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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차: 2016년 8월 10일(수)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아침식사를 호텔에서 해결하고 7시 20분경 숙소를 나선다. 숙소 앞 도로에는 모노레일 전차가 지나가기도 한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 수상도시 베네치아로 향한다. 육지에서 수상도시까지는 현재 다리가 놓여있으니 일종의 연육교라 하겠다. ‘자유의 다리’라고 부르는 이 다리의 길이는 4km 이고 독재자 무솔리니가 통치하던 1940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다리에는 차도와 함께 철도가 놓여있어, 프랑스 파리에서 이곳 베네치아의 산타 루치아 역까지 기차를 이용하여 올 수 있다고 한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는 유명한 인물들이 있는데, 바람둥이 카사노바와 기악곡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가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카사노바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대단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사인데 그 시대에는 이런 자유분방함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과 관련하여 비발디가 이곳 출신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간다. 비발디의 대표작 ‘사계’는 베네치아에서 느낀 계절의 변화를 기악곡으로 표현한 것인데,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친숙한 클래식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 출신의 작곡가, 비발디의 '사계' 감상
* 카사노바(1725~1798):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데 세인갈트(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라면 모르는 사람도 ‘카사노바’라면 금세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18세기 사람인데도 자유로운 성을 표방하며 산 그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있다. 카사노바라는 이름이 워낙 유명해지자 그의 이름은 ‘여성을 유혹하는 기술’과 동의어로 남아있으며, ‘세계 최고의 연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카사노바가 바람둥이 자체로 평생을 살았다면 결코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이 기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보다 더한 호색한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그는 모험가이자 작가이고, 시인이면서 소설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직자, 바이올린 연주자, 병사, 도서관 사서, 번역가, 스파이, 철학자, 도박꾼, 복권의 창안자, 연금술사가 그에게 붙는 수식어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경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매우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꺼이 사기당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바보 노릇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바보를 놀리는 일을, 사기를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사기꾼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자서전이기도 하고 회고록이기도 한 그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는 18세기 유럽 사회생활의 관습과 규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 중 하나로 평가된다. 물론 그가 책에서 여자들과의 정사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바람에 당시에는 도덕상의 이유로 출판되지 못했다. 책은 카사노바가 사망한 후 1822년에서 1828년 사이 독일의 빌헬름 폰슐츠에 의해 개작되어 처음으로 출판된 후 1960년에 브로크하우스 판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무삭제판이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일이 설령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18세기 사람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사고다. 그의 고백은 솔직했는데 이는 도덕적 논리를 앞세우는 허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가 당대인들로부터는 못된 호색가로 평가받았지만 현대인들로부터는 에로티시즘(eroticism)을 대중 앞에 공개시킨 사람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의 지론은 성은 종교나 신분, 사회적 통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의 권리이므로 누구나 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성을 위하여 태어났다는 사명을 느꼈으므로 늘 사랑하였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였고 그의 촉수는 언제나 상류사회를 향해 열려 있었다> "나는 여자들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러나 자유를 더 사랑했다."던 베니스 출신의 카사노바가 1798년 6월 4일 말년을 보낸 체코 둑스 성에서 73세로 그는 숨졌다.
그는 죽기 전 둑스 성에서 13년간을 사서로 지내며 자신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를 탈고해 자신의 존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렸다. 교황 클레멘스 13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러시아의 예카트리나 여제 등 당대의 실력자들을 만나서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고, 계몽사상가 볼테르를 만나서는 그의 사상을 반박했다. 넘치는 재능과 해박한 지식은 신분 상승을 위해 상류사회를 기웃거릴 때도 활용됐지만 여성들을 탐할 때도 동원됐다. 2m나 되는 큰 키와 남자다운 풍채를 겸비한 그에게 여성들은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의 여성관은 자서전 서문에 드러나 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현지가이드님을 만나게 되었다. 중년의 남자분인데 경력이 많아서 인지 무척 재미있고 박식(博識)한 분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훈족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갯벌에 말뚝을 박아 수상도시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약 1,000년 동안 말뚝 박기가 이어졌다고 한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도 이곳에 반하여 한동안 거주하였으며, 십자군 전쟁 중 4차 원정 때 출정(出征)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수상 도시에는 97개의 성당이 존재하는데, 1개의 성당을 만들 때 대략 10만 개의 말뚝을 박아 건물을 완성하게 된다고 한다. 석조 건축물이 갯벌에 박은 말뚝을 기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여기에는 놀라운 과학적 원리가 작용되리라고 추측된다. 나무말뚝과 갯벌의 진흙이 견고한 결합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옛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리라.
