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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조국 전쟁 제3기의 야간 작전(下)
1945년 비슬라-오데르 작전과 동프로이센 작전에서 소련군은 다시 제2 제대 사단과 연대를 높은 템포로 야간에 투입시켰고 증강된 선견대의 야간 공격을 재현했다. 이 시기, 소련군 야간 작전은 시대가 되었다. 소련군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부대를 특별히 훈련시켰다.
동프로이센 공세를 준비하며 각 소총병 사단들은 3개 대대에게 요새 지대 공략을 훈련시켰고, 2개 대대는 추격 작전을, 3개 대대는 야간 작전을, 그리고 1개 대대는 기동 작전을 훈련시켰다. 훈련의 반은 야간에 실시되었다. 제29군 소속 제5 근위 소총병 군단의 제2 제대 사단들은 야간 연대를 운용했다.1월 중순의 성공적인 밤에 제17 소총병 사단과 제19 근위 소총병 사단이 특별히 훈련받은 제2 제대로서 본대의 진격로를 열었다.
야간 추격 작전에는 진격 부대로서 강화된 소총병 대대가 운용되었다. 예를 들어 1월 16일 밤, 제65군의 진격 부대는 독일군의 저항을 극복하고 6~10Km의 독립된 축선들을 파고 들어갔다. 수색 측방 방호(소련군은 언제나 이걸 고려한다.) 그리고 재보급을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잡혔다.1
소련군은 비슬라-오데르 작전에서 선견대를 추격 작전에 활용했다. 적설한 예로는 1월 16일 밤에 제1 근위 전차군 제9 근위 전차 군단 소속 선견대가 그로젝 마을을 점령한 것이다 2300시, 소련군은 소차체프를 향한 최초의 공세로 독일군을 바르샤바 서쪽으로 쫓아 버렸다.2
작전은 주로 야간에 실시되었고 이 선견대는 이후 90Km를 진격했다. 두 번째 사례는 1월 29~30일 밤에 제11 근위 전차 군단의 선견대인 제44 전차 여단이 메세리츠 요새 지대에 구멍을 내버린 것이다. 이 작전은 무척 중요한데 제1 근위 전차군의 선봉인 제44 전차 여단장이 선두로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1 근위 전차군 사령관 미하일 카투코프 상장은 메세리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략) 도시는 철근 콘크리트와 강철로 덮여 있고 지하철, 공장, 그리고 발전소가 있다. 1개 야전군 전체가 도시에 도사리고 있었다. 지상의 접근로는 대전차 방어물로 막혀 있었다.
12개의 낮은 돔 형태의 벙커에 대전차포와 기관총에 삐죽 나와 있었다.
근처의 호수는 댐으로 형성된 것으로 독일군은 필요하면 댐을 방류시킬 수 있었다."3
어둠과 독일 감시병의 부족을 이점으로 삼기 위해, 과감한 지휘관으로 소문난 여단장 구사콥스키 대령은 전투 공병들에게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공병들은 손전등을 사용해 소련 전차들을 인도했다. 독일군이 전차 소리를 듣고 불규칙하게 야포와 박격포를 쏘았지만, 너무 늦었다. 소련 전차병들은 포를 쏴대고 적을 깔아뭉개며 0300시까지 독일군을 일소했다. 여단은 전차 손실 없이 "돌파 불가능 지역"을 돌파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매복해 있다가 후속 부대와 합류해 계속 진격했다. 비슬라-오데르 작전의 성공은 소련군과 공산 폴란드군에 23일간 310마일 진격을 안겨 주었고 하루 당 평균 12~14 마일 진격을 가능하게 했다. 심각한 인력 손실도 없었다.4
베를린 전투는 많은 부분에서 소련 야간 공세 기술 성과의 정점이었다. 우리가 보게 될 만주에서의 성공은 베를린의 확장판이었다. 소련군 지휘관들은 베를린 작전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련군은 2월에도 베를린을 공략할 수 있었지만, 주코프 원수는 그의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재보급을 받지 않고 적을 완전히 압도하기 전에는 베를린 공략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5
주코프는 전선군 정면의 야간 공격을 대담하게 계획했으며 140개의 서치라이트로 독일 방어점을 비추러 했다.6 공격 전에 소련군은 적군 방어서놔 포대에 대한 광범위한 정찰과 정찰을 통한 정보를 통해 도상 연습을 계속했다. 중대급 이하 부대는 사전에 준비된 적 방어 지점을 그린 간단한 그림을 받았다.7
소련군은 장교나 장교가 아닌 중대 지휘관에게 나침반을 사용하과 인접한 부대와 교신할 다양한 신호 수단을 사용하는 걸 훈련시켰다. 계획에는 특별 안내병들이 각각의 전차나 자주포에 붙어 있는 것과 적 포대와 종심 깊은 목표를 때리는 항공 지원도 포함하고 있었다.8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돌파는 베를린에서 64Km 떨어져 있는 퀴스트린 교두보에서 시작되었다. 그 동안 코네프 원수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더 남쪽 나이세에서 독일 중부 집단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네프는 주코프가 동쪽에서 베를린을 향해 접근하는 동안 베를린 공격 준비도 명령했다. 주코프와는 달리 코네프는 서치라이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코네프는 나이세 강을 완전한 어둠 속에서 건너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코네프는 2시간 25분의 준비 포격을 명령하여 도하 작전을 숨기려 했고 390Km 정면에 항공기를 통한 대규모 연막 살포를 명령해서 적이 소련군의 움직임을 관찰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9
역사학자들이 "붉은 군대가 실행한 가장 정교한 작전"10이라 부른 베를린 작전은 엄청난 준비 포격과 함께 시작되었다. 주코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오데르 강둑에 거대한 공격 병력을 집결시켰다. 포탄 보급은 폭풍이 몰아칠 첫 날에 수백발의 포격을 퍼부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독일군 방어를 즉시 무력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강력한 서치라이트를 쏟아붇기로 했다. 마침내 4월 16일 밤이 왔다. 누구도 잘 수 없었다. 공격 시간 30분 전 우리는 지휘소에서 나와 관측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오데르 강둑에 낀 4월의 안개를 아직도 기억한다. 오전 5:00시, (베를린 표준시는 03:00시), 공세가 시작되었다. 카츄샤가 불을 뿜었고 20,000문이 넘는 야포가 포문을 열었고
