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위 관료 중 나이가 70에 이르면 임금의 은례에 감사하고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는 것을 아름다운 미덕으로 여기었습니다.(물론 고려시대에도 치사의 기록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최초의 치사에 대한 기록의 주인공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 문중의 16세 팔계군(휘 종영)이십니다.
그리고 팔계군 이후로 여러 고위관료가 치사를 청할 때 팔계군의 예를 들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곤 하였습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거친분이 29명이고 이중 청백리가 5명이라지만 과연 나이 70이되어 가지고 있던 벼슬을 모두 내려놓고 향리로 돌아가서 일생을 마친 사람이 팔계군 말고 또 있을까요?
팔계군께서 살다가신 길은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큽니다.
아래는 팔계군이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간 것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입니다.
선조수정실록 22년 기축(1589,만력 17) 2월1일 (무인) 팔계군 정종영이 치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이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종영은 풍질(風疾)이 있어 관직을 모두 사퇴하고 훈봉(勳封)으로 집에 돌아갔다. 임오년 이후부터 여러 차례 치사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집안 사람에게 월봉(月俸)을 받지 말도록 하고 간절히 사퇴하여 윤허를 받아 횡성(橫城)의 향리로 돌아갔다. 상이 역마(驛馬)를 주어 호송하도록 명하고 인견(引見)하고자 하였으나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하여 사양하였다. 중사(中使)를 시켜 한강가에서 전송하게 하였는데 백관 이하가 도성을 비우고 나와 전송하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종영은 이때 나이 77세였는데 출신(出身)한 지 47년이었다. 본조의 사대부(士大夫)로서 공로가 높고 명망이 중한 사람은 대부분 화패(禍敗)로 일생을 마쳤고 벼슬이 높고 나이 늙은 사람은 시골에 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영은 홀로 은례(恩禮)로 치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조야가 처음 보는 일이어서 칭찬하고 사모하여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