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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절 (1)
하늘에 오르사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엡4:9-10)
본문 : 행1:9-11; 엡4:9-10
서론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아마 ‘어린이 주일’이라고 대답할려고 했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오늘을 어린이 주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세계적으로 ‘승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다같이 한번 따라해 볼까요? 승천주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을 성탄주일로 지키고, 부활하신 날을 부활주일로 지키는 것처럼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사실, 교회가 지키는 모든 날은 오직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많은 날 중에 ‘일요일’을 지키는 것도, 그저 일요일이 세상이 정해 놓은 쉬는 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것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처럼 일요일이 쉬는 날이 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다보니까 역사가 오래 흘러서 이 날이 쉬는 날이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불과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공휴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일요일이 쉬는 날이 아니고, 수요일이 쉬는 날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느 날에 예배드려야 할까요? 수요일이 쉬는 날이니까 수요일에 예배드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비록 일요일이 쉬는 날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라에서 공휴일을 일요일에서 수요일로 바꾸더라도 우리는 일요일에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이 바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한국교회에 언젠부턴가 족보에도 없는 어린이 주일이라는 것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어버이 주일이라는 것도 들어왔습니다. 소파 방정환이 정한 어린이 날, 나라에서 정한 어버이날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주일’이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날’이라는 말이 담겨 있는데 그 앞에 어린이 혹은 어버이 혹은 스승 이라는 단어가 붙어서 영 어색해 졌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의미가 약화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승천주일이고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인데,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없는 주일은 주일이 아닙니다. 경찰관주일, 소방관주일, 공무원주일, 할머니 주일, 할아버지 주일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주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성장해서 이런 것들도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주일’입니다. 이 주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주일을 제가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아시길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어떤 날도 ‘주일’보다 더 강조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주일에 성탄이 있고, 주일에 고난이 있으며, 주일에 부활이 있습니다. 주일에 맥추감사가 있고, 주일에 추수감사가 있습니다. 매주일이 성탄이요, 고난이요, 부활이며, 추수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상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졌던 청교도들은 주일성수에 매우 철저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절기 자체를 크게 강조하지 않지만, 만약 굳이 절기를 넣어야 한다면 저는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대신에 승천절과 성령강림절을 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바로 우리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의 사역과 직접적으로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만인 오순절(오순이라는 말은 50이라는 말입니다)에 성령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23일이 부활절이었는데 계산을 해 보시면 맞게 떨어질 것입니다.1) 그리고 오늘은 승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3일만에 부활하시고 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여러번 나타나셨다가, 부활이 지난 40일째2)에 승천하셨습니다. 3월 23일을 기준으로 계산을 해 보시면 5월 1일(목)이 승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승천’(昇天) 글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심입니다. 그동안 해오던 결혼시리즈를 잠시 멈추고, 특별히 오늘은 승천의 때를 맞아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증거하려고 합니다.