우리는 선택 관광의 첫 번째 일정으로 수상택시에 분승하여 S 대운하를 따라 수상도시의 경관을 둘러보았다. 수상택시에 올라탈 때 보니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이를 고려하여 뜬 다리 부두가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수상택시는 대 수로를 따라 신나게 달린다. 눈으로는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면서, 귀로는 현지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을 열심히 듣게 되었다. 카메라의 셔터버튼을 열심히 누르면서 가끔씩 휴대폰을 이용하여 동영상 촬영도 시도하였다. 가는 곳곳마다 절경이었다. 해안에서 멀지않은 잔잔한 바다위에 오랜 기간 인간의 공력(功力)으로 이루어진 수상도시 베네치아, 누군가 말하길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우리의 가이드님도 유럽 여행 중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이 컸던 곳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채색에 조각 작품처럼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또한 1,500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고풍스런 분위기를 만들었으니, 도시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 같다.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지탱해주는 말뚝은 ‘백향목’이라는 단단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건물 하부에 박혀있는 노출이 안 되어 볼 수 없겠지만 부둣가에 배를 묶기 위해 갯벌에 박아 놓은 수많은 백향목 말뚝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나무는 원래 단단한 나무이지만 바다에서 염분을 흡수하면서 쉽게 썩지 않고 더욱 잘 견딜 수 있는 소재가 된 것 같다.
수상도시 베네치아는 하나의 자치도시답게 행정기관, 경찰서, 소방서, 학교 등 공공기관을 다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 대신에 수상택시, 수상버스, 곤돌라 같은 배를 이용하여 사람과 짐을 운반하고 있으니 불편한 점도 많으리라. 그래서 물건 값이 육지보다 약 7배 정도 더 비싸다고 한다. 부동산 가격도 대단하여 이곳에 주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이라고 한다. 수상도시에 사는 베네치아 주민들의 국민소득(GNP)은 대략 7만 달러에 이른다고 하니, 이탈리아 국민들의 평균소득보다 두 배 정도 높다고 볼 수 있겠다. 이곳 주민들의 높은 소득은 관광업의 혜택일 것으로 추측된다.
곤돌라의 뱃사공은 반드시 이 지역민이어야만 가능하고, 이들의 소득은 타 직종에 비해 꽤 높다고 한다. 곤돌라는 뱃사공이 노를 저어서 움직이는 속도가 느린 배이지만 그 고풍스런 느낌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한번쯤 타게 된다. 곤돌라의 장점은 큰 배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 같은 좁은 수로를 유유히 통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곤돌라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물(名物)이라 할 수 있겠다.
베네치아 대수로를 오가는 수상택시
베네치아의 명물, 곤돌라의 모습
우리는 수상택시 체험을 끝내고 수상도시 베네치아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산 마르코 성당이 위치한 광장에 도착하였다. 9세기에 건축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천 년이 넘은 성당 건물이다. 비잔틴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하는데, 이슬람 건축기술자들을 초청하여 성 마르코 성당을 건축하였다고 전해진다. 성당 앞쪽에 조성된 성 마르코 광장은 여러 가지 행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보인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 때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십자군이 이곳에 머물며 대오(隊伍)를 정비하고 출정하였던 적도 있다고 한다.
광장을 에워싸는 회랑 건물들도 모두 아름답고 고풍스런 건물들이다. 현지가이드님이 설명을 할 때 마침 성당의 종각에서는 타종(打鐘)이 이루어졌는데 그 울림이 참으로 신비하고 경건하게 느껴졌다. 광장 한쪽에는 플로리 카페(우리말로 꽃 다방)가 위치하는데, 커피 가격도 비싸지만 어느 위치에 앉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곳이 유럽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카페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은 두 번째 선택 관광을 진행하였는데 바로 곤돌라를 타고 체험하는 시간이다. 우리 가족을 포함한 몇몇 가족은 곤돌라를 선택하지 않고 산마르코 광장과 그 주변을 자유롭게 관람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 산 마르코 성당(Baslica San Marco): 이 성당은 829년 이집트에서 모셔온 예수의 12 제자 중 한 명인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동서양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성당은 5개의 돔을 가지고 있으며, 성당 전면 위쪽에는 네 마리의 청동 말이 세워져 있다. 이 청동 말은 13세기에 베네치아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가져온 것으로 기원전 4세기~2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1805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했을 때 파리로 가져갔었는데, 나중에 되돌려받게 되었다. 외부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성당 내부에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성당 내부 천장의 모자이크는 구약 성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아름다운 제단화 〈팔라 도르(Pola d’Ore)〉는 이 성당을 대표하고 있는 보물이자, 비잔틴 예술의 걸작이다.
