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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너무 많은 정보가 찰나에 지나가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보아도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매체다. 놓치고 지나갔던 누군가의 표정, 처음엔 보지 못했던 어느 구석의 그림자, 자신만의 존재감을 지닌 소품 하나. 그러나 영화를 몇번이고 다시 보면서도 배경처럼 흩어진 보조출연자들까지 눈여겨보기는 힘든 일이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그저 스치듯이 영화 속의 보조출연자도 그처럼 흘려보내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영화는 세상 최후의 날에 홀로 떨어진 쓸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멜로영화의 연인이 정담을 나누는 카페에서, 형사영화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거리에서, 그들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있었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몇몇 영화의 현장을 찾아 ‘보조출연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그들 한명 한명을 만났다. |
새벽까지 잘 버티면, 9만원은 들어오려나
어느 4년차 보조출연자 K의 하루
새벽 여섯시로 맞추어둔 자명종이 “하나, 둘, 셋, 일어나세요!”라며 금속성의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던 K는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앉아 자명종을 끄고 멍한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시 오분. 여덟시까지는 논현역에 도착해야 하므로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괜찮다. 그가 등록해둔 네 군데 보조출연 업체 중 하나인 A기획사도 다른 회사처럼 펑크에 대비하여 보조출연자를 필요한 수보다 많이 불렀다가 선착순으로 떨어뜨리곤 했지만, 오늘 촬영은 경력이 되는 사람들로 아홉명만 부른다고 했다. 차비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모는 겪지 않을 터였다. K는 내키지 않는 몸을 잡아끌듯이 일으켜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극이어서 어차피 수염을 붙여야 하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가짜 수염을 생각하면 면도라도 깨끗하게 해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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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시작 전 영화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들 | |
어제 아침에 밤샘 촬영이 끝나고 종일 낮잠을 자다가 새벽까지 잠을 설쳤더니 좀처럼 기운이 나질 않았다. 오늘도 철야라는데, 출연료는 제대로 나오려나. 그제는 오후부터 아침 일곱시까지 일하고 6만5천원을 받았다. 그 정도면 억울하지 않게 받은 셈이지만 날마다 그렇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1천만 관객, 1천만 관객, 떠들어대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 보조출연자들의 수입은 오히려 낮아졌다. 보조출연 업체가 많아지면서 영화사에는 단가를 낮게 부르고, 보조출연자에게는 온갖 핑계를 대며 출연료를 깎는 업체들이 난립하고 있는 탓이다. 자리가 모두 차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보조출연자에게는 차비라도 쥐어주는 것이 업계의 관행이었는데, 어떤 곳은 새벽 두시에 사람을 모아놓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지 않은가. 다행히 오늘 기획사는 일처리가 확실한 곳이다. K는 맡은 역할이 가벼운 바지저고리만 입어도 되는 상민이기를 바라며 벌써부터 뜨거워지는 햇살 아래 길을 나섰다.
수염 안 붙이는 ‘복면’ 역할 부럽네~
논현역 6번 출구 앞에는 벌써 동료 출연자 몇명이 와서 무가지를 바닥에 깔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낯이 익은 팀장에게 인사를 하면서 슬쩍 일지를 건네다보니 ‘복면’이 셋이고 ‘손님’이 여섯이다. 복면을 쓰는 역이라면 수염을 붙이지 않아도 좋겠지만, 눈치를 보니 그 역은 팔팔한 이십대 청년들의 몫인 듯했다. K는 삼십대 중반이다.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 시작했던 장사에 실패를 보고, 다른 일거리를 찾기 전에 잠시만 하자 했던 일이지만, 어느새 3년을 넘기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초반에 만났던 아저씨들이 한탄했듯이 K도 보조출연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드라마는 잠시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종종거려야 하지만 영화는 운만 좋으면 반나절을 놀면서 보낼 수도 있었고, 딱히 하는 일도 없어 업체에서 전화가 오는 대로 나가다 보니, 어느새 자기도 아저씨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주저앉는 건 아닐까. K는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꺼내며 시름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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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마당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들 | |
현장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보조출연자들끼리도 제법 친분이 쌓였지만 사람이란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와 어울리게 마련이었다.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아이들은 이른 아침에 피곤하지도 않은지 담벼락에 기대서서 서로 휴대폰 액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번 나갔던 현장 사진인가보다. K는 문득 궁금해졌다. 쟤들은 웬일로 사극에 다 나온 걸까? 영화계에서는 농한기라고 할 만한 한여름이어서 일거리가 떨어진 걸까. 20대와 30대 초반 보조출연자들은 일거리가 가장 많아 구태여 분장을 하고 겹겹이 옷을 껴입어야 하는 사극은 웬만해선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TV 사극에서도 전쟁터 앞줄에서 뛰어가는 사람들은 젊은이를 쓰지만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 태반은 50, 60대로 메우곤 했다. “버스가 곧 도착한답니다!” K는 그새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는 민속촌. 담배도 넉넉하게 사두었고, 요즘 읽고 있는 명상집도 챙겨넣었고, 얼음물과 수건도 준비했다. 이 정도면 가방 안이 알차다. K는 널찍한 촬영버스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기 위해 눈을 감았다.