본론
잊혀지기 쉬운 고백
우리는 매 주일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사”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 정도는 아는지 몰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 정도는 아는지 몰라도 그가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말은 하지만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은 정말로 중요합니다.3) 예수님의 성탄을 믿고, 죽으심을 믿고, 부활하심을 믿는다면 또한 승천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주일예배 때 마다 의미없이 읖조리는 구절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하고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땅에서 찾을 수 없는 몸
우리가 “하늘에 오르사”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고 나면 그 몸이 썩어서 그 몸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고 끝나시지 않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몸이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셔서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서 찾았다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몸이 이 땅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승천의 이유
그렇다면 여러분 왜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을까요? 그냥 부활하셨으니 계속해서 이 땅에서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시고 기적도 베푸시고 한다면 좋을 텐데 왜 예수님은 올라가셨을까요? 사도행전 1장 9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올리워 가셨다고 되어 있고, 에베소서 4장 9-10절에는 올라가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올라가신 것은 직접 올라가신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데리고 가셨다는 것을 말하는데 왜 예수님은 직접 올라가셨고,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그냥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고 땅에 계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몸이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사도들처럼 우리도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을 텐데(요일1:1) 왜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셨을까요? 분명히 십자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으면서, 왜 그것으로 다 끝내지 않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을까요?4)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원래 소속이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요6:62). 원래의 소속이 하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것입니다.5)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서 내려와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니6) 우리보다 앞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히6:20).7) 즉 우리를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히11:16).8) 먼저 올라가셔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요14:2-3).9)
적용을 위한 질문
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하는 부분은 이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에게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시다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10)
승천하신 예수님이 남겨두신 몸 - 교회
맞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있습니다.11) 그러나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것은 바로 땅에 있는 그의 몸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있지만 또한 땅에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을 다함께 찾아볼까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모인 공동체인 교회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늘에 있지만 땅에 있는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여 있으므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소망합니다. 작년에 성령님 시리즈를 하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한 것과 이것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면, 교회에 속하지 않고 나 혼자서 집에서 생활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몸과 떨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산다고 한다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있지만, 진정한 의미로서의 우리의 몸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는 말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이 땅에서 드러내는 기관으로서 바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4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예수님과 그의 승천과 그의 교회를 연관지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바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육체라고 하는 제한된 곳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 모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시고 대신 곳곳에 당신의 교회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로 말미암아 만물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승천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고, 교회 없이 승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 올라갔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그의 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도대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디에 있느냐?”.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이 땅에 빈 자리를 남겨두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음은 이 땅에 빈 공간을 두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을 자신의 몸으로 충만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 10절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그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또 다른 몸인 교회를 이 세상 곳곳에 남겨두심으로 오히려 자신의 몸을 이 땅에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 몸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입니다.
여러분, 각각의 존재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이 땅에서 드러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몸은 어디 있느뇨? 라는 불신자들의 질문 앞에, “그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또한 바로 여기에 있노라”라고 대답해야 할 책임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남겨두신 몸 - 성찬
또 하나,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이 땅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하게 될 “성찬”입니다. 성찬은 곧 하늘에 계신 몸을 땅에서 체험하는 예식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 몸을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체험하는 예식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함께 기억하는 예식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죽기만 하셨다면 성찬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이 없는데 어떻게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겠습니까? 그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 성찬을 하면서 눈물만 흘리는 것은 성찬의 의미를 절반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의 죽으심과 함께 그의 부활과 승천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하늘에 계신 그분의 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썩어없어진 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의 몸을 말입니다. 승천하신 그 분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12) 우리에게 신령한 떡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요6:33,51,58).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4장 9-10절 말씀처럼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반대로 거기서 내려오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13) 그러므로 그의 몸은 이 땅에 내려오신 몸이요, 동시에 하늘로 올라가신 몸입니다.
우리는 그 몸을 생각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는 그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식사시간에 먹는 떡이나 세상 사람들이 마시는 포도주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그 몸을 생각하면서 먹고 마실 때에 떡과 포도주는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몸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없지만,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은 분명 썩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니, 곧 그의 몸인 교회가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보다 풍성해지고, 보다 값진 의미가 나타납니다.
