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卿宰
李光庭 碑銘[李敏求]
延原李公之位冢宰操衡秉政, 當宣祖季年, 士朝夕望晉宅鼎軸, 卒彰其功施。 而未幾, 時事大變, 公屛閑退處, 迄十六年, 未嘗一日在事。 至癸亥, 今上定內難旣踐祚, 卽其夜, 起公爲吏曹判書, 則朝野灼然知人主注意至到, 而公已年邁不任劇, 露章固辭。 歷七稔己巳, 以勳封考終于位。 嗚呼! 三事公相固有命哉!
謹按公諱光庭, 字德輝, 李姓出延安。 上世襲洪發跡, 麗朝官太子詹事, 組紱相禪, 連代載烈。 六傳貴山, 始事我朝, 爲都觀察使。 子曰續, 春川府使, 不肯連姻王室, 與其子根健俱得罪廢。 根健生諱仁文, 僉知中樞。 是生諱𡊉, 仍父子登第, 卒三陟府使, 贈判書。 生諱慶宗, 礪山郡守、贈贊成。 生諱澍, 飭儒行, 顯名當世。 嘗任正言, 論事觸時忌, 斥守嘉山郡以卒, 贈領議政、延寧府院君, 是爲公考。 妣柳氏, 籍晉州, 靖國元勳順汀曾孫, 郡守師弼之女, 以嘉靖壬子生公。
自年六七歲受書, 贊成公恒目屬曰: “是將大吾門。” 甫離童, 已業成發解。 癸酉, 升上庠, 儕流咸推重, 莫之齒。 服膺庭訓, 不專習博士家言, 後先居齊斬, 故偃蹇進取。 萬曆庚寅, 始以敎官捷文科。 辛卯, 由承文正字薦拜史職。 明年, 儲宮建, 以春坊說書從駕, 避寇西土。 道拜正言、兼知製敎, 遷郞禮、兵。 又明年癸巳, 天兵復箕京, 公佐接伴使李公德馨, 實從其役。 尋以持平赴召, 改兵曹正郞, 擢授同副承旨, 其後歷吏、禮、兵三曹參議。 乙未秋, 以左承旨掌讞叛獄, 陞嘉善爲國子成均大司成。 丁酉, 中朝討夷酋詐款, 再發兵東征, 軍興調度悉倚辦于我, 湖南新中寇, 魚爛不全。 時公儐沈副使, 從嶺表還, 旋拜戶曹參判, 往釐軍食。 其冬, 楊元棄南原, 公脫身歸朝, 握南餉如故。 戊戌, 特超資憲, 隨麻提督于蔚山。 己亥, 判度支・工部、漢城府尹, 又命督餉湖路。 前後出入海澨, 奔奏積勤勩, 宣廟歎之。 壬寅, 由度支、春官授吏曹判書, 辭遞爲大司憲。 秋, 奉表朝京師, 淸嚴方厲, 用身範下。 有褊裨爲父買寒裘, 旣而不可曰: “奈何以己私溷我公?” 於是舌人之仰機利爲業者, 率相戒毋犯。 公之在燕, 上用前勞, 已命陞一級。 使還, 加崇政階, 優賜臧獲, 判敦寧、義禁兩府。 冬, 又自禮曹移長天官, 崇恬退, 屛私謁, 苟有蹊逕紹介, 雖才必斥, 巷門外無一跡。 