처우 불만으로 소동부리다간 불평분자로 찍힌다구!
아침 나절이라 도로가 막히지 않았는지 버스는 야속하게도 40분 만에 민속촌에 도착했다. 지금부터는 화장실 한번 마음대로 갈 수 없을 것이다. K는 제대로 쉬지 못해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보조출연자 분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의상 먼저 갈아입고 분장합니다.” 잽싸게 제작부와 이야기를 마친 팀장이 담배 한대 피울 여유도 없이 재촉하자 K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화장실 좀 다녀오자며 볼멘소리를 했다. 누군가 돌아보니 어디서 보았지 싶게 낯이 익었다. 한동안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눈에 설었나보다. 몇달 전 보조출연자들이 더운날 물도 주지 않고 부식도 스탭들과 너무 차이가 난다며 소동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앞장서서 큰소리를 냈던 A였다. K는 반가운 마음에 눈인사를 건넸다. 요즘 대형 TV 사극이 많아 보조출연자 구하기가 어렵다더니 덕분에 일을 다시 시작한 건가. 이바닥에서 한번 불평분자로 찍히면 한동안은 일을 얻기가 힘들었다. 누가 선동을 한다더라, 소문이 돌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새벽같이 대전에 내려갔던 보조출연자들이 아침밥을 주기는커녕 제대로 줄을 서지 않는다며 방금 도착한 사람들을 이리저리 함부로 잡아끌며 험한 말을 하는 스탭들에게 화가 나서 타고 내려간 버스를 그대로 타고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돈을 모아 버스 대절료를 만들어서. 아마 그때 목소리가 가장 컸던 보조출연자도 지금쯤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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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정기2>의 교실장면. 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보조출연자들이다. | |
몇몇은 화장실에 가고 남은 사람들은 우선 의상팀이 색깔 맞춰 주는 대로 바지저고리를 받아 버스 안에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짚신 앞코 사이로 발가락이 삐져나와 다른 사이즈는 없는지 묻는 K에게 “다 거기서 거기에요”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서 거기는, 무슨. K는 투덜거리면서 스스로 발에 맞는 짚신을 찾아 신었다. 그래도 영화 현장에서는 보조출연자를 인간대우해주는 편이다. 어떤 드라마 반장은 어르신들에게 야자를 일삼는 것은 물론이고 대놓고 “너네는 움직이는 소품”이라고 못할 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영화쪽은 팀장도 정중한 편이고, 스탭들도 너무 힘들지만 않으면 사람을 막 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제 촬영을 시작한 영화여서 그런지 옷도 깨끗하니 마음에 든다. 한여름 TV 사극 현장에 갔던 K는 빨래를 하지 않아 땀과 흙먼지로 풀먹인 것처럼 굳어 있는 의상을 받아들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문제다. 먼지 묻고 구겨진다며 바닥에 앉지도 못하게 하니까. 이래저래 K는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선호하게 됐다.
휴대폰을 말아올린 저고리 소매 사이에 집어넣거나 허리끈으로 바지춤에 묶은 K와 동료들은 팀장을 따라 분장을 하러 갔다. 상투가 달린 망건은 그대로 뒤집어쓰면 되지만 수염이 고역이다. 종일 수염을 붙인 채 밥까지 먹을 생각을 하니 한칸이라도 줄 뒤로 가고 싶다. 복면 친구들이 부럽지만 움직임이 많아 난이도가 높은 역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자명종처럼 요란하게 공기를 찢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보조출연자들은 잡담을 시작했다. 책도 읽고 문자도 보내고 휴대폰 게임도 하면서 대기 시간을 보내지만 역시 보조출연자의 가장 좋은 친구는 잡담이다. A가 재미있게 생긴 B에게 농담을 걸었다.
“요즘 홈쇼핑 진짜 많이 나오던데? 돈 좀 벌겠어?”
“그 얘기만 나오면 쪽팔린다니까. 그거 다 재방송이에요.”
“근데, 공기 넣는 그거, 진짜 트럭이 지나가도 안 터지나?”
“에이, 터져요. 내가 보는 데서도 트럭 지나갔는데, 바로 터지더라고.”
