이 계시는 조실, 지금은 법무실이 있어가지고 법무실을 통해야 종법사님을 뵙게 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방이 문만 열면 조실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어. 법무실도 따로 없고 바로 문만 열면 대종사님 계시는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알람을 안 받고 제멋대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경찰서 고등계 형사. 고등계 형사 이들은 와서는 문 열고 언제든지 들어가요. 알람도 받지 않고 쑥쑥 들어가, 때로는 대종사님께서 시자를 나무라실 때도 있었어요. 대종사님께서는 성음이 크기 때문에 큰 소리로 시자를 꾸짖으실 때도 있었어. 한참 꾸짖고 계시는데 고등계 형사가 쑥 들이닥쳐요. 대종사님께서는 새로 새 사람이 들어왔으니까 그 사람을 상대해서 돌아앉으시는데, 돌아앉으실 때는 이미 훤하게 얼굴에 웃음을 띠고 돌아앉으셨습니다. 시자를 아까 나무라실 때는 곁에서 보는 사람이 굉장히 흥분하셨다고 생각할 만한데 돌아앉으신 걸 뵈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돌아 앉으신단 말이에요. 대종사님께서는 마음 속 깊은 데에서부터 흥분한다거나 노한다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시자를 개과천선하기 위해서 꾸짖으시기는 하시지만 미워서 꾸짖으시는 게 아니 때문에 마음은 언제나 태평합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필요하면 환한 웃음을 띠고 돌아앉아 계셨다. 공자님 말씀에 ‘불천노라, 성난 것을 옮기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화가 난 것을 한참 하다가 저 사람이 들어온다고 저 사람에게까지 화난 표정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을 그대로 대종사님께서는 그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가 어떤 집 부엌 앞을 지나는데 그 부엌에서 고부간에 말씀을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보고 ‘대종사님께서 꾸짖으실 때는 참 야속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는데 그 뒤에 다시 부르셔가지고 과거에 그 야속했다거나 섭섭했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주시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셔가지고 모든 것을 풀어주신다.’ 이 말씀, 한 말씀만 듣고 집에서 실천하셔도 여기 오신 효과는 납니다. 애들도 꾸짖을 때 막 매를 들고 꾸짖고 야단 때리고 그리고 말아버려. 혈맥이 상통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유지되려나 몰라도 그건 마음속에 남습니다. 뒤에 반드시 다시 부르셔가지고 그것을 풀어주는 과정을 꼭 실천하신다면은 여러분들의 가정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제자들을 지도하시는 데에 꼭 이렇게 꾸짖으셨다가도 풀어주시는 과정을 꼭 거치셨습니다.
<대종사님의 신통력>
벌써 시간이 다 되어 가네요. 대종사님은 다른 종교를 문을 연 분들은 다 신통력을 가지고 그 신통력을 이용하여 종교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교조님은 신통력이 없으셨을까. 아마 여러분들 그런 궁금한 생각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대종사님의 신통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하고 나셔서 글을 많이 지으셨어요. 그 때 대종사님에게 제일 가깝게 계신 분이 팔산 종사님이십니다. 팔산 종사님은 대종사님께서 어렵게 생활을 하실 때 범연동??에서 부자로 생활을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을 경제적으로도 많이 도와 드렸고, 대종사님을 동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종사님도 팔산 종사님을 형님이라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하셔서 ‘내가 대각을 했으니까 제자를 만들어야겠는데 제자를 만들 때 제일 처음에 누구를 제자로 만들 것인가.’ 대종사님과 가장 가까웠던 팔산 종사님을 제자로 만들어야겠는데, ‘형님 내가 대각을 했으니 제자를 하시오.’ 해서는 아무도 제자 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방편을 여러 가지를 쓰셨습니다. ‘형님, 내가 글을 지었는데 좀 받아 써주시오.’ 