闒茸宂散, 交口流謗, 不恤也。 甲辰, 上錄扈從功, 賜號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封延原君。 其秋, 進輔國崇祿大夫、延原府院君。 自是處勳秩十八年, 爲光海辛酉, 復拜戶曹判書。 公以先朝舊故, 見朝政日壞, 象魏日益新, 遂謁病不肯拜。 惟時時奉朝請已, 則杜門謝客, 恬穆自守, 殆辱亦不及焉。 旣今上循公議, 欲將大用公, 而公乃引禮年蘄免, 無所內顧。 而上雅重公, 連判工、刑。 未幾, 輒辭。 最後丙寅, 留守開城。 其地舊都, 人視爲利窟, 公刮滌垢汚, 濯以淸流。 及秋解歸, 籍日用纖毫悉還官府, 父老詠思。 時國家再罹遷播, 公自力從衛, 未嘗言老病。
丁卯, 入江都, 益感水土, 三年而疾遂病, 上爲遣太醫齎藥守視。 訃聞, 輟朝加賵, 自斂含以往, 皆有司官庀。 葬于坡州治南弩谷之原, 從先兆也。
嗚呼! 公旣沒, 而搢紳大夫曰: “世寧有淸明溫巽、難進易退如公者乎? 名利擊一世敓其操, 而公雅道潔修, 歷夷險無變。 爵位顯隆, 俯僂滋甚, 形勢之途, 如怯夫避穽。” 嗟哉! 胡以範俗矣? 學士後生曰: “世寧有仁心爲質、嚴謹自治如公者乎? 謙光下濟, 出一言, 猶恐傷人, 而剛方內立, 不與物往。 居極品幾三十年, 素履若一。” 嗟哉! 胡以考德矣? 鄕黨族姓則曰: “內行篤悌, 唯親懿最詳。 公少事父母, 斤斤修子弟職。 旣貴不逮養, 恒言涕洟。 撫其弟昌庭, 白首如嬰兒。 死
則哭泣甚悲, 五月却常膳。 宗黨仰其仁, 里閈服其義。” 已乎! 何可得也? 輿臺馬卒則曰: “賤人焉敢知公? 迺權門要路, 未嘗見公車; 苞苴請謁, 未嘗踵公門, 獨吾儕加額之望屬公未已。” 今奚以不克諧也? 於是李敏求謹次其輿誦, 而竊槪公始卒曰:
公固中興勳賢臣。 以竭忠節, 以淸砥行, 人臣之誼, 若是盡矣。 夫起諸生, 不藉援引, 由郞署躋銀緋。 連歲超擢, 遂臻盛位, 稱遇於人主, 豈徒然哉? 遭時擾攘, 念人臣愛惜筋力, 曷以輸分? 羈紲焦勞, 不擇利病。 宣猷中外, 奔命於矢石之間, 未嘗問家室。 公之竭股肱、盡忠貞者若是, 而上所以下報公者亦至矣。 然自以受不世之知, 苟萌意濡益, 是爲負國。 所踐履皆世所稱利柄, 一出入而溫其家, 而公益蠲其氷蘗, 俸祿之外不長尺寸。 居恒稱貸, 不能具二簋, 敝衣羸乘, 終始寒士。 朝廷嘗錄公廉謹吏, 以風一世, 公其純德令望、謙亨安節者哉!