출연료 일당체계
보조출연료는 이동시간을 포함하여 12시간에 3만원이 기본이다. 드라마는 3만5천∼3만6천원을 지급하지만 영화와 달리 식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식비가 포함된 액수다. 주간 촬영이 끝나는 기본 시간은 하절기가 오후 7시고 동절기가 오후 6시. 열두 시간이 되지 않아 촬영이 끝나더라도 기본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요즘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기본 시간이 넘어 촬영이 끝나면 연장 수당이 지급되지만 애매한 경우가 있다. 8월 주간 촬영이 오후 7시40분에 끝나면 제작사와 기획사에 따라 연장 수당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수당을 협상하는 팀장의 능력이다. 어떤 기획사는 집합시간과 연장 수당 지급 기준을 세분하여 명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장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보조출연 업체는 제작사로부터 4만원을 받아 1만원을 떼어 회사 몫으로 하는데, 경쟁이 치열해 3만8천원을 가격으로 제시했다고 해도, 굳건하게 정착돼 있는 기본급 3만원을 깎기는 어렵다. 대신 모자란 2천원을 메우기 위해 보조출연자들의 연장 수당을 깎는 편법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야간촬영을 하면 곱절의 수당이 적용된다. 오후에 집결하여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찍으면 6만원을 받게 되는 식이다. 새벽 4시나 자정처럼 대중교통이 없을 경우에 집합하거나 해산하면 5천∼1만원 정도 택시비가 추가된다. 그러나 이것도 기획사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밤 11시처럼 대중교통 일부만 이용 가능한 시간에는 차비를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식비도 예민한 문제다. 영화의 기본 보조출연료는 식비를 제외한 액수이기 때문에 식사로 2천원 상당의 김밥 한줄이 제공된다면 나머지 식비 3천원 정도가 증발하는 것이다. 모 기획사의 경우 현장 사정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는 경우 1천, 2천원이라도 추가 수당을 지급하지만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위험수당과 세탁비도 애매해지는 경우의 하나다. 대중목욕탕처럼 노출이 있는 촬영, 보조출연자가 직접 준비한 의상이 가짜 피 등으로 더러워지는 현대극 촬영, 한겨울에 해수욕장을 찍는 것처럼 정도 이상으로 힘든 촬영 등은 추가수당을 지급해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 액수가 달라지고 심지어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출연료 지급방식은 영화의 경우 현금정산이 기본. 촬영이 끝나고 그날 촬영분에 해당하는 출연료를 받게 된다. 보조출연자도 고정출연을 하는 경우가 많은 드라마는 월급제나 주급제로 정산하기도 한다.
보조출연 인솔 팀장
보조출연자를 인솔하는 이를 영화 현장에선 팀장이라 부르고 TV현장에선 반장이라 부른다. 팀장은 보조출연 업체에 바로 직원으로 입사한 사람도 있고 보조출연을 오래하던 사람이 하기도 한다. 보조출연자의 위치와 동선을 알려주고, 많게는 수백명에 달하는 보조출연자들을 통제하고, 출연료 정산까지 하는 것이 팀장의 역할. 팀장은 이처럼 제작진과 보조출연자 사이에 있기 때문에 양쪽 모두의 원성이나 오해를 사기도 하고 양면성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TV사극을 맡았던 반장이 그 예다. 평소 성격이 나쁘기로 이름났던 그는 시체로 누워 있는 보조출연자들을 소품 대하듯 발로 툭툭 차면서 자세를 고치라고 말해 욕을 먹었지만, 보조출연자 한명이 바다에 빠지자 옷을 입은 채로 뛰어들어 구해냈다고 한다. 팀장은 보조출연자들의 연기의 질과도 직결된다. 경험 많고 능력있는 팀장이 영화를 맡았는지, 관객은 몰라도 전문가는 그 차이를 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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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시간 촬영에, 햄버거랑 콜라 한끼만 준 곳도 있대
잠깐 웃고 떠드는 사이 리허설이 시작됐다. 팀장이 대강 얼굴을 확인하더니 연출부가 알려준 배치대로 인력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침 촬영은 주막집 손님으로, 평상이며 멍석에 앉아 국밥 먹는 한컷이 전부인 모양이다. 진짜 밥을 먹는 건 아니지만 무거운 장창을 쥐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전쟁장면에 비하면 A급이라고 할 만한 편한 촬영이다. 물에 뜨기는 하지만 수영이 서툰 K는 병졸로 분장하고 배를 탔더니 부두는 한없이 멀어지고 아무리 둘러봐도 안전요원을 찾을 수 없는 현장에 나가본 다음 그 드라마는 접기로 했었다. 그래도 나중에 듣기로는 불화살 떨어지는 무서운 장면보다는 나았다고 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지만 K의 동료 한명은 권총 맞는 장면을 연기하다가 정말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불꽃을 뿜는 폭죽이 가슴에서 터지면 그 반대쪽으로 쓰러져야 하는데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 엉겁결에 폭죽을 깔고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상해보험에 가입한 기획사의 일이었으니 망정이지. 보조출연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 영화사와 기획사가 서로 책임을 미루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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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서생>의 보조출연자들 | |
해는 점점 높이 뜨고 주연배우도 나오지 않는 장면인데 감독은 벌써 네 번째 같은 장면을 찍고 있다. 처음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게 쑥스럽고 귀찮기도 했었다. 게다가 마땅히 앉아 있을 장소가 없으면 기다리는 시간은 고문이었다. 얼마 전에 월드컵 경기장에서 찍은 CF는 빽빽한 공간에 보조출연자를 몰아넣고 몇 시간을 서 있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은 장소가 민속촌이어서 나무 그늘도 많고 보조출연 인원이 적은 탓에 티테이블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복면을 맡은 청년 하나는 감독이 군것질을 즐기는 현장에 가면 티테이블에 간식이 많아 좋다며 맛동산 좋아하는 J감독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연예인이 보고 싶어서 보조출연을 시작했다가 벌써 1년째 일을 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는 목표로 삼았던 여배우 다섯명 중 마지막 남은 전지현만 보면 일을 접겠다고 했다.
