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예순아홉, 망팔(望八)이 바로 눈앞이다. 망팔은 여든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일흔한 살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은 통상 평균 수명을 따져서 자신이 살 날을 손꼽아 보곤 한다. 한국인의 남자 평균 기대수명이 2020년 기준 얼추 여든이다. 나도 어느새 강 건너 불구경 할 입장이 아닌 처지가 되었다.
이맘때의 나이는 하루하루가 금싸라기와 같다. 하지만 코로나로 모든 게 일그러진 시국에는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손주를 돌보거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본다거나, 괜히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한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자연스레 유선방송에서 제공하는 영화를 벗 삼은지 오래다. 사이사이 곁들이는 광고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오빠 부대의 원조이자 한 시대를 풍미하던 국민 가수가, 내 먹어 가는 귀를 솔깃하게 한다.
“남자는 말이지 전립선하고 지구력이 좋아야 쓴다.”
월남전에 참전했으니 나보다 한참 연상일 게다. 그런데도 전립선에 이상이 없음을 자랑하고 있으니 혈색 좋은 그의 건강이 부럽다.
전립선은 나의 아픈 자존심이기도 하다. 한때 건강검진에서 전립선에 관련된 수치가 정상인의 2배 가까이 나왔었다. 여러 처방과 물리요법을 동원한 끝에 가까스로 정상치로 돌려놓았다. 남자는 그게 안 좋으면 꼭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처럼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한참 전립선으로 고전할 때, 늦깎기로 시작한 방송대의 원격 수업은 마침 ≪고전시가강독≫의 민요를 강의하고 있었다. 민요는 노동가, 여가, 의식과 정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중 여가요(餘暇謠)는 소비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부르는 노래다.
뒷산에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파는데
우리 집의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 찾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옛사람들의 익살이 흠뻑 베어든 <진도 아리랑>의 일부다. 야하면서도 표현의 은유가 입가에 미소를 절로 번지게 한다.
우리 집의 이놈과 비교되는 그놈은 뒷산을 오르다 보면 자주 접한다. 비탈진 나무에 수직으로 붙어서 “따닥 따닥”하는 소리를 내면 영락없는 딱따구리다. 정수리에 빨간 무늬는 수컷, 없으면 암컷이다. 한때 방송에서도 딱따구리를 다룬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빨간 머리를 한 그놈은 웃음소리가 특이했다.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으헤헤헤헤 으헤헤헤”하고 기이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앞의 민요에 꿰맞추니 절묘하게도 멍텅구리에 대한 비웃음이 아닌가. 인생의 봄은 저물어 가는 노생(老生)들의 이상향이다.
자연의 새벽을 여는 조춘(早春). 그 길목에서 기다리는 꽃이 있다. 엄한(嚴寒)을 뚫고 온다 하여 시인 묵객들이 찬사를 늘어놓는 문인화(文人花)이다. “온갖 꽃이 미처 피기도 전에 맨 먼저 피어나서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 준다.”는 단순한 말이 오히려 더 돋보인다. 평양기생 매화(생몰 일시 미상)의 ≪병와가곡집≫에 수록된 시조도 이 꽃을 소개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다.
이런 만인이 찬양하는 계절에 떠난 박복한 이는 누구일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선친은 봄에 세상을 버리셨다. 그때, 상여 나가는 날 선산으로 가는 언양 작천정 길에는 하얀 벚꽃이 흐드러졌었다. 간월산과 작괘천 계곡의 춘색(春色)은 더할 나위 없었다. 제사 때면 항상 떠 오르는 장면이다. 그즈음이면 아들과 조카들에게 옷깃을 여미며 해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보는 주검은 죽음이 아니다. 아무도 기억해 주는 이가 없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우리를 있게 해주신 데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코로나의 여파로 제사는 시늉만 내고 있다. 안타깝지만 부모님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삽짝 앞의 봄은 연년의 그 봄이 아니다. 지난 한 해 묵묵히 버텨 낸 이에게 하늘이 내리는 특별한 선물이다. 온갖 생명을 잉태한 것들이, 다시 흐르거나, 치솟거나, 터뜨릴 것이다.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활기차게 맞아들여야 한다. 혹시 긴긴 겨울이 끝나가는 이런 호시절에 갓 쓰고 시커먼 두루마기를 걸친 자가 막아선다면,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애원해 보자. 이미 무고한 많은 이를 데려갔으니 이제 그만 멈추시라고, 그게 안 먹히면 어느 노랫말처럼 할 일이 남았다고 뻗대어나 보자.
다 떨치고 봄 마중을 나선다. 스치는 바람에 춘기(春氣)가 돈다. 코로나로 암울했던 사회의 그늘진 곳에도, 곧 희망의 새싹이 돋아 오르겠지 회춘(回春)은 온 우주 삼라만상 무엇에게나 선망의 대상이다.
첫댓글
(감사의 말씀)
이 글을 올린 조희자 선생님과는 부경대평생교육원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입니다.
그런 인연으로 올려진 글이 이렇게 호평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애독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기회 있으면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건강에 항상 유의하셔서 회춘하시기 바랍니다.
김선경 드림
이 밤 좋은 꿈 꾸시고, 내일 '회춘' 을 능가하는 글 문이 터이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대 가져 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상하고 갑니다
인생의 연륜이 담뿍 묻어나는 문구 이십니다
앞으로도 멋진 글 부탁드립니다
이번주 베스트 1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