산 마르코 광장
곤돌라 체험이 끝나고 일행이 모이면서, 우리는 현지가이드님을 따라 산마르코 광장을 출발하여 부둣가를 따라 이동하였다. 곳곳에 기념품 가게와 카페가 즐비하였고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젊은 여자들이 기기묘묘한 가면을 쓰고 관광객들에게 가면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가면축제가 벌어진 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곳의 주민들의 상당수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상도시 베네치아에 사는 주민은 대략 5만 명인데, 이곳을 이용하는 하루 관광객 수는 그보다 많은 8만 명 정도라고 한다.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많으니 가히 세계적인 관광지라고 할 만 하다.
현지가이드님은 베네치아에 해마다 반복되는 침수현상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른바 ‘모세 프로젝트’에 대하여 설명해준다. 세계유산 베네치아를 유엔의 주도하에 보존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수상도시 베네치아가 해수면 상승에도 잠기지 않도록 베네치아 외곽에 수중갑문을 설치하는 사업인데 여기에는 대략 55조의 재원이 투자되며, 현재 30%의 공정을 마쳤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의 거대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계획대로 성공할지 궁금해진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침수현상은 봄철 알프스산맥에서 녹은 빙하수가 바다의 만조와 겹치면서 침수 현상은 절정을 이루는데, 1년 중 약 60일 동안 침수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가급적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우기(雨期: 겨울을 중심으로 비가 내리는 기간)를 피해서 방문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아무쪼록 인류 공동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수상도시 베네치아가 잘 보존되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비발디가 살았던 건물을 통과하여 여객선에 승선하였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니 여객선 갑판위에 올라가 사진 촬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여름이라 건기(乾期)인데도 예상치 않게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베네치아를 비행기로 찾는 경우 가까운 곳에 공항이 있는데, 그 이름은 마르코 폴로 공항이다. 중국 원나라에 다녀온 후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는 바로 이곳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여객선이 산타루치아 역 근처의 부두에 도착하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다리를 건너 육지쪽 베네치아로 이동한 후 한국인이 운영하는 쇼핑센터에 가게 되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판매하였는데, 나는 ‘마비스’(MARVIS)라는 상표가 붙은 치약을 몇 개 구입하였다. 여자들의 혈액순환에 좋다는 압박스타킹을 사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는데 이것 때문에 아들에게 많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들이 엄마의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베네치아에서 중화요리로 점심을 해결하고 버스에 올라 12시 30분경 출발하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으로 알려진 ‘베로나’라는 도시를 통과하였다. 이곳 베로나는 ‘아레나’(원래 모래라는 뜻인데 검투사들의 혈투 후 피를 지우기 위해 모래를 뿌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라고 불리는 원형경기장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용도 변경하여 지금은 오페라 축제 등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원형경기장이 배경이 되는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검투사)를 감상하면서 다음 목적지 오스트리아를 향해 이동하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해안에 위치하기에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곳일 터이고 이제 알프스 산지를 향해 접근하게 되니 해발고도는 점점 높아질 것이다. 롬바르디아 평야지대를 지나 이제 U자곡을 이루는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전형적인 빙하지형의 특색이 나타나는 지형임을 알 수 있다. 알프스 산지에는 눈이 쌓이고 이것이 빙하가 되어 끊임없이 골짜기를 깎아내리는 침식작용이 이루어지고, 그 아래쪽에는 반대로 빙퇴석이 쌓이는 퇴적작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질시대 해수면이 높았을 때는 이곳까지 바닷물에 침수되어 이른바 피오르드(fjord: 협만) 해안을 이루기도 하였으니, 이곳이 또 언제 침수가 될지 모를 일이다.
