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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새기고픈 글 란에 유산님이 올리신 자료 입니다.
無題 - 張顯光
大道難迴世路分。大道는 굽어지기 어려운데 세상 길은 나누어지네....
此身端合臥山雲。이 몸은 그 끝을 모아 산의 구름 속에 누우니..
人是人非摠不聞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인지 모두 들리지 않는다........
장현광 (백과사전에서 펌)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 1576년(선조 9)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예빈시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부임했다가 사직을 청한 뒤 관찰사의 허가없이 귀향, 직무유기로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 《주역》 교정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사헌부지평·장령·집의·공조참의·대사헌·공조참판·지중추부사 등 전후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뒤 부름을 받아 왕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어 군왕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다음해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 년 후에 죽었다.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한 것이라고 논하였으며, 또한 이기설(理氣設)에서는 이이(李珥)의 설에 찬동하여 이(理)와 기(氣)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고 하여 경(經)과 위(緯)로 나누어 설명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중국 명(明)나라 나흠순(羅欽順)과 이이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가운데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경향을 보였다. 성주(星州)의 천곡서원(川谷書院), 구미(龜尾)의 여헌영당(旅軒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여헌집(11권)》 《속집(5권)》 《성리설(性理說, 6권)》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 등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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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보고 갑니다. 수고 많아요.![파이팅](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6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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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우리 시댁에 시조 이시네요 어머나 문화원 책자에 있더만 눈이 아려서 어떻게 보고 올리셨나요![박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23.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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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