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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식민사관(植民史觀) 형성의 배경
저네들은 우리나라를 합병하던 1910년의 50여 년 전부터 이미 치밀하게 계획하고 쳐들어올 침략을 획책하였다. 시간은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함정의 함포사격 2발로 촉발된 화친조약으로 일방적인 미국의 요구로 이루어진 조약이었다. 일 년 동안 교역을 한 결과, 일본의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본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 때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이란 사무라이가 2년간 숙고 끝에 일본의 장래에 대한 대안을 떠올렸다. 그의 구도는 성주를 중심으로 살아 온 지방분권체계 곧 다이묘〔大名〕들을 통합하여 일본의 힘을 중앙집권적인 천황제(天皇制)를 실시하고 힘을 길러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었다. 이와 동시에 폐번치현(廢藩置縣)이라는 극약처방이라는 안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금, 은이며 산물을 빼앗아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일본의 적자를 해결해보자는 구도였다. 정한론의 첫 과제로는 조선정복으로 자국의 적자를 메운다. 다음으로 만주정벌에서 이익을 얻고 마지막으로는 대만과 여송도(呂宋島, 필리핀)까지 정벌해서 대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도이니 말하자면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꿈이었다. 실은 저들만의 잔치인 것을 누구나 잘 알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구의 열강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일본장래를 위한 교육의 공간을 세우고자 했다. 이어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은 1856년 쇼오까촌숙(松下村塾)이란 학교를 세워 어린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요시다는, 당시 장군후계자 지명을 할 때, 지방의 다이묘들이 싫어하는 천황제를 추구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실권을 잡은 권력자의 눈에는 쇼인의 정책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뒤흔드는 반동이니 눈에 가시일 수밖에. 학교는 사라졌고 스승이 사형 당하자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이와꾸라도모미(岩倉具視)는 가장 나이어린 17세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시켜 남모르게 스승의 주검을 파묻게 했다. 이어 제자들은 스승의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혈맹(血盟)을 하고 흩어진 뒤 일본 전역에 지하당을 조직하였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868년 1월 이와꾸라도모미 외 쇼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침내 배추장사로 연명하던 황족 출신의 명치(明治)를 내세워 천황으로 삼고 왕정을 복고시켰다. 말하자면 다이묘 시대를 마감하였다. 근대 일본의 새로운 체제의 정권이요, 명치유신이었다. 그 다음해 1869년에 기또다카요시(木戸孝允)가 각료로 취임하자 각의(閣議)에서 정한론을 정식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정한론은 공공연한 국책과제로 떠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방하거나 문서를 보내기 위해서는 대마도주의 인장이 있어야 했다. 새로운 명치천황은 대마도주의 인장을 받기는커녕 오만불손한 내용을 보내 침략의 동기를 심었다. 하지만 병인양요(丙寅洋擾)를 해결한 대원군 정권은 강력한 쇄국으로 일본의 사신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헛물만 켜고 돌아갔다. 이어 대일본제국 건설을 위해 구미시찰단을 결성하고 이와꾸라가 단장이 되어 1년 10개월간 서양열강들의 정세를 시찰한 결과, 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게 우선 과제임을 깨닫고 선내치후정한(先內治後征韓)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자국의 힘이 없으면 애써 한국을 정복하더라도 강대국에게 빼앗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명분이 분명한 정한을 하기위해 주도면밀한 책략을 짜기 시작했다. 마침내 1882년 3월 일본의 육군참모본부에 ‘조선국사편찬부’를 만들고 젊은 장교들에게 조선말과 조선 국사를 가르쳐 조선에서 자료 수집을 하도록 했다. 동시에 정한 과정에 용이하도록 그 방법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을 하도록 했다. 다음 해인 1883년 이등박문이 내각총리가 되었다. 제국대학을 세우고 1887년 제국대학 안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그 동안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자료와 조사결과 등을 모두 옮기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서양에선 실증주의(實證主義)에 의한 역사를 중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세계적인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불란서의 실증주의 철학자 랑케의 제자인 리스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과학적인 역사기록의 방법을 익혔다. 2년 동안 함께 연구를 한 리스는 일본이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날변조하는 일을 눈치 채고 이의를 제기하자 당국은 딴청을 부리고 사학과가 있음에도 국사학과를 다시 설치하여 그 동안 얻어진 자료와 연구물을 국사학과로 옮겼다. 바야흐로 일본은 1892년 패기에 찬 젊은 하야시곤스케(林權助) 교수를 불러들여 조선사(朝鮮史) 5권,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지은 만선사(滿鮮史)를 만들었다. 그 어느 고서에도 없는, 황당무계한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설(新羅征伐說)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이 때 만들어졌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가야까지도 모두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고대말엽 혹은 10세기의 후지하라(藤原) 시대에 비할 만큼 스스로 발전할 힘도 없기에 자신들이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온 국민을 교화하였다. 