주막장면을 찍고 놀랍게도 제때 점심을 먹고 왔더니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보조출연자 촬영 분량이 없다고 한다. 저녁 먹고 의상을 갈아입고 리허설을 할 거라고 하니 앞으로 서너 시간은 한가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명상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다가 무료해진 K는 야트막한 정자 비슷한데 모여 잡담에 한창인 동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요즈음 보조출연자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어떤 영화 현장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22시간가량을 촬영하면서 식사는 한끼, 그것도 햄버거와 콜라만 제공한데다 일당은 6만원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여, 인터넷 카페 등에 기록적인 숫자의 게시물을 기록한 영화다. 감독이 보조출연자들에게 욕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역시나 A의 목소리가 가장 높다. 최근에 지방 현장에 갔다온 그는 서울에서 밤 12시30분에 출발해 전라도에서 하루를 꼬박 촬영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는데도 4만5천원밖에 받지 못했다고 했다. 뜨거운 도로에서 구르고 옷에는 가짜 피까지 묻었는데도. 다들 웃는 낯으로 보이콧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모 기획사를 비아냥대고 있지만 속은 타들어갈 것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 K는 선배들로부터 기본 일당이 2만7천원에서 3만원으로 오르는데 최소 7, 8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오르지는 못할망정 내려가고 있으니. 게다가 부산에선 150∼200명이나 되는 보조출연자들의 일당을 통째로 떼어먹은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영화가 열악하던 시절 임금 떼어먹는 경우가 하도 많아 당일 지불이 정착된 거라는데, 그것마저 떼먹히고 있으니, 점점 이 일에 정이 떨어진다.
가끔 단역배우 시켜줘도 신경만 더 쓰여~
철야에 대비하여 하나둘씩 토막잠을 청하고 있을 무렵 팀장이 “보조출연분들, 식사하고 오세요!”라며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6시가 조금 넘었다. 놀랍게도 두끼나 제시간에 챙겨먹고 있으니 특A급 현장이라 할 만하다. 식당에선 밤촬영에 합류할 팀이 한발 먼저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현장에서 ‘대모 아줌마’라 불리며 군중신 지휘를 맡은 적 있는 베테랑 연기자가 눈에 띈다. 이제 막 보조출연을 시작한 초보가 곁에 있다면 저 아주머니와 친해져서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하면 일거리 얻기가 수월해질 거라고 귀띔해줄 테지만, 오늘은 모두 나름대로 경력자들뿐이다. 현장에서 급하게 단역배우가 필요할 때면 K처럼 경력이 되는 보조출연자 중에서 한명을 뽑아 대사나 중요한 동작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역배우가 하면 일당을 몇배나 받을 일을 그들이 하면 그대로 3만원짜리일 뿐, 힘만 들고 신경만 쓰이는 데다가 어쩐지 속도 상했다.