대종사님은 서당을 1,2년 밖에 안 다니셨어요. 팔산 종사님은 부자로 사셨기 때문에 제대로 서당을 다니셔서 한문 공부를 많이 하신 어른입니다. 그래서 한문에 자신이 있으셔. ‘그러세요. 부르소.’ 벼루하고 붓을 준비해서 대기하시면 대종사님께서 막 글을 부르셔. 받아쓰다가 자꾸 글자가 막혀요.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대종사님께서 ‘아, 그 글자는 이렇게 쓰는 거 아니오?’ 하면서 자꾸 가르쳐 주시니까. 팔산 종사님께서 속으로 크게 놀라셨어요. 그래서 팔산 종사님은 처음에 동생이 그 뒤에 선생님이 되시고 선생님이 나중에 아버님이 되셨어요. 팔산 종사님은 대종사님을 아버님이라고 하셨어. 그 때 적어 놓은 그 한시가 내용이 대개 예언적인 시에요. 그걸 여러 권 책으로 만들어가지고 ‘법의대전’이라고 이름을 붙이셨어요. 그런데 대종사님께서 생각하시니까 나중 후세 사람들이 내가 쓴 그 책을 놓고 정감록처럼 앞으로 세상이나 점치고 있으면 큰일 난다 하셔서 법의대전을 제자 둘을 불러 뒷산에 가서 불태우게 하셨어요. 제자 두 분이 뒷산 묘 앞에 가서 불을 질렀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아깝단 말이야. 그래서 그 중에 한 권을 슬쩍 빼어 가지고 상석 밑에 숨겨놓고, 불사르고는 시치미 뚝 떼고 돌아왔습니다. 대문에 막 들어서니까 ‘거 아무개, 상석 밑에 숨겨놓은 그 책마저 불사르고 오소.’ 이 통에 깜짝 놀라 버리고 말았어요. 이것을 신통에서 천안통이라고 합니다. 보지 않고도 아는 천안.
그 다음 신통에 천이통이라 게 있어요. 듣지 않고도 먼 데 것을 아는. 저희 할머니가 귀가 얇아요. 그래가지고 저희 고향 동네에 보천교가 들어왔어요. 보천교가 들어와 뭐라고 했느냐 하면 ‘70원을 내면 자식이 도지사가 될 것이고, 50원을 내면 군수가 된다.‘ 하고 선전을 하고 다녔어요. 우리 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는 슬그머니 욕심이 나셔서 아들이 하나 밖에 없는데 그 아들이 도지사가 되고 군수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우리 어머니께 상의를 했어. ’얘야, 70원 내면 도지사가 되고 50원 내면 군수가 된다는데 우리 한번 해보자.‘ 하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생불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하는 통에 그것은 그냥 없었던 것으로 되었습니다만 이미 부안 봉래산에 계셨던 대종사님께서 그것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타원 최도화 선생님을 부르셔서 ’삼삼??이 쟤 큰일 났다, 빨리 가라 해서-삼삼??씨는 저희 할머니 이름이에요- 최도화 선생이 진안 마령까지 쏜살같이 달려왔어. 그리고 저희 어머니 보고 ‘이 집에 무슨 일 있지?’ 하시니까 어머니가 ‘시어머니에게 물어보세요.’ 하셨어요. 지금 같으면 누군가가 전화로 일러바쳤겠지 할 수도 있지, 누군가가 버스타고 달려가서 일러 바쳤겠지 할 수 도 있지만 그 때는 전화도 안 통하는 때고 버스도 안 통할 때입니다. 진안에서 부안 봉래산까지 가려면 중간 전주에서 하룻밤을 자야 되는, 걸어서 밖에 갈 수는 없는 그런 데를 누가 그 말씀을 여쭈러 달려갈 까닭이 없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150리 떨어진 그 먼 거리를 들으시지 않고서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음의 심통에는 타심통이라는 신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에요. 불법연구회 초창기에 전주 지부장, 지금은 교도회장이라고 합니다만 전주 지부장을 오래 사셨던 오두산 선생이 계셨어요. 이 양반이 불법연구회 입회하기 위해 총부에 왔어요. 그래서 하루저녁을 자는데 총부에 와서 가만히 보니까 간부 선생들이 전부 이름에 뫼 산자가 붙어 있어요. 일산 삼산...그래서 혼자 잠자리에 들어서 생각하기를 ‘나도 저 어른들의 제일 꼬리라도 따라가게 꼬리 미자, 미산이라고 이름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 때 그 양반은 법명이고 법호고 모르니까 그게 이름인 줄 아니까, ‘나도 꼬리라도 따라가게 미산이라고 법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근데 그 다음 날 법명이 나온 것을 보니까 머리 두자, 두산이라고 나왔어. 머리 두자 두산. 꼬리도 좋다고 했는데 머리 두자 두산이 되니까 어찌 좋던지 그걸 글로 썼습니다. 회보에 실었어요. 옛날 회보를 찾아보시면 어디선가 나올 거예요. 바로 아신 거예요. 본인을 안 봐도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 거예요.
