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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생명의 본체를 찾아서 여행을 해 보겠습니다.
전등을 보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발전소가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를 보면 생명을 보내주는 생명의 본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전기제품이 전기의 도움을 통해서 사는 것처럼, 생기가 있어야 사는 우리는 생명의 기운을 보내주는 절대적 존재의 도움을 힘입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도 밥을 통해 들어오는 생명에너지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생명의 본체일까요? 물질일까요? 존재일까요? 무엇이 이 온 우주의 생명을 존재케하고, 유지케 하는 것인가요? 정말 엄청난 질문이요, 숨쉬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한번쯤 반드시 생각해 봐야할 질문입니다.
생명의 본체를 바로 알 때 우리는 생명의 축복을 맘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행복해 지기 위해 결혼하고, 돈을 벌고, 여가생활을 누리기도 하며, 명예와 쾌락을 추구해 보기도 합니다. 짜릿한 즐거움을 누릴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데, 삶에는 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고통과 불행이 있을까요? 왜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할까요?
이런 이치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어항안에서 금붕어가 스스로의 힘으로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을까요? 네, 그렇다면 어항안에서 튀어나온 금붕어가 스스로의 힘으로 어항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들어갈 확률은 몇%일까요?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 가지에서 잘려진 장미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정답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체에서 분리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본체에서 분리되어진 상태를 성경은 죽음이라도 말합니다. 그런 원리도 생각해 본다면 살아있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본체에서 떨어진 증상이 이것입니다.
생명의 본체를 떠난 사람의 마음은 불만, 불안, 불행, 절망, 공허, 문제, 염려, 중독…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치 어항을 뒤쳐나온 금붕어처럼 숨을 헐떡이며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나요?
만약 내가 이런 금붕어의 처지와 형편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러나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나를 받아 주는 손,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줄 손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어항속의 행복도, 원래 인류가 잃었던 에덴의행복도 영원한 생명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듣기도 거부하니, 알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엡 4:18)
이 영원한 생명의 본체는 인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데다가 듣기도 거부하면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마음의 문을 활짝열고 귀를 기울여 보는 것입니다. 정말 생명의 본체,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을까요?
우리 인생이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별것 아닙니다. 숨 떨어지면 흙 한 줌, 불살라지면 재한 줌,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한 점같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생각과 걱정은 얼마나 복잡한지...이제 우리의 모든 생각을 모아서 물어야 합니다. 목숨걸고 물어봐야 합니다. 정말 예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수 있는 분이신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14:6) "나는 너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 행복을 줄 수 있다."하십니다. 정말 내 삶을, 내 문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인가요?
누가 이 세상에 가장 큰 감화력을 가진 인물일까요?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알고보면 궁극적인 영향력을 가진 신앙의 대상은 예수, 모하멧, 싯다르타, 공자로 귀결됩니다. 수많은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살생하는 모하멧을 믿는 이슬람교는 이미 우리의 생각에서 제외되었고, 부처는 빛이 아니라고 자신이 고백했고, 공자 역시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한 인간임을 압니다. 오직 유일한 신앙의 참 대상은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정말 예수는 누구입니까? 예수는 우리의 구주가 되실만한 분이신가요?
예수에 관한 기록 실제성이 있는가?
여기 우리의 양자택일이 있습니다. 그가 구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라고 할 경우는 또 2가지입니다. 자기가 구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구주인척 했다면 사기꾼이고, 구주도 아니면서 구주라고 착각했다면 그는 미친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사기꾼일까요?
1. 사기꾼은 말에 신용이 없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가르친데 살았던 분이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권세였습니다.
2. 링컨의 말처럼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이거나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 만약 거짓이었다면 지식없는 그 당시 몇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전 인류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3.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사기꾼은 열매를 보면 압니다. 그러나 예수의 열매는 이 세상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착각하며 산 정신병자였을까요? 정신이상자를 본적이 있나요? 대개 그들은 횡설수설하고 정신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오히려 정신병자를 치료하고, 절망속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죄악속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습니다. 3년반의 활동으로 온 세상을 예수처럼 변화시킬 정신병자를 불러와보십니다.
