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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의 왼쪽 인물이 장작림이고, 오른쪽에 지팡이를 들고 앉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오패부입니다. 오른쪽에 젊은 날의 장개석 사진도 보이는군요.
직봉대전은 군벌 항쟁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전쟁들이었으며, 모두 장작림과 오패부가 서로를 치기 위해 일으킨 전투입니다. 순리대로 따지자면 둘은 원수 중의 원수이며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제의 적이 오늘날의 동지가 되어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군벌을 잘 설명해주는것으로, 어떠한 이념도 없는 그들은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서로 뭉쳤다가 다시 흩어졌다가 할 수 있습니다. 민국 시절의 정세란 진정한 친구도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작림과 오패부는 서로 공동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풍옥상의 이야기입니다.
오패부처럼 풍옥상에 대한 적대감이 당연한 인물도 현재 없습니다. 제 2차 직봉대전에서 오패부는 풍옥상의 북경 정변 사건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제 천하를 장작림에게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풍옥상, 호경익, 손악의 모반이 벌어지고 1924년 11월 3일, 오패부는 비참한 심정으로 병사 5,000여명을 데리고 군함에 타서 남쯕으로 달아났습니다. 12월 중순 무렵 그는 남경에 도착했는데, 당시 남경의 주인은 제섭원이었습니다. 제섭원이 오패부를 맞이하러 왔지만 오패부는 어쩐히 꺼림칙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2월 17일 한구에 도착했습니다.
오패부는 무창에서 10개 성의 대표들을 소환하고, 호헌군정부 수립을 선포하며 중화민국을 대표하면서 자기가 모든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패배한 개가 된 오패부의 말을 들을 사람이 없었기에 모두 반대했고, 그는 무한을 떠나 악주로 가서 재기를 노렸습니다. 오패부가 반봉의 기치를 들면서 그 밑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오패부가 차근차근 복수의 칼날을 기를때, 기회가 왔습니다. 1925년 10월 20일 장강 유역의 직계 군벌들이 반봉의 기치를 내세웠고, 강소, 안휘, 강서, 복건, 절강 등 5개 성은 손전방을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해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명망 깊은 오패부에게도 같이 토벌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오패부는 당연히 적을 토벌하겠다고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오패부의 군략이 신출귀몰하다고 잘 알려져 있어서 진군 계획은 오패부가 짰습니다. 하남을 경유해서 북으로 직예와 산동을 공격하고 동남과 연합하여 북경과 천진으로 군대를 몰고 간다는 것인데, 사실 내심으로는 장작림과 연합해서 풍옥상을 친다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송령의 반란 중에 풍옥상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1월 22일 곽송령이 반란을 시도할때, 풍옥상 소속 국민군의 2,3군은 풍옥상의 만류도 무시하고 약속을 팽개친 채 기회를 틈타, 같이 삼각 합작을 맺은 이경림의 부대를 공격했습니다. 손악이 있는 섬서를 공격해볼수도 있었지만 그곳이 빈곤하다고 이경림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건 풍옥상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풍옥상은 자신이 곽송령과 밀약을 맺었고, 경솔하게 부대를 움직이면 안된다고 설명을 했지만 그 소속 국민군이 욕심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곽송령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보다 이전에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 대표회의가 광동성의 광주에서 열렸고, 198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이대조, 진독수, 모택동, 장국도, 이립삼, 이유한 등 공산당 인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의 시각이 많이 반영되었고, 쑨원은 이에 영향을 받아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과 손잡고 공업과 농업을 장려한다." 는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모택동
풍옥상은 쑨원을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쑨원의 태도가 저러자 자신도 소련과 진일보 접촉을 하기로 했고, 소련 군사고문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공산당원 보로진을 소개받아 자주 접촉했고, 보병과 기병, 포병 등 각 전문 인력을 초빙해서 훈련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장작림은 중국의 적화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풍옥상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역시 오패부도 적화에는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풍옥상을 원수로 여기며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둘은 이 문제에서 마음이 들어맞았습니다.