公凡再娶。 先夫人靑松沈氏, 考諱荀, 豐德郡守, 生嘉靖庚戌, 卒年三十有七。 後夫人陽川許氏, 考諱潛, 開城留守, 生隆慶己巳, 卒年五十有七。 俱有至行懿德, 宗族取法焉。 擧三男八女: 男袨, 參知, 女適正郞柳聖民、承旨韓亨吉, 爲沈夫人出。 男衯, 郡守; 裯, 佐郞, 女適輔德閔光勳、士人朴文彩、洪宇遠、李益培、朴諴長、朴粹行, 爲許夫人出。
嗚呼! 公持身持家, 斬斬無瑕玷。 訓誨子弟, 一於義方。 推其未究於用者, 以永後垂, 三子繼轢儒科, 材能顯一時。 而內外子姓甚蕃, 琳琅騈秀, 有衍不匱。 君子又知天以報繁昌之祚, 蓋愈盛而未艾也。 銘曰:
臣惟事君, 立爲大綱。 曷用自盡? 曰誠與淸。 肫肫李公, 允蹈其臧。 匪允蹈之, 克體在衷。 治于有家, 孝友爰發。 出贊王猷, 皇祖是契。 雲雷搆屯, 王播西灣。 恤恤其圉, 公扞于艱。 師徒十萬, 八年于征。 驛驛其餉, 公司厥程。 倉廒囊橐, 實裕邦計。 歸視其家, 鼎粥不繼。 營營者人, 莫問公廬。 謂公寒士, 冢宰司徒。 溫溫令儀, 不盈不持。 謂公靜者, 煙閣、雲臺。 豐資嗇用, 有監自天。 公操其券, 旣多子孫。 非謙胡受? 非種胡獲? 我鑱斯石, 惟後人式。
이광정李光庭의 비명(碑銘) 이민구(李敏求)
연원(延原) 이공(李公, 연원 부원군 이광정)이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전형(銓衡)의 소임을 맡은 것은 선조(宣祖) 말년인데, 이때의 선비들은 조석으로 공이 정승의 자리에 올라 공업(功業)을 빛내 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곧 정세가 크게 변하여 공은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로부터 16년 동안은 하루도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금상(今上, 인조(仁祖))께서 내난(內難)을 바로잡고 등극하시니, 그날 밤에 바로 공을 이조 판서에 기용하였다.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모두들 임금의 깊은 안목에 크게 감탄하였다. 그러나 공은 너무 나이가 많아 극무(劇務)를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 후 7년 뒤인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훈봉(勳封)되었고, 이어 현직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 삼공(三公)의 자리는 진실로 명(命)이 있는 것인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광정(光庭)이고 자(字)는 덕휘(德輝)로, 이씨는 연안(延安)에서 계출하였다. 윗대에 휘 습홍(襲洪)이 고려조(高麗朝)에 발신(發身)하여 태자 첨사(太子詹事)였고, 그 뒤에도 벼슬을 이어 오면서 대(代)마다 공렬(功烈)이 사책(史冊)에 실렸다. 6대를 지나 휘 귀산(貴山)이 비로소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벼슬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으며, 아들 휘 속(續)은 춘천 부사(春川府使)를 지냈는데 왕실과 혼인을 하지 않으려 하여 그의 아들 휘 근건(根健)과 함께 죄폐(罪廢)를 당하였다. 휘 근건이 휘 인문(仁文)을 낳으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요, 이분이 휘 말()을 낳으니 아버지를 이어 급제하여 삼척 부사(三陟府使)로서 졸(卒)하자 판서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휘 경종(慶宗)을 낳으니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찬성(贊成)에 증직되었고, 이분이 휘 주(澍)를 낳으니 유행(儒行)을 닦아 당세(當世)에 이름이 있었다. 일찍이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일을 논하다가 시휘(時諱)에 저촉되어 가산군(嘉山郡)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졸(卒)하였는데, 이후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연령 부원군(延寧府院君)에 봉하여졌으니,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유씨(柳氏)는 본관이 진주(晉州)이니 정국 원훈(靖國元勳) 유순정(柳順汀)의 증손이고, 군수 유사필(柳師弼)의 딸로, 가정(嘉靖)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이 6, 7세 때부터 찬성공(贊成公)에게 글을 배웠다. 찬성공이 항상 눈여겨보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앞으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 하였다. 동년(童年)을 겨우 지난 나이에 이미 학문이 성취되어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에는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니 동료들이 추중(推重)하였다. 공은 가정의 가르침을 지켜 박사(博士)의 가언(家言)을 전습(專習)하지는 않았는데, 전후로 재최(齋衰)와 참최(斬衰)를 입게 되어 진취(進取)에 차질이 생겼으므로 만력(萬曆)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야 비로소 교관(敎官)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사직(史職)에 천거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세자가 책봉되니 동궁의 설서(說書)가 되어 세자의 행차를 호위하여 관서 지방으로 피난을 갔다. 도중에 정언(正言) 겸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이듬해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명병(明兵)이 평양을 회복하자 공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공을 도와 실무를 맡아보았다.
