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戚
權大任 墓碣銘[許穆]
公諱大任, 字弘輔, 姓權氏。 其先永嘉人。 永嘉之權自太師幸得姓來八百年世, 多達官貴人, 號爲大族。 曾大父常以善行特聞, 爵至同中樞, 後贈領議政、東興府院君。 大父悏以功業貴爲名臣, 官至禮曹判書, 封吉昌君, 贈領議政、吉昌府院君。 父信中連守郡邑, 贈左贊成, 襲封吉興君, 後加贈右議政。 母李氏贈貞敬夫人, 世宗別子廣平大君璵之七世孫, 而司評廷弼之女也。
萬曆二十三年十一月廿四日, 公生。 生而秀而媺, 聰敏善學。 甫十年, 才藝夙成。 尙貞善翁主, 爲吉城尉, 上寵愛之殊甚。 公尤長於筆法, 上稱善不已, 賞賜無數, 累進階至通憲。 純孝大王二年, 李适叛, 上狩公山, 公從, 上陞奉憲。 十三年, 封吉城君, 吉興君卒而旣卒喪, 以元功嫡孫襲封者也。 明年冬, 淸人入京城, 又從上於南漢, 進崇德, 再爲都摠管。 後三年, 奉使瀋陽。 時國家新去亂, 悉捐橐中裝, 贖還旄倪之未返者, 人心德之。 二十三年十月廿六日, 公卒, 春秋五十一。 公在疾, 上特以儀賓尊屬醫藥屬路。 訃聞, 上爲之罷朝巷市, 賜弔賻如儀, 命有司庀葬事, 禮也。 以宣武原從追加綏祿大夫, 爲正一品。
公仁親篤厚, 善於父母昆弟, 以及宗族。 父母旣歿, 有二弟一妹, 公均其臧獲, 必擇其善, 饒而厚給之, 猶恐其不如父母之視之也。 其一弟年最少, 公甚愛育之, 其衣食服養一視己而無缺。 性恬靜儉約, 自處如儒士。 善與人忠, 愛好文雅, 一時薦紳文學多慕與之遊者。 平生不爲奢縱逸樂, 雅飭惟謹, 士大夫愈賢之。 國制: 主家有賜奴、賜田, 而公不肯准受, 曰: “吾受恩已厚, 復以此煩有司, 不知足也。”
主昭敬大王女, 而靜嬪閔氏出也。 嬪, 康靖大王婿驪川尉子芳之孫, 江華都護府使士俊之女也。 嬪賢而好禮節, 主恭敬謹飭, 克順婦德, 蓋素所敎訓然也。 主生於萬曆二十二年四月一日, 卒於四十二年八月一日。 主長於公一年, 春秋二十一, 葬於富平之水呑, 至是乃合葬焉。 有一男曰瑱, 敦寧奉事。 瑱生二男二女: 男以經、守經。 婿二人: 承旨吳始壽, 生員洪萬朝。 以經生四男一女, 皆幼。 吳始壽生二男二女: 長男尙游。 婿一人, 李景鴻, 餘幼。 洪萬朝生二男一女, 皆幼。 又有庶出子二人: 琳, 璉。 銘曰:
尊而能讓, 貴而能下。 仁愛篤善, 戒愼不惰。 中樞三世, 吉昌之孫。 賢善有自, 忠孝之門。
권대임[權大任]의 묘갈명(墓碣銘) 허목(許穆)
길성군(吉城君) 권공(權公) 묘갈명
공의 휘(諱)는 대임(大任), 자(字)는 홍보(弘輔)이고, 성은 권씨(權氏)인데, 그의 조상은 영가(永嘉) 사람이다. 영가 권씨는 태사(太師) 권행(權幸)이 성씨를 하사받은 이후 8백 년간 대대로 고관 대작(高官大爵)이 많이 나 대성(大姓)으로 호칭되었다. 공의 증조 권상(權常)은 선행(善行)으로 특별히 보고되어 벼슬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동흥 부원군(東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할아버지 권협(權悏)은 공로로 고귀한 명신(名臣)이 된데다가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길창 부원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권신중(權信中)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잇따라 지냈는데, 사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길흥군(吉興君)에 습봉(襲封)되고 그 뒤에 우의정(右議政)의 벼슬을 더 추증하였다. 어머니 증(贈)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세종(世宗)의 아들 광평 대군(廣平大君) 여(璵)의 7세손이자 사평(司評) 이정필(李廷弼)의 딸인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3년(1595년 선조 28년) 11월 24일에 공이 태어났다.