밥을 먹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 의상팀이 갈아입을 의상을 옷걸이에 걸고 나와 크기와 색깔을 대보며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여자는 왼쪽 버스, 남자는 오른쪽 버스가 탈의실이다. K는 전에 스무살 갓 넘은 아가씨가 남자들하고 룸살롱 방 하나에 몰아넣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며 울먹이기에 마음이 안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나오니 팀장이 인원을 체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야외에서 찍는 밤장면이어서 해가 뜨면 어쨌든 철수한다는 거다. 요즘은 해가 다섯시쯤 뜨던가. 욕먹고 있는 그 영화처럼 아침 일곱시에 끝내준다고 하고선 밤 열시까지 끌고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오늘은 정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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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계보>의 보조출연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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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의 보조출연자들 | |
어느덧 해가 지니 더위는 한풀 꺾인 대신 모기가 기승이다. 티테이블에 뿌리는 모기약이 있기에 드러난 부분은 대충 뿌렸지만 청바지도 뚫고 들어오는 게 한여름 모기다. 소일 삼아 가끔 나오는 할아버지 한분은 저고리를 벗어들고 연신 웃통을 때리며 모기쫓기에 여념이 없다. 저 할아버지는 집에 있기가 심심해 드문드문 일이 생길 때마다 보조출연 일을 하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홈쇼핑과 CF는 거절한다고 한다. 먹고사는 데 지장만 없다면 악덕 기획사 찾을 일도 없고, 사극보다는 편한 현대극만 하겠지만, K는 그럴 처지가 못 됐다. 정말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이도 있지만, 고급 승용차 몰고 취미 삼아 일나오는 보조출연자를 보면, K는 은근히 속이 쓰렸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복면 청년들도 검을 들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다. 말을 터보면 저들도 못 볼 꼴을 많이 봤다지만 한창 일거리가 많은 나이인데다 언제든 다른 직업으로 옮겨갈 수 있는 젊음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보조출연을 전담하는 연출부와 팀장이 마당을 누비며 자리를 지정하고 동작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자, 아저씨가 좋은 패가 나온 거예요. 얼씨구! 하는 몸짓으로 일어나서 춤을 추면, 거기 그분이 멍석쪽으로 걸어오고….” 스테디캠으로 마당을 구석구석 보여주는 장면이어서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하고, 왁자지껄한 잔칫집 분위기가 나게 쉴새없이 웃고 떠들어야 한다. 이런 장면엔 경력이 많은 보조연기자가 발탁되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일당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아니, 경력에 따라 일당을 차등지급하면 몸값 비싸다고 갈수록 찾는 이도 적어지려나? K는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수십명이 일하는 현장에서 내가 잘못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K는 스테디캠이 들어오고 주막 주인 역의 배우가 술항아리를 가지고 지나갈 때쯤 멍석 위에서 신명나게 윷을 쥐고 흔들며 “모 나와라, 모!” 목청을 높였다.
새벽 두시쯤 야식을 먹고 몇 시간 버티다가 날이 밝으면 일당 9만원이 손에 들어오리라. 보름달은 높이 떴고, 해와 달을 구분 못하는 장닭들은 새벽처럼 울어대고 있다. 조명이 휘황하여 닭들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K는 멍석 위로 돋아난 지푸라기를 쥐어뜯다 새삼스럽게 아주 조금, 쓸쓸해졌다. 수십 킬로와트짜리 조명이 마당을 밝혀도 처마 밑 평상 위에 술상을 놓고 앉은 보조출연자들은 언제까지나 이 마당이 그늘 같기만 할 것이다. “한번만 더 갑시다!” 모니터를 확인한 감독의 외침에 K는 정신을 차렸다. 날이 밝으면 촬영이 끝나겠지, 내가 계산한 대로 9만원이 맞았으면. 사소한, 그러나 지금 당장은 너무나도 절실한 걱정거리가, K의 마음으로 밀려들어왔다.
*이 기사는 보조출연자들과 보조출연 업체, 영화 스탭 등을 취재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드라마 보조출연과 영화 보조출연의 차이점
보조출연자는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하는 학생과 직장을 옮기는 사이 잠깐 일하는 젊은 층, 퇴직한 다음 소일거리 삼아 나오는 노년층, 생활비를 버는 ‘생계형’ 출연자 등으로 구성된다. 등록된 보조출연자는 3천명 정도지만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인력은 1천명에서 1500명 사이. 분야는 드라마와 영화, 홈쇼핑, CF 등으로 다양하다. 이중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는 드라마다. 한번 시작하면 고정출연할 수 있고 촬영도 자주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보조출연자의 중복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드라마와 달리 몇번 출연하면 관객이 얼굴을 알아본다며 인력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한다. 그 때문에 보조출연자 중에서는 카메라에 얼굴이 나오는 것을 꺼려하는 이도 있다. <거룩한 계보>에 교도관으로 얼굴이 나갔던 보조출연자는 무심코 한번 더 갔다가 감독이 얼굴을 알아봐서 교체되기도 했다. 한 보조출연 업체에 따르면 드라마를 주업으로 삼고 쉬는 날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달에 25∼27일 정도 일하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지만, 정기적으로 일거리가 있다는 보장이 없어 힘들다고 한다.
일당과 식사문제
보조출연자는 일당과 식사에 가장 민감하다. 보조출연 업체와 제작부, 보조출연자들 모두 이 부분에선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만, 그 입장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당이 시간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에 보조출연자들은 일이 언제 끝나는지 얼마를 받게 되는지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잠깐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아니라면 보조출연자도 촬영이 언제 끝나는지는 감독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업체마다 산정 기준이 미묘하게 다르고 약자인 보조출연자로서는 자기 주장을 내세울 수도 없으니 돈을 받아들기 전까지는 액수를 알 수 없다는 것. 식사문제에서도 보조출연자들은 사람이 제때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하지만, 업체와 제작부는 그들만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니므로 설명도 없이 촬영을 강행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이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더라도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어느 보조출연자의 분노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것이다. 그는 식사로 제공한 김밥 일부가 상해 있었던 모 기획사를 예로 들었다. 촬영현장에 음료수와 간식을 비치해두는 티테이블의 경우 보조출연 인원이 너무 많으면 제작부에서 기획사에 티테이블을 따로 둘 것을 요구한다.