얼마 후에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고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겼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그 후에 이조ㆍ예조ㆍ병조 삼조(三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 가을에는 좌승지(左承旨)로서 반역의 옥사를 다루어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명나라가 왜인들의 강화책에 속았음을 깨닫고 다시 발병(發兵)하여 동으로 나오니, 군수(軍需)의 조달은 오로지 우리나라에 의지하게 되고, 호남 지방은 왜구의 침략을 새로 당하여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그때에 부사(副使) 심유경(沈惟敬)의 빈접(儐接)을 맡아 영외(嶺外)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어 다시 영외로 가서 군량을 조달하였다. 그해 겨울에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을 버리니 공은 포위를 뚫고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군량의 담당은 그대로 맡았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는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울산(蔚山)에서 제독(提督) 마귀(麻貴)를 수행하였으며,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는 호조와 공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는데, 다시 호남의 군향(軍餉)을 맡아 해변을 출입하면서 많은 공로를 세우니 선조께서 탄복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호조와 예조를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고, 다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난 뒤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가을에는 표문(表文)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갔는데 청엄(淸嚴)하고 방직(方直)하여 처신이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편비(褊裨) 한 사람이 부모를 위하여 겨울용 갖옷을 샀다가 곧 후회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내가 사사로운 일로 우리 공에게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고 자탄하니, 장삿속으로 이익만 추구하던 역관(譯官)들도 서로 경계하게 되어 범한 사람이 없었다. 공이 연경에 있을 때 임금께서는 전의 공로로 1급을 올려 주었고 사행(使行)에서 돌아오니 숭정 대부(崇政大夫)를 더하고 노비를 두터이 내려 주는 한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제수하였다. 겨울에는 다시 예조 판서에서 이조 판서로 옮겼다. 공은 염퇴(恬退)를 숭상하고 사알(私謁)을 막아 사사로이 청탁이 들어오면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반드시 배척하고 문밖에는 한번도 나가지 아니하니, 사람들은 “옹졸하다. 못났다.” 하고 서로 비방하였으나, 조금도 이를 개념치 않았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는 호종 공신(扈從功臣)에 참록(參錄)되어 충근 정량 효절 협책 호성 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號)를 하사받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으며, 가을에는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이로부터 훈신(勳臣)으로만 18년을 있다가 광해군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에 다시 호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조정의 정사가 날로 어그러지고 교령(敎令)이 날로 바뀌니, 드디어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받지 않으려 하여 때때로 봉조청(奉朝請, 퇴직 관리가 받던 칭호)만 받을 뿐, 그렇지 않을 때는 두문(杜門) 사객(謝客)하고 염정(恬靜) 자수(自守)하니 위험이나 욕됨이 미치지 않았다. 금상(今上, 인조(仁祖))이 공의(公議)에 따라 공을 크게 쓰려 하였으나, 공은 도의와 나이를 들어 사면을 청하고 벼슬에는 추호의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은 공을 아중(雅重)하여 공조와 형조를 맡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면하였고,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는 최후로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개성은 옛 서울로 사람들은 이굴(利窟)로 보았으나 공은 그런 오점을 깨끗이 씻고 새로운 기풍이 감돌도록 하였다. 가을에 사직하고 돌아올 때는 일용품의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문서에 기록된 대로 관부(官府)에 돌려주니, 부로(父老)들이 사모하는 뜻을 시로 읊었다.