평야지대를 벗어나 알프스 산지에 접어드니 경작지의 작물도 달라진다. 주로 포도나무가 주를 이루는데, 평지에서부터 산 중턱까지 빼곡하게 심어져 있다. 이곳이 이탈리아 와인(Wine)의 주요 생산지라고 한다. 와인이라는 포도주는 크게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로 나뉘는데, 백포도주는 포도 씨와 껍질을 제거하여 만든다고 한다. 이곳의 포도는 연록 색을 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포도에 해당하는 포도나무이다. 포도나무를 실컷 구경하고 나니 이제 사과나무가 보인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연교차가 심한 곳에 유리한 사과나무가 재배되는 것 같다. 경작지에 농부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질 않는 것으로 보아, 상당 부분 기계화가 되어 있는 것 같다.
4차선의 도로를 이용하여 알프스 산지의 터널을 통과하니 이곳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방이라고 한다. 우리는 잠시 용변을 보기 위해 터널이 끝난 지점에 위치한 휴게소에 들렀는데, 해발고도 700m의 ‘브렌네르’ 고개(Brenner Pass)라고 표시된 안내판이 있었다. 브렌네르 고개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연결하는 주요한 고개인데, 이곳이 가장 낮은 지점이라고 해도 고개 정상의 높이는 해발고도 1200m가 넘는 곳이다. 만일 터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더 험준하고 높은 고갯길을 넘어야 했을 것이다. 이곳은 여름인데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쌀쌀한 느낌이었다. 이곳 온도계가 15도의 기온을 나타낸다고 하니, 얼마 전까지 경험했던 이탈리아의 뜨거운 햇살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주차된 차량의 번호판에는 국적을 표시한 알파벳이 표시되어 있다. A는 오스트리아 D는 독일을 의미하는데, 국가명의 이니셜을 붙인 것이다. 유럽연합에 포함된 유럽인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통과하며 이렇게 승용차로 여행을 즐기는 모습이어 무척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남북으로 나뉘어 우리끼리도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통일이 된다면 기차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이곳 유럽까지도 올 수 있을 것인데 참으로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생각조차도 부질없는 상상이라고 해야 할까?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더불어 알프스 산지에 위치한 산악 국가이다. 해발고도로 보면 오스트리아는 스위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낮은 지대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서쪽지역에 위치한 티롤 주 그 중심도시는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인스부르크이다. 나에게는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다.
* 인스부르크(Innsbruck): 인(Inn) 강과 다리(Bruck)를 뜻하는 인스부르크라는 지명은 ‘인강에 놓인 다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알프스 티롤 주의 주도로,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유럽의 도시 중에 가장 큰 도시이며, 인스부르크 어느 곳에서든 광활한 알프스 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해발고도 574m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크리스탈(水晶)로 유명한 Swarovski 본사와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1964년과 1976년 두 번에 걸쳐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동계 스포츠의 도시인 이곳은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고, 오스트리아에서 관광 산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이기도 하다. 1490년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1세가 정착하면서 왕실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인스부르크는 역사적 볼거리도 가득하다.
인스부르크를 향해 달리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니 스위스에서 보았던 전원 풍경이 또다시 나타난다. 험준한 산지에 정상부에는 하얀 빙하가 쌓여있고, 마을은 산 아래에 있는데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산 아래쪽은 어김없이 푸른 목초지가 조성되어 있고 높은 곳은 침엽수가 짙푸른 녹음(綠陰)을 자랑하며 굳건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르는데, 영화는 실제로 이곳 오스트리아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곳도 스위스에서 느꼈던 감흥을 나에게 전해주는데,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자연 풍광만 아름답고 주민들의 삶이 고달프다면 낙원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오스트리아는 스위스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사회보장제도가 잘되어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제곡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대표적인 게르만족에 해당하는 국가이다. 게르만족들은 일반적으로 실리적이며 실용적이고,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특성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민들에서 잘 나타나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는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하지만 수많은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특성상 스위스와 더불어 영세중립국을 표방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국방비를 최소화하고 이를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우리 일행은 드디어 인스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숙소에 가기 전까지 여유롭게 걸어서 도심투어를 하게 되었다. 이곳의 건물들도 역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고, 도시 전체가 차분하게 잘 정리된 느낌을 준다. 이곳의 현재 온도는 10˚~12˚ 정도여서 약간 쌀쌀한 느낌이다. 한 여름에 이 정도 날씨이면 겨울에는 얼마나 추울까 생각해본다.