경력자의 진로
보조출연을 오래 하다보면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스탭과도 안면을 익히게 된다. 대규모 인원이 오랫동안 함께 출연한 영화 <황산벌>에서는 일을 거들어주다 제작부처럼 되어버린 연기자가 있었고, 팀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조출연을 통해 배우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연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팀장으로 일하며 현장에 남아 있던 어떤 배우 지망생은 회사를 그만두고 연기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당장 생계 때문에 보조출연을 하더라도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은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한다. 보조출연이나 재연 프로그램으로 얼굴이 팔린 사람은 배우로 기용하지 않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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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할 때 움직이세요. 자자, 갑니다. 하나, 둘~!” 가슴이 방망이질친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암시를 걸 듯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다리라도 엉켜서 넘어지면 어떡하지? 숨통을 죄듯 따가운 햇볕이 온몸을 찔러댄다.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걸까? 뜨끈뜨끈 달궈진 등줄기에 땀 한 방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컷~!!!” 생애 첫 영화 출연에 마침표를 찍는 시원한 외침. 작품명은 <바람 피기 좋은 날>. 역할은 행인3 혹은 행인4, 아니 행인7?
‘기자의 보조출연 체험’이라는 미션이 떨어진 것은 3주 전. 벼룩시장을 비롯해 갖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전전했으나 건진 것이라고는 ‘야시시한 분위기의 여자’, ‘글래머 여성’ 등 엄두조차 안 나는 몇개의 채용공고뿐. 결국 보조출연자를 공급하는 업체를 직접 통하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몇몇 업체에 끼어들 만한 자리가 생기는 대로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대기하기를 2주일여. 기다림 끝에 행인이라는 역할이 떨어졌다. ‘뭐, 그 정도라면…’ 하는 안심과 ‘겨우 행인?’류의 거만함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리고 마침내 D-day.
보조출연 첫째날_<바람 피기 좋은 날> 촬영현장
아침 7시, 잠을 미처 다 떨어내지 못한 부스스한 얼굴로 경기도 부천 송내역에 들어서니 출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저기, 안녕하세요.” 살짝 인사를 건네자 선뜻 반겨주는 분위기다. “언니 오늘 처음 왔나봐요? 여기는 항상 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다 서로 알고 지내. 동호회 같은 분위기야.” 15명 남짓한 오늘 출연자들은 모두 ‘고정멤버’들. 아르바이트로 단발 출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얼굴을 내미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친숙하다. 하지만 각자의 사연은 천차만별. 10년 동안 주유소를 하다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생계형으로 보조출연에 뛰어든 P씨, 딸이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하기에 ‘대체 어떤 세계인지 내가 직접 체험해봐야겠다’고 나선 L씨, 내성적인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는 K씨, 끊임없이 ‘셀카’로 표정 연습을 하는 연기자 지망생 S씨까지. “솔직히 돈이 목적이면 못해요.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세계를 알고, 그게 재밌으니까 하는 거지.” 보조출연은 “마약 같은 것”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L씨에게서 은근한 애정이 묻어난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팀장의 고함에 한껏 높아졌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잦아든다. 촬영 개시다.
이날 촬영분 중 행인이 동원되는 것은 총 8컷. 내용은 간단하다. 길거리를 걷던 작은 새(윤진서)를 차를 타고 가던 남편이 불러 세워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 뒤로 행인들이 지나가야 한다. 막상 카메라와 죽 늘어선 스탭들을 보니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행인마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정하고, 걸어나오기 시작하는 시점과 동선 등을 지정.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건 바로 사고다. 윤진서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것도 잠시, 어느새 모든 신경은 두발끝에 쏠려 있다. “아니, 원래 그렇게 걸어요?” “딴 데 보지 마요!” “신호 보내면 움직이라니까.” 팀장의 호통이 터져나올 때마다 안일한 자신감이 산산이 날아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다시 B지점에서 A지점으로, 오가는 것만 수십 차례. 카메라가 돌지 않는 사이를 틈타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낸다. 걷기와 기다림, 그리고 걷기. 고된 반복이다.