다음에 숙명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숙명통이라는 것은 전생 일을 아는 거예요. 선진님 어머님 한 분이 언제나 하시는 말씀이 ‘나는 내생에 태어날 때에는 표를 하고 나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열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대종사님께서 그 장례식의 주례로 저희 선친을 보내셨습니다. 그 때 총부의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여러 분 계셨는데 그 가운데에서 제일 젊었던 우리 선친을 장례식에 보내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왔는데 머지않아 우리 어머니가 잉태를 하셨어. 그래서 애기를 낳았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우리 어머니를 부르시더니 ‘그 애기 몸에 무슨 표가 없더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우 발목에 옆으로 오 센티 세로 이 센티 정도의 검정 점이 있었어. 그렇게 말씀을 여쭈었더니, 대종사님께서는 아무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소문이 났어요. 소문이 나 가지고 제 아우가 그 선진님의 어머니 후신이다, 태어나신 것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 선진님이 마음속에 대단히 불만을 하셨어요. 자기 어머니가 고관대작 댁에 태어났다고 하셨으면 만족 하셨을 텐데 미미한 우리 집안에 태어났다고 하니 대단히 불만이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삼십 년 후에 저희 아우가 검사가 되니까 ‘우리 어머니가 시비가 밝으셨지.’ 하며 어머니 후신이 저희 아우라고 인정하셨어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숙명통, 영혼을 마음대로 부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대종사님이셨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음 신통에는 신족통이라고 있습니다. 하룻밤에 천리를 가는 그런 신통력이에요. 여기에 대해서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저 우리 아들이 직접 보고 듣고 한 말 외에는 말하지 말라고 하여 여기에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누진통이라고 있습니다. 누진통은 부처님이 되셔야 얻으실 수 있는 그러한 어른입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 신통력을 다 갖추신 어른이 대종사님이셨다.
<신통력에 관한 중요한 점>
그런데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다른 종교는 그 신통력 하나만 있어도 종교 하나를 만듭니다. 일본에 염사라고 하는 게 있어요. 사진 필름을 앞에다 두고 제일 첫 장에는 산을 짓고 강을 짓고 열심히 생각을 해. 그리고 현상을 하면 생각한 대로 필름에 나타나는 거예요. 염사, 생각한 것을 옮긴다는 거예요. 이래서 종교를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하고 대화를 한다고. 어떤 사람이 총부를 찾아왔어요. 그 사람도 종교를 하나 만든 사람인데, ‘우리 교에는 신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네 사람이 있습니다. 귀 교에는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일본사람이라 제가 그 때 통역을 하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할 줄을 모르겠어. 그랬더니 원광대학교 총장님이셨던 숭산 총장님께서 ‘우리는 그러한 신통력이 나타나도 발표를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신통력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러셨어. 대종사님께서는 ‘그러한 신통력에 빠져버리면 점쟁이밖에는 못 된다. 대각한다고 수련을 쌓아 나가는 도중에 간간히 그런 신통력이 나타날 수 있는데 거기에 빠져 버리면 점쟁이밖에는 못된다. 그러니 절대로 거기에 팔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를 하셨습니다. 신통을 완전히 갖추신 대종사님께서 제자들에게 절대로 신통력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를 하셨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도 ‘신통력은 말변지사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변지사, 제일 끄트머리 하찮은 것. ‘신통력은 정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팔려서는 안 되는 제일 끄트머리, 그런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절대로 신통력을 세우지 않습니다.