인스부르크 도심은 중세시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아케이드가 도로변을 따라 건물 아래층에 조성되어 있었다. 귀족들이 눈비를 피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인스부르크 시내에는 전기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자동차 매연으로 인한 공기오염을 줄이려는 의도인 것 같다. 우리가 걸어서 처음 도착한 곳은 인스부르크 구도심의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이다. 거리의 건물들은 대략 5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벽면은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 사진을 찍으면 아름다운 화보가 된다. 주변 산들은 병풍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으며 산봉우리마다 빙하가 덥혀 있어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산자락마다 구름으로 가려져 만년설을 볼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가는 도중에 바라본 풍경
인스부르크를 사랑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적인 인물은 마리아 테레지아(1717~ 1780)이다.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여제(女帝)이지만,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황후로 되어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의 황후였던 것이다. 황후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마지막 딸이 바로 루이16세의 부인이며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로 처형되었던 ‘마리 앙뜨와네트’ 이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대의 음악가 모차르트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모차르트는 여행을 좋아하여 이곳 인스부르크에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18세기를 살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의료보험을 비롯한 사회복지제도를 일찍이 실시하였고, 병역제도를 개혁하여 귀족만이 아닌 일반 평민들도 군대에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국가차원의 의무교육제 등 각종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여 개혁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거리인데, 노천카페가 곳곳에 있어 더욱 낭만적인 느낌이다. 이 거리에서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는 ‘황금 지붕’(Goldenes Dachl)이다. 16세기경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황제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서 황금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5층 건물에 설치한 발코니 시설인데, 광장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건물 자체는 1498년에 만들어졌으며, 내부는 현재 막시밀리안 황제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잠시 후 크리스탈(수정보석)로 유명한 스왈로프스키(Swarovski) 본사에서 운영하는 매장을 둘러보았다. 중국인들이 주 고객인지 안내판에는 중국어 표기가 많았다.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을 하는 목적 중에는 쇼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는 중국이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외 쇼핑에서도 주 고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다. 이곳에 아내가 함께 왔다면 아름다운 보석을 둘러보느라 시간을 많이 보내었을 것이고 그중에 하나쯤 구입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 합스부르크(The House of Habsburg):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1020년 현재의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에 세워진 합스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 가문의 시조는 950년에 독일 왕 오토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트람 백작으로 추정된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최초로 독일 왕이 된 인물은 1273년 왕이 된 루돌프 1세이다. 루돌프 1세는 1282년 두 아들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왕실에 관여를 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 왕실의 오랜 관계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거의 모든 유럽 왕실과 연결되어 유럽 최대의 왕가로 번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해체를 가져왔다. 마지막 황제이자 왕인 카를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대한 주권은 1918년, 1921년에 상실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동 프랑크의 영역이었던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왕가에 해당한다.
인스부르크 구도심의 마리아테레지아 거리에서 기념사진을 찰칵!
우리는 시내관광을 마치고 저녁 7시경 버스에 올라 숙소로 이동하였다. 숙소는 도시 외곽에 위치하는지 한참을 달렸고 점점 고지대를 향해 지그재그 형태로 오르기 시작한다. 우리의 버스는 최고 3,000m에 달하는 알프스 산지의 중턱에 올랐다. 이곳의 해발고도가 대략 1,900m 라고 하니, 평지로부터 1,300m 이상을 올라온 셈이다. 7시 30분쯤 드디어 우리가 하룻밤을 묵을 올림피아 호텔이 나타났다. 이곳은 원래 동계 올림픽 선수단을 위한 선수촌이었는데, 이제는 일반 관광객을 위한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선수들을 위한 숙소답게 객실과 화장실 등이 일반 호텔에 비하여 널찍하였다. 아들도 크게 만족하는 표정이다.
동계 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한 도시답게 이곳은 스키를 비롯한 동계 스포츠를 위한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곳곳에 리프트 시설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스키의 천국인 것 같다. 여름에는 산지의 경사면이 목초지로 조성되어 있지만, 겨울에는 이곳에 눈이 쌓이면서 스키장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인프라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함께 스키를 포함한 동계 스포츠 경기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나라이다. 겨울에 자주 내리는 눈으로 교통이 막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더불어 제설장비가 잘 갖추어진 나라로 알려져 있다. 겨울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서라도 제설작업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 같다.
인스부르크 도심 건물의 특징중의 하나인 아케이드 시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저녁식사는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먹게 되었는데, 허기진 배를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식사 후에 호텔 주변을 산책하였는데 목초지에 소와 양이 방울을 울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계절에 따라 산 아래 마을에서 산 중턱을 오가며 이루어지는 이른바 이목(移牧)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이라 확실히 여름인데도 밤이 차가웠다. 이번 유럽여행에서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