걷고 또 걷고, 8~9시간 서있으니 발바닥 퉁퉁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친 뒤 두 번째 촬영장소인 백화점 앞으로 이동. 이번엔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행인 역이다. 가장 큰 적은 역시 더위다. 아스팔트가 이글거리는 열기를 뿜어낼 때마다 간신히 불어넣은 기운마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버린다. 출연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모라도 한 듯 일제히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통로 앞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약간의 냉기라도 취해 몸을 식혀보고자 함이다. 흉해 보인다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한다. 포대자루를 내려놓듯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고르는데 K씨가 다가와 갑작스레 던지는 말. “혹시 우리 사진 찍었어요?” “네, 그런데….” “다 지워주세요. 그거 누가 보면 어떡해요?” 굳은 표정으로 삭제를 종용하던 그는 사진이 지워지는 것을 일일이 확인한 뒤에야 자리를 뜬다. 옆에 있던 S씨가 해명을 하듯 속삭인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자기 좋아서 이 일 하는 거지만, 솔직히 사람들 시선이 그렇잖아요. 길거리 촬영할 때마다 중학생도 놀리면서 무시하는데.” 이야기를 듣던 아저씨들이 “그게 전부 다 페이가 낮은 탓”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12시간 노동에 보수는 3만원. 시간당 2500원꼴이다. “한달 내내 뛰어도 교통비니 뭐니 빼고 손에 쥐는 건 50만원이 안 돼. 보조출연자들끼리 새벽시장에서 생선 나르다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니까.”
마지막 촬영을 마치자 어느새 저녁 7시다. 아스팔트 위에, 신문지 위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던 순간을 제외한다면 8~9시간 정도를 꼬박 서 있었던 셈.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채 바싹 들러붙었고, 발바닥은 퉁퉁 부어올랐다. “다들 모이세요~!” 모두가 기다리던 시간. 만원권 뭉치를 손에 쥔 팀장이 동그랗게 열을 맞춘 사람들에게 ‘일당’을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몸을 숨기고 있자, 팀장이 다가와 빙그레 웃는다. “받으세요. 아침부터 똑같이 고생하셨으니 드리는 겁니다.” 못 이기는 척 3만원을 받아 쥐는데, 찌르르한 전율 같은 것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간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몸은 쇳덩이처럼 무겁지만 다시 어딘가로 걸어가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에 발끝이 간지럽다. 지갑에 넣은 3만원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다.
보조출연 둘째날_<특별시 사람들> 촬영현장
오색찬란한 꽃무늬 남방에, 짝을 맞춘 꽃무늬 치마. “최대한 없어 보이는 의상으로 준비”하라는 말에 한 시간 넘게 어머니의 옷장을 뒤져 찾아낸 비장(?)의 결과물이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에 자리한 <특별시 사람들>의 촬영현장.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의상팀의 ‘옷 검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날 보조출연자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판자촌 주민. 계절만 맞추면 어떤 옷을 입건 큰 무리가 없었던 행인과는 달리 의상 컨셉이 확실한 역할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촌스럽지’ 했던 확신을 가볍게 배반하듯 준비해간 상하의 두벌이 전부 퇴짜를 맞았다. 대신 주어진 것은 큼직한 꽃무늬가 빽빽하게 들어찬 원피스. 80년대 스타일로 벙벙하게 벌어진 어깨선도 그렇지만 마름모꼴의 칼라가 가히 압권이다. 민망함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은 오히려 문제의 원피스가 부럽다는 표정이다. “치마라 시원하겄어.” “아가씨라고 원피스 줬구만. 좋겠네.” 너털너털 몸뻬를 흔들어대는 그분들 앞에서 불만 섞인 표정을 지을 수는 없는 법. “그러게요. 바람이 통하니까 좀 나아요.”
이날 촬영에 동원된 보조출연자는 총 89명. 분장을 기다리는 줄이 컨테이너 앞에 길게 늘어서 있다. 1시간 반의 기다림 끝에 이어진 10분여의 분장. 흙빛의 파우더를 두드리는 능숙한 손놀림에 얼굴은 어느새 뙤약볕 세례를 평생 받아온 양 거뭇거뭇해졌다.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실핀을 냅다 꽂으니 완벽한 판자촌 여인으로 변신. 슬금슬금 피하던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우하하 폭소가 터져나온다.
정말 내면 연기를 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들
분장을 마치고 나온 시각은 저녁 7시. 식사 뒤 8시부터 촬영이 시작해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이어지는 밤샘 강행군이다. “오늘 촬영하는 장면은 성당 안에서 주민들이 노래를 듣는 장면이에요. 비닐하우스 안에 성당을 만들어놨는데 저 안에 냉방이 전혀 안 돼서 많이 힘드실 겁니다.” 실장의 브리핑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또다시 찜통 더위라니. 그나마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좀 수월하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기대는 비닐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곧장 흩어져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텁텁한 열기. 43번. 지정 좌석을 찾아 앉는데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물이라도 좀 줘봐요!” 하는 불평부터 “돈 안 들이고 사우나하고 좋지 뭐” 하는 능청스런 여유까지 출연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 하지만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좌중은 일순 잠잠해진다. 박철웅 감독이 직접 나서 장면을 설명한다. “삶에 찌들었던 주민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는 장면입니다. 얼음이 녹듯 마음의 응어리들이 싹 녹아내리는 감정을 표현해주셔야 합니다. 정말 연기를 해주셔야 돼요.”