옛날에 양도신 종사님이 계셨어요. 이 분이 식사를 하시다가 이빨 사이에 뭐가 툭 떨어졌어요. 봤더니 구슬이에요. 사리였어요. 사리가 떨어지셨어요. 아마 다른 종교 같으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자랑하고 했을 테지만 원불교는 싹 감춰버리고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없어요. 신통력은 우리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혹 나타날 수 있어도 그것은 하찮은 일이다. 거기에 빠지지 말라. 대각을 해도 신통력이 나타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대각을 하면 누구나 신통을 하는 게 아니고 대각을 하셨어도 신통력이 나타나지 않는 어른이 있고, 대각을 못 했어도 신통력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통이 부처님 되는 데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대종사님, 열반하시다>
대종사님께서 원기 28년 5월 15일 법회를 보시고 병환이 나셨습니다. 그래서 이리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저는 5월 30일에 대종사님을 가서 찾아뵈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방바닥에 손을 짚고 계셨습니다. 천식을 앓고 계셨기 때문에 숨이 가쁘셔서 방바닥에 손을 짚고 계셨습니다. 제가 갔더니 곁에 모시고 앉았던 와카쓰기라는 주치의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였고 저는 인사를 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6월 초하룻날 교장이 시내를 다녀오더니 ‘불법연구회 대장이 돌아가셨다.’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5월 30일 날 뵐 때에도 대종사님께서 열반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저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총부에 달려갔더니 총부에서는 부인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고, 저는 바로 조실로 갔더니 조실에서는 단을 높이 해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김영호 선생님이 대종사님 면도를 해드리고 계셨습니다. 김영호 선생님은 그 면도한 것을 품에 오래도록 품고 다니셨어요. 그 자리에서 정산종사님을 후계 종법사님으로 모시기로 결의를 하고 일동이 다 일어서서 큰절을 올리시고 계셨습니다. 6월 8일 날 발인을 할 때에 총부에 경찰이 쫙 깔렸어. 불법연구회 종법사님이 열반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폭동이 일어난다 하여 경찰을 풀어놓고 있었어요. 저도 제 반 학생을 데리고 대각전을 찾았어요. 그래서 통로에 일렬로 세워가지고 경례를 시켰는데 거기 형사들이 쫓아와서 막 쫓아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원대 후문에 이열 횡대로 세워 가지고 떠나시는 것이나 뵙게 하려고 세워 놨더니 거기 까지 쫓아 와서 막 쫓아버렸어요. 그리고 교역자 3백 명만 모시고 가라 하였어요. 그 때 대각전 주위에는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꽉 차 있었는데, ‘그것 다 소용 없고 교역자 삼백 명만 둬라.’ 어떤 사람은 그래도 섭섭해서 멀리 논두렁길로 따라가다가 거기까지 형사가 쫓아 와서 그 때 한창 모내기 때라 남의 집 모내기 하는 데다 집어 넣어가지고 하루 동안 남의 집 모 심어주고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몸이 부대하셨어요. 그래서 화장으로 모셨는데 화구에 관이 들어가지 않아 관을 버리고 화구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6월 1일에 열반하셔서 6월 8일에 장례를 모셨는데 그 때가 6월 달이야. 그 더운 때에 관에는 습기가 없었다는 겁니다. 습기가 없었어. 그 관 판자 갖다가 다른 데 사용하고 그랬어요.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질 테니 그러면 불법연구회 간판 떼어 버리자 하고 노리고 있었는데 후계 종법사님 들어서고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니 무서운 교단이다 하고 탄복하였다고 그래요. 대종사님께서 열반하시니까 여러 군데에서 평이 나왔어요. 치료를 맡았던 와카쓰기 박사는 ‘나는 대종사님이 부처님이신지 아니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 사업가이신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전주에 일본 육군소장이 병사부 사령관으로 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총부에 와서 대종사님을 뵙고 가면서 ‘저런 어른이 내지에 나셨으면-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는 내지라고 하고 조선, 대만은 외지라고 했어요- 일본에 나셨으면 틀림없이 내각 총리대신이 되셨을 것이다.’ 그 위에는 천황이에요. 만약에 천황이 되었다고 하면 자기 목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는 말을 못하고 자기 딴에는 최고로 높다고 생각하는 내각총리대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안도산 선생님께서는 총부에 와서 대종사님을 찾아뵙고 ‘저는 민족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동지들만 많은 희생을 시키고 실제 성과도 별로 내지 못하고 그랬는데 선생님께서는 동지들 희생도 안 시키고 많은 성과를 내고 계십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평이 다 달랐습니다만 그 것을 다 모아 놓은 것이 대종사님이시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어 코를 만진 사람은 굴뚝같이 생겼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같이 생겼다, 배를 만진 사람은 바람벽 같이 생겼다 했는데 그것을 다 모아 놓아야 코끼리가 되듯이 대종사님을 자기 입장에서 평을 하셨지만 그것을 다 모아 놓으면 대종사님이 되신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대종사님께서 열반하신지 72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운은 대 도약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종사님의 성지를 우리 모두 실천하여 하루빨리 대업을 성취하시고 교운을 드러내시길 간절히 기원하고 부탁드리면서 제 말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