이러한 역사날조를 하는 일본의 행위를 가장 먼저 눈치를 챈 이는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그는 1908년부터 한국의 역사를 조사하고 연구함으로써 대한매일신문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였다. 여기 독사(讀史)라 함은 역사책을 바르게 읽는다는 뜻이다. 1910년 합방 이후, 1915년에는 백암 박은식(朴殷植)이 ‘한국통사(韓國痛史)’를 발간함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에 대하여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를 세우고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따른 ‘조선사(朝鮮史)’ 편집에 들어가게 된다. 한국의 역사서들은 모두 걷어 가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던 규장각(奎章閣)에는 한국 사람은 그 누구라도 볼 수 없게 했다. 열람이 가능한 것은 저네들이 엮은 조선사(朝鮮史) 37권뿐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날로 더해가는 조선민족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엮기로 했다. 다시 이어서 어용 학술단체였던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를 조직하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식민주의사관으로 저술한 ‘조선사(朝鮮史)’ 37권의 사서를 만들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부터 1936까지 조선사(朝鮮史) 37권 조선사의 길잡이,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 3권,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21종을 상재했다. 그 가운데 37권의 조선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가장 역점을 두어 편찬한 사서로 식민지정책에 유리한 것만 선택하여 부풀리고 불리한 것은 모두 빼 버렸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통치 25돌을 기념하는 대중용 해설서 ‘조선사의 길잡이’ 에 한국민족은 예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변함없는 사대적(事大的) 역사를 가졌으며 일제 통치 하에 처음으로 행복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통한의 세월이었다.
진달래 아린 꽃이 흙바람 속에,
한을 달래는 듯, 새봄을 부르는
(5강-1)식민사관의 형성과정
1. 머리말
모든 일이 끝이 있으려면 처음이 있다. 이른바 식민사관의 비롯됨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알맹이는 무엇인가. 식민사관에 터하여 정한론(征韓論)이 당시 일본국의 국론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하여 산업화, 근대화된 국가 체제를 정비한 일본국은 마침내 한국을 식민통치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이 때 네덜란드로부터 총 만드는 현대식 화포기술을 받아들임으로 하여 결정적인 국방력을 기르게 되었다. 마침내 화폐는 말할 것 없고 조선의 말과 글, 나아가 사람들의 성씨까지 개명, 이른바 창씨개명을 하게 되고 마을이름도 바꾸고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생활을 넘어 문화주권까지도 빼앗아 갔다. 하기야 나라의 주권을 잃은 민족에게 어디가 항의를 하겠으며 무슨 수로 저들의 만행을 개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가 있었을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통한의 역사였다. 이렇게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치욕을 안겨준 그 동인으로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형성배경과 그 중요한 속내를 살펴보도록 한다.
2. 식민사관 형성의 배경
저네들은 우리나라를 합병하던 1910년의 50여 년 전부터 이미 치밀하게 계획하고 쳐들어온 침략을 획책하였다. 시간은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함정의 함포사격 2발로 촉발된 일본과 미국의 불평등한 화친조약을 맺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른 조약이었다. 일 년 동안 교역을 한 결과, 일본의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이란 사무라이가 2년간 각고 끝에 일본의 장래에 대한 대안을 떠올렸다. 그의 구도는 성주를 중심으로 살아 온 지방분권체계 곧 다이묘〔大名〕들을 통합하여 일본의 힘을 중앙집권적인 천황제(天皇制)를 실시하고 힘을 길러 조선을 정복해서〔征韓論〕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폐번치현(廢藩置縣)이라는 극약처방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금, 은이며 산물을 빼앗아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일본의 적자를 해결해보자는 구도였다. 정한론의 첫 과제로는 조선정복으로 자국의 적자를 메운다. 다음으로 만주정벌에서 이익을 얻고 마지막으로는 대만과 여송도(呂宋島, 필리핀)까지 정벌해서 대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도이니 말하자면 대동아공연권의 꿈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구의 열강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일본장래를 위한 교육의 공간을 세웠다. 이어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은 1856년 쇼오까촌숙(松下村塾)이란 학교를 세워서 어린 꿈나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요시다는, 당시 장군후계자 지명을 할 때, 지방의 다이묘들이 싫어하는 천황제를 추구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실권ㅇ르 잡은 권력자의 눈에는 그의 사고가 자신들의 전치적인 입지를 뒤흔드는 반동이니 눈에 가시일 수밖에. 학교는 사라졌고 스승이 사형으로 죽자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이와꾸라도모미는 가장 나이어린 17세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시켜 남모르게 스승의 주검을 파묻게 했다. 