얼음이 녹아내리듯?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예 ‘내면 연기’를 해야 한다니. 겸연쩍은 마음에 곁눈질을 해봤더니 웬걸,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하다. 정말로 눈물을 글썽거리시는 할아버지, 충격을 받은 듯 입가에 손을 가만히 가져다대는 아주머니, “정말 좋다”며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콤비까지. ‘감동받아라’라는 지시 하나에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 박수 하나를 칠 때도 온몸을 흔들어가며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이들은 분명 배우들이다. “사실 더운 것 빼면 힘든 거 없잖아요? 사람을 무시하고 짐짝 부리듯 하는 곳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여기는 우리를 연기자로 대우해주잖아.” 뻘쭘하게 앉아 연신 부채질을 해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44번, 옆자리의 아저씨가 다독이듯 이야기한다. ‘연기’라는 단어에 눈을 빛내는 사람들.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자기 몫을 제대로 해내겠다는 욕심이 느껴지는 이곳에서 어색한 방관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법. 생초짜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연상법’을 발휘, 27년 생애 존재했던 모든 감명적인 사건들을 끄집어냈다. 기분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만 같다.
각양각색 사연을 담은 얼굴들
시곗바늘이 3시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하나둘, 전사자들이 속출한다. 카메라가 멈출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픽픽 고꾸라지는 사람들.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툭툭 때린다. “아가씨, 이거 발라봐.” 뒷줄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건네는 것은 다름 아닌 물파스. 팔뚝에 대고 슬슬 문지르니 화~한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다들 일어나세요!” 사인이 떨어지자 엎어져 있던 사람들도 금세 고개를 들고 자세를 곧추세운다. 물파스의 위력일까 아니면 비닐하우스 안을 지배하는 묘한 열기에 동화되어버린 걸까. 망설임과 어색함은 완벽히 사라져버렸다. 먹먹해진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 그렇게 ‘감동 먹기’를 수십 차례. 멈춰버린 것 같던 시간이 흘러 어느새 예정된 종료시각 6시다. 흐느적대며 비닐하우스 밖으로 빠져나오자 날이 밝고 있다. “일당 드려야지. 그 돈 쓰지 말고 고이고이 간직하세요.” 실장이 웃으며 하얀 봉투를 건넨다. 6만5천원. 밤샘촬영이기에 기본 수당의 2배에 추가 수당 5천원이 붙은 액수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 눈을 붙이기 위해 좌석을 젖힌 채 누웠지만 현장의 여운이 쉽사리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엑스트라. 보조출연자를 비하하는 말으로 여겨진다는 이야기에 이틀 동안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단어를 되뇌어본다. 그전까지 떠올렸던 것이 희뿌연 군중의 실루엣이었다면, 이제는 각양각색의 사연을 담은 얼굴들이 또렷하게 살아난다. 그 얼굴들을 하나로 잇는 것은 꿈과 땀. 영화라는 커다란 화폭에 든든한 밑그림을 그려내는 수많은 꿈과 땀이다. 엑스트라. 그 단어의 올바른 사용법은 extra(여분)가 아닌 extra(특별)한 연기자가 아닐까. 그들과 함께한 24시간이 가져다준 작은 결론은 그렇다.
보조출연자 5계명
하나. 30분 일찍 준비하라. 촬영장에서는 필요한 인원보다 많은 수를 부른 뒤 선착순으로 자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허탕을 치고 싶지 않다면 30분 정도는 여유를 갖고 도착할 것.
둘. 의상 3벌은 기본이다. 일반적인 현대물의 경우 캐주얼 2벌과 정장 1벌을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실제 계절과 작품 속 계절은 다를 수 있으니 유의할 것. 빨간색, 노란색 등 지나치게 튀는 원색의 옷은 피해야 한다.
셋. 연락처 관리는 생명이다. 촬영 스케줄은 대부분 촬영 전날 급히 확정된다. 언제 어느 때고 통화가 가능한 연락처를 소속사에 남겨놓을 것. 친한 출연자들끼리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도 좋다.
넷. 이미지를 만들어라. 수많은 보조 출연자들 중 선택받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하나쯤 구축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아줌마면 아줌마, 회사원이면 회사원 등 특정 역할이 필요할 경우 곧장 자신에게 연락이 오게끔 하라.
다섯. 기다림에 대비하라. 촬영이 한두 시간 지체되는 것은 흔한 일이고, 하루 종일 ‘광을 팔 때도’(속어로, 일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을 의미)있다. 뜨개질을 해도 좋고 공부를 해도 좋다. 남는 시간에 할 만한 무언가를 준비할 것. | | | | | | | | | | | | | |
첫댓글 무비 박실장님 보이시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