공이 태어날 때부터 수려한데다가 총명하여 공부를 잘하였으므로, 나이 겨우 10세에 재예(才藝)가 숙성하였다. 정선 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총애하였다. 공이 특히 서예(書藝)에 뛰어났으므로 임금이 칭찬해 마지않고 수없이 상을 내렸는가 하면 누차 승진되어 통헌 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순효 대왕(純孝大王, 인조(仁祖)) 2년(1624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임금이 공산(公山,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으로 피난갔을 때 공이 수행하였는데, 그 공로로 봉헌 대부(奉憲大夫)로 승진되었다. 13년(1635년)에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는데, 이는 길흥군의 삼년상(三年喪)이 끝나자 선무 공신(宣武功臣)의 적손(嫡孫)이라고 하여 습봉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 겨울에 청(淸)나라 군대가 한양(漢陽)으로 진입하자 공이 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가는 어가(御駕)를 수행하였으므로 숭덕 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어 재차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그 뒤 3년이 되어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때 나라에 막 난리가 지나갔으므로 행장에 든 재화(財貨)를 다 털어 포로로 잡혀가 돌아오지 못한 노약자(老弱者)들을 상환해 돌아오니, 인심이 그 은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순효 대왕 23년(1645년) 10월 26일에 공이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1세였다. 공이 병상(病床)에 있을 때에 임금이 특별히 의빈(儀賓)의 존속(尊屬)이라고 하여 하사한 의약(醫藥)이 노상에 줄을 이었다. 공의 부음(訃音)을 보고하자 임금이 조회와 저자를 중지하고 의례와 같이 조부(弔賻)를 내리고 담당관을 명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는데, 이는 예를 따른 것이었다.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유록 대부(綏祿大夫)를 추가하여 정일품(正一品)이 되었다. 공이 근친(近親)에 대한 자애가 두터워 부모와 형제에게 잘하였고 종족에게까지 미루어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두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에게 노비(奴婢)를 균등하게 나누어주되, 반드시 그중에서 제일 좋은 노비를 골라서 후하게 주고 난 뒤에도 부모처럼 하지 못하였을까 염려하였다. 그중나이가 가장 적은 아우 하나를 매우 사랑하여 의복과 음식을 똑같이 입히고 먹이어 부족함이 없었다. 성품이 차분하고 검소하여 선비처럼 생활하였고 사람들과는 신의와 사랑으로 잘 사귀며, 문아(文雅)를 좋아하였으므로 일시의 벼슬아치와 문학자들 중에 사모하여 같이 노니는 사람이 많았다. 평생 동안 사치하거나 방종하지 않고 몸가짐을 신중히 하였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더욱 훌륭하게 여기었다. 국가의 제도에 옹주(翁主)의 집에는 노비와 토지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은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후한 은총을 받았는데 또다시 이것을 가지고 담당자를 번거롭게 한다면 만족할 줄을 모른 것이다.”고 하였다. 옹주는 소경 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의 딸로 정빈(靜嬪) 민씨(閔氏)가 낳았다. 정빈은 강정 대왕(康靖大王, 성종(成宗))의 사위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의 손자이자 강화 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 민사준(閔士俊)의 딸이었다. 정빈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는데, 옹주가 공순하고 근신하여 부덕(婦德)을 잘 지킨 것은 평소에 교훈을 받아서 그런 것이었다. 옹주는 만력(萬曆) 22년 (1594년 선조 27년) 4월 1일에 태어나 42년(1614년 광해군 6년) 8월 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옹주의 나이는 공보다 한 살 더 위였고 향년 21세였다. 부평(富平)의 수탄(水呑)에 묻히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공과 합장(合葬)하였다. 1남 권진(權瑱)을 두었는데, 돈령부 봉사(敦寧府奉事)이다. 권진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이경(權以經), 권수경(權守經)이고, 사위는 승지(承旨) 오시수(吳始壽), 생원(生員) 홍만조(洪萬朝)이다. 권이경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오시수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오상유(吳尙游), 사위는 이경홍(李景鴻)이고, 그 나머지는 어리다. 홍만조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이 또 서출(庶出) 2남을 두었는데, 권임(權琳)과 권연(權璉)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지체가 높아도 겸손하고 신분이 귀해도 굽히었지. 자애롭고 독실한 선행으로 신중 기해 게으르지 않았네. 동중추(同中樞)의 증손이자 길창군(吉昌君)의 손자였네. 현철이 그 유래가 있으니 충신과 효자의 가문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