이때 조정이 다시 파천(播遷)하게 되었는데 공은 자력(自力)으로 호종하면서 한 번도 늙었다거나 병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강화[江都]에 들어가 수토병(水土病)에 전염되었는데 3년째에는 드디어 이것이 병(病)으로 악화되니, 임금은 태의(太醫)에게 약을 지어보내서 간병토록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는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를 더하였으며 염함(殮含, 염습(殮襲)과 반함(飯含))에서 송종(送終)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사관(有司官)이 일을 도와 파주(坡州) 치소 남쪽의 노곡(弩谷)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진신 대부(搢紳大夫)들은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공과 같이 청명(淸明)하고 온손(溫巽)하여 어렵게 나가고 쉽게 물러난 사람이 있겠는가? 명리(名利)가 일세(一世)를 풍미하여 절조마저 뺏기는 세상에 공은 아도(雅道)를 깨끗이 닦아 이험(夷險)에 변함이 없었고, 작위(爵位)는 높았으나 머리 숙여 지냈으며, 세도(勢途) 보기를 겁부(怯夫)가 함정 피하듯 하였도다.” 하였으니, 아! 이 이상 어떻게 세속의 모범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학사 후생(學士後生)은 말하기를, “세상에 어떻게 공처럼 인심(仁心)이 바탕이 되어 근검하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광영(光榮)은 피하고 아랫사람을 구제하여 말 한마디하면서도 혹 사람을 다칠까 걱정하였고, 안으로는 강방(剛方)하여 남과 겨루지 않아 극품(極品)에 30여 년을 있으면서도 본심은 한결같았다.” 하였으니, 아! 이 이상 어떻게 덕기(德氣)를 갖출 수 있겠는가?
향당(鄕黨)과 종족들은 말하기를, “공은 내행(內行)이 독실하였고 더욱 일가간에 자상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에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고, 귀히 된 뒤에는 미처 봉양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서러워하여 항상 눈물을 흘렸으며, 아우 이창정(李昌庭)을 무애(撫愛)하기를 늙어서도 어릴 적 같이 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매우 슬피 울고 다섯 달 동안을 상선(常膳)을 물리쳤으니 종당(宗黨)에서는 그 인자함을 우러르고 마을에서는 그 의리에 감복하였다.” 하였으니, 이제는 어떻게 그런 분을 얻어 보겠는가?
가마꾼이나 마졸(馬卒)들은 말하기를, “우리 같은 천인(賤人)들이 어떻게 감히 공을 알겠는가마는, 권문 요로(權門要路)에서는 한번도 공의 수레를 보지 못하였고, 뇌물 꾸러미나 청탁이 공의 문전에 이름을 보지 못하였으니, 우리들의 촉망은 오직 공에게 있다.” 하였는데, 이제는 어찌 전날의 모습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이에 나 이민구(李敏求)는 삼가 여송(輿誦)을 따라 공의 시종(始終)을 개괄하였던 바, 공은 참으로 중흥(中興)의 훈신(勳臣)이요 현신(賢臣)으로서 충절(忠節)을 다하고 맑고 평탄한 행동을 함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진실로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대저 제생(諸生)에서 발신하여 사적(仕籍)이 없이 원인(援引)되어 낭서(郎署)에서 참상(參上)과 당상(堂上)에 오르고 해마다 초탁(超擢)되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임금의 지우를 받았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혼란한 시기를 당하여 신하된 사람이 몸을 아낀다면 어떻게 직분을 다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신하로서 섬기면서 온갖 수고를 하면서도 이병(利病, 이해(利害))을 가리지 아니하였으며, 모유(謀猷)를 중외(中外)에 선양하고 시석(矢石) 속에서 분주하면서 한번도 집안일은 묻지 않았으니, 공의 고굉(股肱)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충정(忠貞)에 진력한 바가 이와 같았고 임금께서 신하에 대한 대접 또한 지극하였다 하겠다.