오늘 성찬을 행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오르사”라는 사도신경의 풍성한 의미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늘에서 그 몸을 먹고 마시는 날을 고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과 믿음없이 행하는 성찬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성찬과 함께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함께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 땅 위에 신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14)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의 몸인 교회가 다함께 그의 몸을 먹음으로 그 분의 임재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뿐 아니라 주님의 승천하심을 기억하는 이 날, 주일에 다함께 성찬에 참여함으로 교회와 성찬 가운데 충만하시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을 경험하면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입시다. 어린이도 높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버이, 스승도 높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높음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토록 높임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오직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이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이 땅에서 누리는 자들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여러분들의 몸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십시오. 아담이 하와를 가리켜 한 말처럼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야 말로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6문). 제가 성찬이 곧 결혼과 관련있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가 결혼이라면 성찬은 합방입니다. 세례가 결혼식이라면 성찬은 피로연입니다. 혼인잔치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친히 혼인잔치의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신부로 예비되어 함께 혼인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째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냥 올라가신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 올라가심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들을 교회를 통하여, 성찬을 통하여 누리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이 몸의 권위는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땅을 밟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교회에 속함으로, 성찬을 먹음으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사실이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되려고 한다면,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단순히 성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이 참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0문). 그렇지 않다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 사도신경에 기록된 하나의 죽은 글귀가 되고 말 것입니다.15)
우리가 매주일 “하늘에 오르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깊은 의미를 기억합시다. 하늘에 올라가셨지만, 여전히 땅에 계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하늘에 올라신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억합시다. 하늘에 계신 몸이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삽시다. 하늘에 계시지만 땅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으신 예수님처럼 삽시다.16)
예수님께서는 비록 하늘에 올라가셨지만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오히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보다 더 풍성하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셨음은 우리를 이 땅에 홀로 남겨두시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에게 더 좋은 것(for our good)으로 채우시기 위함입니다(요16:6-7).17)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행1:11).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그분의 몸과 땅에 있는 우리의 몸이 완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빌3:21).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아멘.
참고할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46-49문답
대요리문답 53-55문답
찬송가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
찬양 “주의 이름 높이며 주를 기뻐하나이다”
1) 계산할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계산해서는 안된다. 부활한 날을 포함해서 계산을 해야 한다. 이것은 유대인의 날짜 계산 방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나가 뱃속에 있었던 3일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셨던 3일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 놓은 다음을 참조하라.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PNTC) (Grand Rapids: Eerdmans, 1992), 325-6. Herman Ridderbos, 380. (2008년 4월 6일 설교 참조)
2) 왜 40일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이승구, 사도신경 (서울: SFC, 2004), 239; David J. Williams, Acts,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Peabody, Mass.: Hendrickson, 1990), 20. 성경이 말하는 40일을 잘못 적용하는 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김헌수, “사순절과 오순절” <성약출판소식> 제64호, (서울: 성약출판사, 2008년 4월), p.2
3) 재미있게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부분(Q45)보다 그의 승천에 관한 부분(Q46-49)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파와 칼빈파의 예수님의 위격과 관련한 논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Fred H. Klooster, A Might Comfort: The Christian Faith according to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1990), 이승구 역,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서울: 토라, 2004 개정역), 102. 이와 관련해 자세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Fred H. Klooster, Our Only Comfort: A Comprehensive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vol 1,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2001), 592-5.
4) George W. Bethune, Guilt, Grace and Gratitude: Lecture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vol 1. reprint, (Carlisle: The Banner of Trust Truth, 2001), 453-454.
5) George W. Bethune, 453-454.
6) 기독교강요, 2권 16장 14절.
7) (히브리서 6장 20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8) 허순길, “주의 영광스런 승천”(시68:18), 『교회절기설교』(서울: CLC, 1996), 167. George W. Bethune, 463-4.
9) (요한복음 14장 2-3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0) 이러한 연결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문답에서 47문답으로 이어지는 연결성과 관련되어 있다. Fred H. Klooster,『하나님의 강력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 102-103.
11) 이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8문답에 대한 Klooster의 해석을 참고하라. Fred H. Klooster,『하나님의 강력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 106.
12) 허순길, 상게서, 192.
13) 허순길, “그리스도의 승천과 교회의 유익”(엡4:9-10), 『교회절기설교』(서울: CLC, 1996), 191.
14) 이에 대해서 루터파의 공재설의 위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Fred H. Klooster,『하나님의 강력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 106. 이 설교는 예수님의 인성의 편재성(Ubiquity)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의 편재성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에 있어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7,48문답은 이 ‘편재성’(Ubiquity)문제를 잘 다루고 있다. Fred H. Klooster, Our Only Comfort: A Comprehensive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vol 1,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2001), 595.
15) Fred H. Klooster, ibid, 600.
16) 송영목 목사, “주님 승천, 나의 승천”(시24:7-10; 계20:1-10), 대학교회 2008년 4월 30일 수요기도회 설교.
17) Fred H. Klooster, ibid, 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