이어 제자들은 스승의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혈맹(血盟)을 하고 흩어진 뒤 일본 전역에 지하당을 조직하였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868년 1월 이와꾸라도모미를 중심으로 하는 쇼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침내 배추장사로 연명하던 황족 출신의 명치(明治)를 내세워 천황(天皇)으로 삼고 왕정을 복고시켰다. 말하자면 막부시대를 마감하였다. 근대 일본의 새로운 체제의 정권이요, 명치유신이었다. 그 다음해 1869년에 기또다카요시(木戸孝允)가 각료로 취임하자 각의(閣議)에서 정한론을 통과시킴으로써 정한론은 공공연하게 국책과제로 떠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예방하거나 문서를 보내기 위해서는 대마도주의 인장이 있어야 했다. 새로운 명치천황은 대마도주의 인장을 받기는커녕 오만불손한 내용을 보내 침략의 동기를 심었다. 하지만 병인양요(丙寅洋擾)를 해결한 대원군 정권은 강력한 쇄국으로 일본의 사신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헛되이 돌아갔다. 이어 대일본제국건설을 위해 구미시찰단의 이와꾸라가 단장이 되어 1년 10개월간 서양열강들의 정세를 시찰한 결과, 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게 중요함을 깨닫고 선내치후정한(先內治後征韓)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자국의 힘이 없으면 애써 한국을 정복하더라도 강대국에게 빼앗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명분이 분명한 정한을 하기위해 주도면밀한 책략을 짜기 시작했다. 마침내 1882년 3월 일본의 육군참모본부에 ‘조선국사편찬부’를 만들고 젊은 장교들에게 조선말과 조선 국사를 가르쳐 조선에서 자료 수집을 하도록 했다. 동시에 정한 과정에 용이하도록 그 방법에 대하여 연구와 토론을 했다. 다음 해인 1883년 이등박문이 내각총리가 되었다. 제국대학)을 세우고 1887년 제국대 안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그 동안 육군부대에서 한 활동의 열매인 자료와 조사결과 등을 옮기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서양에선 실증주의(實證主義)에 의한 역사를 중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세계적인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불란서의 실증주의 철학자 루드비히의 제자인 리스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과학적인 역사기록의 방법을 익혔다. 2년 동안 함께 연구를 한 리스는 일본이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날변조하는 일을 눈치 채고 이의를 제기하자 당국은 안 그렇다는 식으로 딴청을 부리고 사학과가 있음에도 국사학과를 다시 설치하여 그 동안 얻어진 자료와 연구물을 모두 옮겼다. 바야흐로 일본은 1892년 패기에 찬 젊은 하야시곤스케(林權助) 교수를 불러들여 조선사(朝鮮史) 5권,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지은 만선사(滿鮮史)를 만들었다. 그 어느 고서에도 없는, 황당무계한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설(新羅征伐說)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이 때 만들어졌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신라분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가야까지도 모두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거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은 일본의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고대말엽 혹은 10세기의 후지하라(藤原) 시대에 비할 만큼 스스로 발전할 힘도 없기에 자신들이 구해 주어야 한다고 온 국민에게 교화하였다. 이러한 역사날조를 하는 일본의 행위를 가장 먼저 눈치를 챈 이는 단재 신채호(申采浩)였다. 그는 1908년부터 한국의 역사를 조사하고 연구함으로써 대한매일신문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였다. 여기 독사(讀史)라 함은 역사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1910년 합방 이후, 1915년에는 백암 박은식(朴殷植)이 ‘한국통사(韓國痛史)’를 발간함으로써 민족 앞에 내놓았다. 일제는 이에 대하여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를 세우고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따른 ‘조선사(朝鮮史) 편집에 들어가게 된다. 한국의 역사서들은 모두 걷어 가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던 규장각(奎章閣)에는 한국 사람은 어떤 사람도 볼 수 없게 했다. 가능한 것은 저네들이 엮은 조선사(朝鮮史) 37권 만뿐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날로 더해가는 조선민족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엮기로 했다. 다시 이어서 어용 학술단체였던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를 조직하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식민주의사관으로 저술한 <조선사(朝鮮史)>37권의 사서를 만들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부터 1936까지 <조선사(朝鮮史)>37권 <조선사의 길잡이>,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권,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1종을 상재했다. 그 가운데 37권의 조선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가장 역점을 두어 편찬한 사서로 식민지정책에 유리한 것만 선택하여 부풀리고 불리한 것은 모두 빼 버렸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통치 25주년을 기념하는 대중용 해설서 <조선사의 길잡이> 에는 한국민족은 옛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변함없는 사대적 역사를 가졌으며 일제 통치 하에 처음으로 행복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했다.