그와 가장 가까이 살았던, 3년반을 따라 다녔던 제자 베드로에게 물어봅시다. 그는 이렇게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백부장도 그의 죽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구멍이 난 곳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도무지 그 말을 믿지 못하겠소!””(요 20:25, 쉬운말)
그의 믿음없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예수는 친히 도마의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도록 허락했습니다. 그의 손에 우리의 의심의 손을 얻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예수의 부활역시 실제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3년반의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기록된 메시야의 탄생과 생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구약에는 메시야에 대한 350여가지의 예언들이 나옵니다. 그것이 다 예수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의 탄생장소, 생애, 죽음의 연월일시까지 예언되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온 이스라엘의 역사와 존재를 다 거짓으로 취급하시겠습니까? 예수가 오기전 이미 기록되어진 그 엄청난 예언의 증거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예수 초림전 2200년의 아브라함부터의 긴 족보로 시작하는데 그 모든 약속들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영화의 저자로 알려진 C. S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양자택일은 여기 있다. 그를 바보로 취급해서 입닥치게 하든지, 악마로 취급해서 침을 뱉고 죽여 버리든지, 아니면 그 앞에 엎디어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든지,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결코 그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만 모시는 우스광스럽고, 반갑잖은 호의는 걷어 치워라. 예수님은 그것을 싫어하신다.” 정말 일리있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냥 취미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멸망에 관계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질문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이 오셨습니다.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신 그분이 당신의 마음문앞에 오셔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당신의 마음의 주인으로, 구주로 모시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은 낯선 분이 아니십니다. 이미 모태에서 당신을 지으셨고, 당신을 생명처럼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당신의 모든 고민과 무거운 삶을 내려 놓으시고 그를 당신의 친구로 영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는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의 운명을 자신의 것과 맞바꾸기를 원하십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참 하나님이시오, 생명되심을 능력으로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면
이제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이제 그 자녀됨의 축복을 누려보세요.
거듭났습니다(벧전1:23). 일회적 경험이 아니라 매일 또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자신의 고집은 죽고, 늘 주의 뜻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지은 죄가 용서받았습니다(마26:28). 가장 큰 죄는 내 고집대로 사는 것입니다. 매일 주님과 함께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요5:24). 가장 큰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족보가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더욱 더 잘 알아가서 침례로 구체화되는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요5:24). 이제 주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롬1:16-17).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시며, 당신은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먹고, 숨쉬고, 엄마의 돌봄이 있고, 움직여야 하듯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양식은 말씀이며, 숨은 기도이고, 엄마의 돌봄은 성도들과의 교제이며, 움직이는 것은 받은 좋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신앙은 한 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이제 주님을 영접했고, 좀 더 알아가며 침례를 받고, 함께 살아가듯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누군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가실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이렇게 답변하실 수 있습니다.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 요한일서5:11-13에 의하면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고 하셨는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성령을 통하여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께 여쭈어 보며 지혜로운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참된 신앙의 점검법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고후 13:5) 했습니다. 날마다 주님과의 친교를 누리세요.
또 누군가가 당신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이렇게 답하십시오.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 요한계시록 3:20에 의하면 문을 열면 들어오시겠다고 했는데 저는 그 약속을 믿고 주님을 내 마음의 왕좌로 영접해 들였습니다.”
또 누군가가 실수하고 넘어지면 주님이 떠나가지 않으실까요? 한다면 여전히 주의 약속이 답이 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변치않는 주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주의 약속의 말씀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 약속이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과 힘과 변화를 줍니다.
당신은 완전하십니까? 변화되었습니까? 라고 묻는 다면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 요15:5이 답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내가 주님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안에 거하심으로 참된 변화가 일어날 것 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의 완전은, 나의 자랑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이끌고 가십니까? 세상의 인기나 명예입니까? 재물입니까? 쾌락입니까? 헛된 자랑입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자녀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참된 자유와 승리와 기쁨, 하나님과의 말로 다 표현할 길 없는 친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 8:15)
성령이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에서 불순종의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주의 말씀에, 계명에 순종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주의 사랑으로 인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주의 영으로 우리안에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살아지게 되는 데 그를 향하여 하나님은 “참 내 백성이다”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은 불변하는 영원한 계명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하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뻔뻔한 거짓말쟁이여서,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요일 2:4, 쉬운말)
오늘날 기독교가 많이 욕을 먹는 이유는 불순종의 자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마음안에 계시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 머리카락이 둘 밖에 남지 않았을까요? 고민하고 염려하면 머리가 빠집니다. 얼마나 염려가 많았길래 둘 밖에 남지 않았을까요? 눈에는 눈물이 걸썽걸썽합니다. 입을 얼마나 삐죽이며 살았던지 입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슬픈 인생의 모습입니까? 이 사람의 영적인 삶의 주소는 살기도 괴롭군 죽으면 편하리 444번지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돌려서 주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불행했던 삶에 행복이 오고, 늙어 죽을 일만 기다리던 사람에게 신나는 일이 벌어지고, 슬픈 삶이 행복해 졌습니다. 이 사람의 삶의 주소는 “신앙도 은혜군”입니다. 그 안에서 안식과 행복을 누리기에 “안식면 행복동 777번지”에 사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선택은 언제나 당신의 몫입니다.
봄의 신비로운 변화 속에서 하늘의 약속을 바라보세요.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의 겨울은 지나가고 우리의 눈물은 눈물처럼 녹아지고, 아름다운 행복으로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