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의 삶 .... 할 일이 있다는 것!
내가 육사에 다닐 때 나를 잘 아는 고향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육사가 네 적성에 안 맞잖아?” 내 대답은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내가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 후 보안부대로 갔을 때, 생도 때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이 내게 물었다. “보안부대가 네 체질에 안 맞잖아?” 그때도 내 대답은 “거기도 사람 곳이야.” 내 적성에 안 맞을거라던 사관학교에서의 생도생활도 잘 보냈고, 체질에 안 맞을거라던 보안부대에서 중위 때부터 시작해서 그곳에서 전역까지 했으니, 잘 살은 것 아닌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이 곁에서 보는 것이 100%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안 어울릴 것 같다는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지금 돌아보아도 아이러니 그 자체다.
1976년에 임관해서 2005년 말에 전역했으니 꼭 30년 군대생활을 했다.
50대에 접어들자마자 전역을 했으니 군인의 직업수명이 참 짧기는 짧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복을 입고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생활, 어느 날 갑작스레 닥친 전역, 전역 후 초기엔 참 막막했다. 불러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언제까지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영원히 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드니 참 답답했다. 할 일이 없다는 것....
그래도 군인으로 30년 세월 잘 살았으니 우선은 좀 쉬고 보자. 그 동안 못 다녔던 해외여행도 가고....
다행히 국대원 다닐 때 만났던 공군 선배께서 나를 귀엽게 봤던 터라 그분 도움으로 대기업에 ‘비상근’고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말에 계약서를 쓰면 1년 더 근무하는 거고, 계약서 쓰자는 말이 없으면 그만 두는 아, 이런 것이 ‘계약직’이라는거구나 하는 것을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다. 내가 회사 일을 하고는 있지만, 내 회사라는 생각이 그렇게 크게 들지 않는, 그렇다고 맡은 일을 대충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전역 후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 내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다름 아닌,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 말이다.
내가 육사에 가기 전, 대학진학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자라온 과정을 잘 아는 분들이 내게 신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결국 내가 군인의 길을 택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전역 후 언젠가는 신학 공부를 하게 될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해 왔는데, 그 생각이 떠올랐던 거다.
비상근이니 그리 시간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회사 직책에 무슨 큰 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낮에는 주어진 일 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방배동에 있는 신학교의 ‘목회학석사 과정’ 야간에 도전했다.
낮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모 대학에서 야간대학원 겸임교수로 일하면서, 뒤늦게 신학공부까지 시작했으니....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절이다.
뒤늦게 시작한 신학공부가 무슨 큰 목표를 설정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역할 곳을 찾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목회학석사 3년 과정 중 5학기 때부터 서부전선에 있는 모 대대의 교회를 맡아 전도사 신분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군선교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 하던 겸임교수직도 그만 뒀고, 대기업 고문 일도 정리했다.
현역 때 말단 부대에서 근무를 해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인지 부대 적응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왜 그리 대대장 중대장이 높아 보이고, 위병근무자가 높아 보이는지.... 현역시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지위, 신분을 다 내려놓고 가장 낮은 위치로 내려가 목회를 시작했다. 내 자식보다도 10년은 더 어린 신우들과 인생을 논하기도 하고 신앙을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군선교사로 사역을 하면서 누군가의 권면으로 예비군 안보강사로, 민방위 인문학강사 일까지 했으니 적절하게 바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공적인 일은 만65세로 제한되어 있다. 군선교사 일도, 예비군 안보강의도, 민방위 인문학강의도 65세가 되니 끝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예기치 않은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니 모든 일상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늦잠 자는 것이 일상화되어가고, 겨우 하는 일이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으면 시내에 나갔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1년을 살아보니 점점 무기력해지고 무능력해지고....
아,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런 지는 잘 모르지만, 그 시간들을 이렇게 보낸다면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할 일이 없이 산다는 것, 그것도 기약 없이 산다는 것....
아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공부든 노동이든 무엇이든 간에....
누군가가 요양보호사 공부를 해 보라는 권면을 했다. 지금 나이에 요양보호사 일을 직접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공부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꺼라면서. 가 보지 않은 고용복지센타에 가서 내일배움카드도 만들고, 요양교육원에 가서 240시간 교육도 받고, 국가고시(?)인 요양보호사 자격증 시험도 봤다. 나이 들어가면서 앞으로 닥쳐야 하는 삶에 요양보호사 교육은 꽤나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것으로 족할 줄 알았던 것이 자격증을 따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 자격증 가지고 하루 몇 시간이라도 봉사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를 않았다. 몇 차례 일할 곳이 생겨 연락을 하면 꼭 마지막에 걸리는 것이 ‘나이가 많으셔서’.... 어디를 가나 나이의 설움을 당하는 상황이니 아쉬움이 컸다. 하긴 내가 필요해 요양보호사를 쓴다 하더라도 같은 값이면 젊은 사람, 같은 값이면 여자를 쓸테니 나 같은 나이 든 남자는?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집 근처에 있는 주야간보호센타에서 오전만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요즘은 게을러졌던 생활을 추스리면서 6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잔다.
물론 흐트러졌던 생활을 바로 잡는데 어찌 불편함이 어찌 없으랴만, 그래도 할 일이 있어서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생활이 좋다. 물론 이 생활을 앞으로 얼마나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이제 나이 70이다. 주변에는 아직도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참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늘 부러워만 하며 살 수 있는 시간도 우리들에겐 별로 없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뒷받침 되지 않는 100세 시대는 재앙이다. 물론 마음먹는다고 해서 건강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가 노력은 해야 한다.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공부든 노동이든 가족 돌봄이든 손자손녀 돌봄이든....
할 일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최고의 행복이다.
첫댓글 스파씨바.즈드라스브이쩨.오친하라쇼!!
글 아조 잘 쓰셨네요,
그렇게 사시는구나.
대단한 결심과 실천에 경의를 표 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님의 뒤를 따르렵니다.
사회복지사 이광영하고 똑~같네여.
평택 출신 둘이서 짯나?
더스비다니야.
멋진 삶을 사시는 최목사님을 사랑합니다!
인생을 짜임새있게 계획하고 실천하고 사시네요 동네가 가까우니 가끔 커피나 마시면서 쉬어감이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