곽송령의 반봉이 일어났을때, 장작림은 오패부와 합작이 필요하다고 여겨 몰래 사람을 보내 서로 통했고, 결국 1926년 1월 10일 쯤에는 합작이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곽송령 반봉 시에 오패부는 장작림 이렇게 위로를 해주기도 합니다.
"이전에 풍옥상이 배반하여 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현재 곽송령이 배반하여 귀하의 마음이 매우 아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평생에 가장 통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변절하는 소인배들입니다. 현재 귀하를 돕고 싶습니다."
이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주는 격입니다. 그리고, 내가 풍옥상의 반란이 일어나서 망할때 너는 기분이 좋았겠는데, 이제 네놈의 개가 너의 발끝을 물어뜯으니 내 심정을 알겠느냐, 이러한 뜻도 됩니다.
현재 정세가 매우 어지럽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장작림은 남경까지 장악을 한 상태에서, 손전방의 5개 성 연합군이 일어나며 밀려났습니다. 오패부는 5개 성 연합군에 참가하긴 했는데, 장작림과 몰래 연락을 취했습니다. 곽송령의 반란으로 매우 위급해진 장작림도 이 연락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풍옥상, 이경림은 곽송령과 합작을 맺었는데, 풍옥상 소속 국민군이 폭주하며 이경림을 공격했습니다. 이경림은 막아낼 재주가 없어 산동의 장종창에게 도움을 구했고, 장종창과 함께 풍옥상에 대적했습니다. 곽송령 - 풍옥상 - 이경림의 삼각 합작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곧 이어 관동군의 도움으로 장작림은 곽송령을 물리쳤습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곽송령 - 풍옥상 - 이경림은 장작림을 힘을 모아 타도하면 그만인데,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이렇게 꼬여버렸습니다. 풍옥상은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이유도 모르고 밑도 끝도 없는 전투였다. 어떻게 되어 싸우게 되었는지 물러나 스스로 생각해 보니 참으로 마음 아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모두가 내 학식이 모자라고 방법이 부족한 탓이다. 나는 국내의 이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와 외국으로 가 더 공부를 하고 싶다."
결국 풍옥상은 자기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다 물려주고, 1926년 1월 전쟁 종식을 위한 하야를 발표하고 러시아로 가버렸습니다. 장작림은 장작림대로 풍옥상의 세력을 없애버리려고 하고, 오패부도 "풍옥상이 말로만 하야하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군 장비와 군 부대를 모으고 있다." 고 하며 4개 여단을 이끌고 풍옥상을 토벌한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풍옥상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하야하고 외국으로 가 버린것을 모른채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했습니다.
이 무렵 북경 정부에 머물고 있던 단기서 임시 집정에 대해 8국의 공사단이 항의를 한 사건이 있습니다. 북경 주변에서 장종창, 이경림 등의 군대와 국민군의 전투가 격렬해지자 항의한 것입니다. 1926년 3월 12일에는 두 척의 일본 군함이 항의의 표시로 국민군에게 포격을 해버리는 사건까지 생겼습니다. 이른바 '대고구 사건' 인데, 이런 난장판 속에 보다못한 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은 전쟁 반대, 제국주의 반대 등을 내세우며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시위는 정부 소재 지하철도 골목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정부의 경호대가 학생들에게 실탄을 발사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47명이 사망했고, 200여명의 젊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과 세계를 놀라게 한 3.18사건이었습니다.
루쉰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민국 이래로 가장 암흑한 날” 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단기서는 경호대의 발포는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며 심지어 이런 소리까지 해대었습니다.
"나는 경호대에 대해서 어떤 징벌도 하지 않겠다. 오히려 상을 주려고 한다. 이번 사건은 불순분자와 학생들이……"
광동의 국민정부는 이런 말에 항의하면서 3월 27일 단기서 축출 선언을 했습니다. 결국 온갖 비난에 단기서는 하야했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점차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주인을 잃은 풍옥상의 국민군이 밀려나고, 단기서가 물러나자 북경에 등장한것이 오패부입니다. 오패부는 무인지경인 북경에 다시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장작림은 오패부가 북경을 장악하면 간섭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북경 정부를 어떻게 세우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갈렸습니다.