3. 식민사관의 속내
총독부가 주도한 조선사(朝鮮史) 편수의 사업개요에 조선사를 엮는 목적이 여섯 면에 올라 있다. 그 속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로 요약된다.
1) 한민족의 역사적인 기원은 주변국의 식민지(植民地, colony)로 시작되었다. 이르자면, 기자조선(箕子朝鮮)설, 위만조선(衛滿朝鮮)설, 한(漢)의 식민지인 한사군(漢四郡)설로 단군조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신화에 불과함을 강조 하고 사대주의로 독창성이 없는 모방민족이며 당쟁만 일삼은 민족이라 했다. 기자조선은 전혀 현실성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 왕자인데 어떻게 하남성에서 수천 리를 돌아 평양까지 올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반) 오늘날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비롯한 중국 사료에 단군신화의 실체가 역사적인 진실로 밝혀지고 있다. 자신들의 유리한 정세를 바탕으로 한국사의 시원을 신화로 몰아간 셈이다. 한사군 , 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낙랑(樂浪)은 사고전서에 따르면, 하북성 평주 노룡현(盧龍縣)에 있었다는 풀이다(심백강, 우리역사, 2014 참조). 단군조선의 경우, 고조선문황의 얼굴이라 할 비파형동검이나 투구의 분포가 고조선의 옛 자리인 요하 유역에서 발굴이 되었기에 그러하다. 더욱이 요하문명이라 하여 단(壇 천단), 묘(廟 여신 사당), 총(塚 적석총)과 씨(C) 자형 옥룡으로 대표되는 옥기(玉器)가 상당수가 출토되었기에 그러하다.
2) 한국사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의 하나는 타율성(他律性)에 있다. 북으로는 중국이, 남으로는 일본과 같은 외세에 의하여 외세의존적인 역사였다. (반) 광개토대왕 시절의 강역을 보고 동이족(東夷族)의 철기문화와 구이(九夷)로 알려진 광대한 동북아의 고대 문명은 저들의 처사가 반역사적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3) 또 다른 한국사의 특징은 사대성(事大性)에서 찾을 수 있다. 사대주의로 연명해 온 민족이요, 나라다. 중국과 일본에 조공을 하였다는 증거를 들 수 있다. (반) 한(漢) 나라에서도 흉노국에 조공은 물론 칭신(稱臣)을 하였으며 왕녀를 헌납하였다. 이르자면 한(漢) 나라 원제 때 흉노에게 잡혀간 왕소군(王召君)이 떠날 때 눈물어린 시는 유명하다. ‘오늘은 한나라 사람이고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 되는 구나(今日漢宮人 明日胡地妾)’ 등을 보면 저네들의 주장이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인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더욱이 일본의 대마도주가 세종조에 조공을 한 보기등은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를 되묻고 싶다.
4)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 모방성이 강하다. (반)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한류(韓流)가 있었다. 한복이나 한식은 물론이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놀라운 문자를 갖고 세계적인 전자산업의 총아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분포된 철기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고조선문화라는 점을 어떻게 부정한 것인가.
5) 장기간의 정체성 때문에 발전이 없다. 경제적으로, 지리적으로 보아 북으로는 대륙에, 남으로는 바다에 둘러싸여 진취적이지 못하다. 후꾸다도꾸죠(福田德三)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이 이론적인 근거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교화하였다. 그러니까 조선에는 진정한 봉건제나 이렇다 할 경제적인 장엄이 없었다. (반)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할 만큼 도자기 산업을 전수해 갔다. 금관가야에서 철정(鐵鋌)을 수입해 갔다. 그러한 면면을 파헤친 저서가 백남운 선생의 ‘조선봉건사회경제사(朝鮮封建社會經濟史)’(1936)였다.