수백기의 공격기가 머리 위에서 으르렁거렸다. 폭격과 포격이 30분만에 끝나자,
140개의 서치라이트가 정면 650피트를 비추었다. 빛의 바다가 전장에서 일렁였고
적을 눈 멀게 했으며 전차와 보병의 목표물을 비췄다."11
고르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의 바익셀 집단군은 그날 밤에 첫 번째 방어선에서 후퇴했다. 그 덕에 소련군은 첫 1시간 동안 비교적 적은 저항만 상대할 수 있었다. 병력들은 0320시에 이중 화망 뒤에서(첫 2Km) 단일 화망을 뒤따라 진격했다. 밝은 서치라이트와 포화가 어둠을 찢었다. 서치라이트의 사용이 전투 전의 도상 연습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추이코프는 전후 몇년 후 저작에서 이 공격이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추이코프는 기간적으로 서치라이트를 끄고 키는 것은 소련군 스스로를 시시각각 장님으로 만들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추이코프는 전장의 안개, 연기 먼지로 가득한 미로가 되어(주코프는 이로 인한 시야 차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서치라이트의 효과를 150~200m 까지 낮추었다. 어떤 경우든 차량들과 병력들은 오데르 강의 지류와 베를린 운하들로 진격이 정체되었고 보전포 협동이 깨져 버렸다. 추이코프는 오후에 제8 근위군이 잘 방어된 젤로 고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다는 사실을 알자 주코프에게 비난받아야 했다.
그러자 주코프는 추이코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시 제1 근위 전차군을 투입시켰다. 이 조치는 소련군이 의지하는 도로를 정체 상태로 만들었다. (지뢰가 밀도 있게 매설되고 수로로 둘러싸인 지역의 대규모 기동은 비실용적이었다.) 작전의 첫 번째 밤, 소련군은 거의 4Km 진격했고 그나마도 독일군의 반격에 멈춰 버렸다. 소련군이 독일군의 2차 방어선의 일부를 오후 전에 뚫었지만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은 다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오직 느린 진격밖에 하지 못했다.12
더 남쪽에서, 코네프의 전선군은 첫째 날 연막 덕에 13Km를 진격했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알리지 않고서 4월 17일에 코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전차군을 베를린으로 돌리는 것을 승인했다. 제3 근위 전차군은 4월 17~18일 밤에 슈프레를 공격했고 4월 20~21일 밤에는 베를린 남쪽으로 진입했다. 다음 날, 주코프의 3개 야전군은 도시 교외에 진입했다. 4월 2일에 치열한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25일에 도시에 대한 포위가 끝나자, 성공적인 종심 돌파는 시간 문제가 되었다. 주코프는 도시의 축소 모형을 만들게 해 참모진과 병사들을 교육시켰다. 추이코프와 같은 지휘관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경험이 있었고 더 가까이에는 포즈난의 경험이 있었다.13
병력, 대포, 전차, 자주포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중요한 도시 시설, 주요한 특화점이나 운하 도하점을 공격하는 데 야습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소련군은 모든 교전 전에 정찰을 하는 걸 포함한 방법을 사용했다. 제3 충격군 사령관 쿠즈네초프 상장은 성공적인 중대급, 소대급 야간 공격의 성공을 관찰했다. 폭격과 포격이 모든 공격 전에 일어났고 방사포, 화염방사기, 야포들이 모든 소총병들에게 증강되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저항은 5월 2일에 끝났다.14
소련군의 베를린 공략은 쌍방간의 높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베를린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탁월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전술적 측면에서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작전이 야전요무령-44에서 묘사하고 이전 작전에서도 나온 기밀 유지를 위한 은엄폐가 제데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15 게다가 32개 대대 병력인 소련군 수색 대대들은 14일 0740시에 활동을 개시했지만 공세를 이끌 정도의 활약을 하거나 적이 주공 시간을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일으키는 데 트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은 만주에서 이 실수들을 시정해 유럽의 구릉지에서 겪었던 문제를 겪지 않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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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주코프는 불빛이 기습효과를 높여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지요. 실제 소련군은 철저한 어둠 속에서 작전하는 걸 더 선호했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논문 맞습니다.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논문이에요.
아, 그런가요? 주코프가 워낙 소련군의 대표적인 장군으로 인식되어서 저 작전이 소련군의 전형적인 모습인 줄 알앗는데 아니었군요.
이쯤되면 독일군의 절박함이란.....대조국전쟁 초기의 분전하던 소련군의 그것 이상이죠-_-;;; 리차드 오버리의 책에도 서치라이트 작전은 별로 신통치 않았고, 젤로프 고지를 향한 진군은 꾸물꾸물 느리기만 했다고 설명하더군요
서치라이트 문제 및 젤로 돌파 문제 때문에 60년대에 주코프와 추이코프가 군사사 저널을 통해 대판 쌈박질을 벌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