그런즉 스스로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으면서도 진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마음이 싹튼다면, 이는 나라를 저버린 것이 되는 것이다. 공의 이력한 바는 모두 세상에서 말하는 이끗으로 한번만 들어갔다 나와도 집안이 따뜻해진다는 직책이었지만, 공은 더욱 빙벽(氷檗) 같은 절조를 깨끗이 하여 봉록 외에는 척촌(尺寸)도 늘리지 않았고 거주시에도 항상 칭대(稱貸)함이 없었으며, 제기(祭器)도 두 벌 이상 장만하지 않았다. 항상 떨어진 옷과 야윈 말을 타면서 시종 가난한 선비처럼 지냈으니, 조정에서는 일찍이 공을 염근리(廉謹吏)로 기록하여 일세(一世)에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 공이야말로 순덕(純德)과 좋은 명망에 겸손으로써 형통(亨通)을 얻었고 절조(節操)에 안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두 번 취처(娶妻)하였으니, 선부인(先夫人)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풍덕 군수(豐德郡守) 심순(沈荀)의 딸로 가정(嘉靖)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에 나서 나이 37세에 졸(卒)하였고, 후부인(後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허잠(許潛)의 딸로 융경(隆慶)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에 나서 나이 57세에 졸(卒)하였다. 두 분이 다 지행(至行)과 의덕(懿德)이 있어서 종족 사이에 모범이 되었다. 3남 8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참지(參知) 이현(李袨)과 딸인 정랑(正郞) 유성민(柳聖民)ㆍ승지(承旨) 한형길(韓亨吉)의 처는 심 부인 소생이고, 아들인 군수(郡守) 이분(李衯)ㆍ좌랑(佐郞) 이주(李裯)와 딸인 보덕(輔德) 민광훈(閔光勳)ㆍ사인(士人) 박문빈(朴文彬)ㆍ홍우원(洪宇遠)ㆍ이익배(李益培)ㆍ박함장(朴諴長)ㆍ박수행(朴粹行)의 처는 허 부인 소생이다.
아! 공은 자신이나 집안을 다스림에 정숙하여 흠이 없었고, 자제를 가르침에는 한결같이 의방(義方)으로 하였으며, 자신이 다 펴지 못한 경륜을 길이 후손에게 넘겨 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재능을 일세에 나타냈다. 내외손이 매우 번성하여 임랑(琳琅)이 나란히 솟아오르듯 하니 군자(君子)가 끊이지 않고, 또 하늘이 번창할 복조를 더욱 성하게 내려 다함이 없음을 알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신하는 임금을 섬김이 대강(大綱)이니, 어떻게 하면 도리를 다할 수 있는가? 충성과 청백이로다. 정성스러운 이공은 착함만 행하였으니, 행함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체득하였도다. 가정에서 다스리니 효우(孝友)가 피어나고, 나가서는 왕유(王猷)를 도우니 황조(皇祖)와 뜻이 맞았도다. 운뢰(雲雷)가 어려운지라, 임금은 서만(西灣, 의주(義州))으로 파천하여 우리 속에서 근심하니 공이 어려움을 막았도다. 사도(師徒) 10만의 8년 싸움이 역(驛)마다 군량인데 공은 그것을 운반하였도다. 창고마다 전대마다 나라 살림은 넉넉한데 집에 돌아가 보니 끼니도 잇지 못하였구나. 우글거린 사람들은 공의 집을 찾지 않았으니, 공도 한사(寒士)와 같았으나 총재(冢宰, 이조 판서)요 사도(司徒, 호조 판서)였도다. 온온(溫溫)한 영의(令儀)는 자만도 고집도 없었으니, 공을 정자(靜者)라 하나 능연각(凌煙閣, 당나라 태종 때 공신각(功臣閣))이나 운대(雲臺,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전대의 공신을 추념하던 곳)에 새길 만하였도다. 자질은 풍부하였는데 쓰임은 못다 하였으니 하늘은 알고 있을 터. 공은 그 복권(福券)을 잡아 자손도 많도다. 겸손하지 않으면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씨뿌리지 않으면 어떻게 거둘 수 있겠는가? 이 돌에 새기어 후인(後人)들의 긍식(矜式)으로 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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