오패부는 오패부대로 꼭두각시를 총통으로 만들어 휘둘 생각이고, 장작림은 그것을 막으려고 하면서 서로 눈치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장학량은 4월 26일 심양에서 장작림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우선 군사 문제를 해결하시죠. 그리고 정치 문제를 해결합시다. (풍옥상의)국민군이 지척에서 아직도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서로 그렇게 눈치를 보는데, 갑자기 5개 성 연합군 총사령 손전방이 북경의 오패부에게 '우리 장군님'이라는 표현을 쓰며 오패부 지지 의사를 보였습니다. 봉계를 견제하려면 오패부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했습니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장작림은 오패부에게 이렇게 답을 주었습니다.
"이번 일은 모두 형께서 주관하시고 마음대로 하시구려. 아우는 조금도 이견이 없습니다."
오패부는 사양 한번 안하고 이렇게 대답을 주었습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니, 그 높은 뜻에 부득히 따를 수밖에 없지요. 예.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내각을 조직해버렸습니다. 내각의 구성원 모두가 오패부의 사람들이었고, 봉계는 내무총장, 육군총장 두 자리만 장경혜 등이 차지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패부는 언론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봉계 장작림과는 처음 결혼한 부부와 같습니다. 간혹 몇 마디 다툴수야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우리들의 감정은 차차 좋아질 것입니다."
1926년 북경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이 장작림이고, 키 큰 사람이 장종창이며, 지팡이를 잡고 있는 인물이 오패부이고, 오패부의 옆에는 장학량입니다.
오패부와 장작림은 손을 잡고 풍옥상을 밀어내버렸고, 다시 풍옥상의 세력 모두를 밀어버려야 한다는데는 의견이 동의해 군사적인 합작은 취하고 있으나, 내각 문제등에서 계속 이렇게 눈치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그런 중에 오패부와 장작림, 두 명이 모두 북경에 모여 회담을 하자는 말이 나와 두명의 거물은 북경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삼엄한 경비 속에 장작림은 50여대의 차를 대동하고 위풍당당하게 마치 황제의 입성처럼 등장해씃ㅂ니다. 오패부 역시 44량이 달린 특별 열차로 출발했고, 하늘에는 두대의 비행기가 떠서 보호했습니다. 두 명다 하는 모습이 황제의 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28일의 오전 9시 30분. 장작림은 오패부가 묶고 있는 곳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오패부는 계단 밑으로 내려와 악수를 환영해고, 20분간 짦은 대화를 하다 헤어졌습니다. 점심 무렵 오패부는 답방 형식으로 장작림에게 찾아왔습니다.
"형님 오셨구려."
그렇게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은 아주 친해보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축하연으로 가서 연회를 즐기는데, 갑자기 연회 도중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 툭!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렇게 사이가 좋아보이던 오패부와 장작림의 측근들은 모두 어디에 숨겼는지 권총을 꺼내들고 서로를 겨누었습니다. 오패부와 장작림도 벌떡 일어났는데, 알고보니 걸어놓은 모자가 옷걸이에서 떨어져서 나던 소리였습니다. 둘은 어색하게 자리에 다시 앉았는데, 이는 당시 서로의 친한듯한 모습이 얼마나 빚좋은 개살구인지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 논의에서 한가지 방책이 결정되었는데, 아직 남아있는 풍옥상의 국민군을 소탕하는 작전에 대한 것입니다. 장작림은 웃으면서 군사 문제에 대해 오패부에게 전권을 주기로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모두 형님 지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부대가 형님 부대 아닙니까?"
장작림은 국민군과 싸우는 골치 아픈 문제를 오패부에게 맡겼고, 오패부는 오패부대로 자신의 군사 지략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좋아했습니다. 둘은 그렇게 기묘한 합작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과연 언제까지 이런 형세가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첫댓글 마지막은 진짜 웃기네요... 모자 떨어지는 소리에 권총까지 꺼내들다니...ㅋㅋㅋㅋ
정말 정신이 없는 시대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