6) 한국사는 당쟁(黨爭)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반) 당쟁이라면 일본의 역사야말로 11세기 이후 각 지방의 영토에 지배권을 휘두르던 우두머리인 다이묘〔大名〕들 사이의 당쟁으로 이어진 역사였다.
7) 일본민족보다 미개하므로 천민들이다. 따라서 일본에 귀속시켜야 한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까지 들먹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전후하여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을 머리로 하는 이른바 송하촌숙(松下村塾)에서 길러낸 이와꾸라도모미(岩倉具視)와 이또히로부미(伊藤博文) 같은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정한론(征韓論)을 국정 과제로 내세웠으며 천황제(天皇制)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인 유신을 하였다. 아울러 침략주의 어용사학자들에 의해서는 일선동조론 · 만선사관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기반한 남조선경영설(南朝鮮經營說) 등이 만들어졌다. 그중 일선동조론은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은 같은 민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도쿄제국대학 교수들에 의해 저술되고 이후 일본사 교육의 중요한 저본(底本)이 된 〈국사안(國史眼)〉(1901)에서 고대의 한일관계가 동조론의 입장에서 서술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쿄제국대학의 교수 기다사다기치(喜田貞吉)의 ‘한국병합과 역사’ 등의 논문에서 드러낸 마각이었다.
8) 조선인은 열악하고 어리석은 민족성을 갖고 있다. (반)인류문명의 문화유산인 훈민정음과 철기문명을 처음으로 동북아시아에 펼쳤던 사람들이 동이족이었다.
4. 정한론의 원조,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 삶
요시다쇼인은 존왕파(尊王派) 주창자이자 교육자로 메이지 일본의 설계도를 그린 선각자로 꼽힌다. 그는 ‘천하는 천황이 다스리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며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사상적 주춧돌을 마련했다. 특히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주장해 일본의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어 새 시대를 열어갈 인재육성의 교육기관으로 서당 수준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웠다. 초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마사타케(寺內正毅) 등 조선을 강점한 주역들을 길러 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취임식을 앞두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松陰)을 꼽았는바, 우리들에게 쇼인은 일본 우익 세력의 원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요시다쇼인은 1830년 조슈번(야마구치, 山口縣) 하급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다섯 살 때 군사학자이면서 당주인 숙부의 양자로 들어간다. 어린 시절, 숙부에게 병법을 배웠고, 11세 때에는 번주(藩主)에게 병법을 강의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세 때 숙부 아래에서 홀로서 군사학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850년 규슈에 가서 병법을 연구했고, 이듬해 에도(江戶)에서 사쿠마쇼잔(佐久間象)에게서 서양의 학문과 군사학을 익혔다.
1853년 7월 에도만(江戶灣) 우라가 항에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구로후네(黑船)가 문득 나타났다. 다짜고짜 페리제독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한 후 떠나더니 다음 해 다시 요코하마에 상륙했다. 그때까지 나무로 만든 배나 유럽의 상선을 보아 왔지 초대형 대포를 장착한 엄청난 크기의 증기선은 처음 접하였고 저네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페리가 다녀 간 이후 일본에는 서양 문물이 아주 빠르게 들어오면서 근대 국가의 기틀을 갖춰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림 송하촌숙(松下村塾)
이 사건은 쇼인에게도 너무나 큰 영향을 끼쳤다. 쇼인은 이미 규슈 등을 여행하면서 유럽 신문물을 접하고, 미토 번에 방문하여 미토학을 접하면서 식견을 넓힌 바 있었다. 이때 경험으로 비충어 쇼인은 군사학자로서 낙후된 막번체제 아래에서는 앞선 구미의 열강을 따라잡지 못할 것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페리의 사건은 이런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는 전기가 되었다. 쇼인은 페리의 함선을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 '배도 대포도 적수가 안 된다'고 했다. 마침내 쇼인은 서구의 신문물과 정치 체제를 직접 체험하지 못하면 구미 열강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막부에 서양 군사학과 무기를 도입할 것과 그를 위해 인재들을 해외에 파견해야 한다는 요지의 정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막부의 실권자들은 물론 각 지방의 다이묘들조차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타성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막부에 개탄한 쇼인은 막부에 ‘장급사언(將及私言)’을 올려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을 간언했으나 별무소용이었다. 마침내 그는 1854년 페리 함대의 압박으로 불평등한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자 시모다(下田)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선에 올라 밀항을 시도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쇼인은 국법을 어긴 죄로 노야마(野山) 감옥에 수감되었다. 14개월 동안 수형 생활하면서 쇼인은 《유수록(幽囚錄)》을 썼다. 이 책에는 그가 밀항하려던 까닭과 그 동기가 된 사상이 가득 담겨 있다. 특히 무력을 갖추어 주변국을 공략해야 한다는 쇼인의 주장은 뒤에 정한론과 대동아공영권 사상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려면 막번(幕藩) 체제로는 안 되된다. 민족이 뭉치고, 하루빨리 국방력을 길러 에조치(蝦夷地, 북해도)를 농지로 개간, 제후로 봉하고, 류큐(流球, 오키나와)를 다른 번과 동등하게 대우하며, 조선을 공략, 인질과 공물을 바치게 한 뒤 만주와 대만, 루손(필리핀) 까지 정복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강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구미 열강과의 마찰을 피하고, 서구식 무기를 수입, 구미와의 교역에서 입은 손해를 이웃 만주나 조선 등을 침략해 보전하자는 것이었다.
쇼인(松陰)은 출감한 이후에도 고향 집에서 유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학문을 닦고,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의 위기를 구할 방안들에 대하여 연구와 토론을 했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모아 현재 일본의 위기와 자신의 사상을 전했던 그는 출감 후 고향집에 송하촌숙(松下村塾)을 젊은 개화파 꿈나무들을 길렀다. 그는 신분과 계급을 가림이 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는데,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나아가 일본 정계와 국제 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서양의 것을 배워 일본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쇼인의 가르침대로 서양의 직조술, 대포 제조술, 조선술, 육군 군제 등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근대 일본국을 이루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게 바로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정신이었다. 1858년 막부는 천황의 허락이 없이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각지에서 반막부 운동이 일어났다. 막부는 이들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안세이(安政) 대옥(大獄)을 일으켜 100여 명 이상의 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켰다. 이때 쇼인도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쇼인은 서양 오랑캐에게 일본이 굴복한 것은 국체가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인데, 천황의 친정이 이루어지던 고대에는 국체가 온전하여 한반도를 굴복시켰으나(임나일본부설과 진구 황후의 한반도 정벌론을 뜻함) 무가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명나라에 조공무역을 하는 등 국체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쇼인의 송하촌숙은 존왕양이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막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쇼인은 에도로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9세 꽃다운 나이였다. 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다카스기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 (久坂玄瑞) 등 그의 문하에서 3 명의 총리와 6 명의 장관이 나오는 등, 명치유신의 지도자들이 줄을 이어 쇼인의 사상을 현실로 이루는데 온힘을 기울인다. 특히 이토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丁未) 7조약을 맺은 뒤 쇼인의 무덤을 찾아가 이를 고했다. 2006년 아베 신조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을 꼽을 정도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치계에 그가 끼친 영향력은 그 누구보다 크다. 그의 위패는 오늘날에도 야스쿠니(靖國) 신사(神社)에 가장 머리에 제1호로 모셔 제향을 올리고 있다.
(참고자료 <식민지> 자료)
*On Colony
In politics and history, a colony is a territory under the immediate political control of a state, distinct from the home territory of the sovereign. For colonies in antiquity, city-states would often found their own colonies. Some colonies were historically countries, while others were territories without definite statehood from their inception. The Metropolitan state is the state that owns the colony. In Ancient Greece, the city that founded a colony was known as the metropolis. "Mother country" is a reference to the metropolitan state from the point of view of citizens who live in its colony. There is a United Nations list of Non-Self-Governing Territories. Unlike a puppet state or satellite state, a colony has no independent international representation, and its top-level administration is under direct control of the metropolitan state.
(Definition of Colony)
The word "colony" comes from the Latin word colōnia. This in turn derives from the word colōnus, which means colonist but also implies a farmer. Cologne is an example of a settlement preserving this etymology. Other, less obvious settlements that began as Roman colonia include cities from Belgrade to York. A tell-tale sign of a settlement once being a Roman Colony is a city centre with a grid pattern.[4] The terminology is taken from architectural analogy, where a column pillar is beneath the (often stylized) head capital, which is also a biological analog of the body as subservient beneath the controlling head (with 'capital' coming from the Latin caput, meaning 'head'). So colonies are not independently self-controlled, but rather are controlled from a separate entity that serves the capital function.
Roman colonies first appeared when the Romans conquered neighbouring Italic peoples. These were small farming settlements that appeared when the Romans had subdued an enemy in war. A colony could take many forms, as a trade outpost or a military base in enemy territory. Its original definition as a settlement created by people migrating from a central region to an outlying one became the modern defin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