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知識)과 지혜(智慧) 그리고 반야(般若)
지식(知識)과 지혜(智慧)와 반야(般若)의 차이는 크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지식은 외부에서 주입된 알음알이 뜻하며 학교공부를 통해서나 여론 인터넷을 통하여 얻어지기도 한다.
지식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고 머리로 습득하는 것으로 지능지수(IQ)가 높은 사람이 지식의 양이 풍부하다. 젊은 사람들이 풍부하다.
지식은 사물(事物)을 접할 때 수박 겉핥기의 견(見)으로 자칫 잘못하면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편견에 빠져들기 쉽고 아집(我執)이 생겨 내가 배운 지식만을 고집하고 편협(偏狹)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명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지혜는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통찰력이라 설명할 수 있다.
지혜는 대체로 고통과 난관 속에서 온몸으로 부딪혀 깨달아서 마음으로 습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식이 IQ 지수가 높고 젊은 사람이 풍부한 것에 비해서 지혜는 감성지수(EQ)가 높은 사람들이 풍부하다.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나이 많은 사람들이 풍부하다. 사물을 접할 때 지식의 삶에 더 많은 경험과 더 깊은 사고력이 쌓아서 시(視)로서 보는 것이다.
지식을 가진 사람은 물음에 화살처럼 생각 없이 단숨에 답하고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물음에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답하는 것을 말한다.
지식을 갖춘 사람은 복잡한 번뇌의 삶을 살아가고 지혜를 갖춘 사람은 번뇌를 벗어난 여유 있는 삶으로 전체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통찰력으로 중도(中道)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불교적 삶으로 살펴보면 지식은 너와 내가 둘(他人)이고 지혜는 너와 내가 하나(同體)가 되는 것이다.
지식은 성문(聲聞)의 경지이고 지혜는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이다. 지식은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뜻하고 삶이 곧 고통이다.
지혜는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뜻하며 삶이 곧, 기쁨 환희(歡喜)이다.
지식은 나이 듦이 늙음을 뜻하고 죽음이 윤회(輪廻)이다.
지혜는 나이 듦이 익어감이고 죽음이 새로운 시간 열반(涅槃)이다.
지식만으론 참된 인성을 갖춘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어렵다.
매사에 항상 감사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가지고
매일 매일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찾아 꾸준히 행할 때 지혜가 쌓이고 현명하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질 것이다. 바로 지혜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다.
옛 우리 조상들은 일기예보를 듣지도 않고 농사일을 잘 해냈다.
경험으로 쌓아온 지혜로 날씨를 예측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날씨를 잘 파악하여 삶에 별다른 지장이 없이 살아왔다.
물론 경험으로도 예측지 못한 천재지변을 당하기도 했다.
요즘 현대인들은 전적으로 기상청 예보에 의지한다.
일기예보(지식)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기상청의 오보로 큰 재앙의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지식과 지혜로 감당할 수 없는 재앙(번뇌煩惱)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반야(般若) 지혜이다. 흔히들 반야와 지혜를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반야와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 지혜에 자비를 더한 것이 반야이다.
성문이 지식이고 아라한이 지혜라면 반야는 보살(菩薩)의 경지이다.
성문이 견(見)이라면 아라한이 시(視)이고 보살은 관(觀)이다.
관이란 선입관(先入觀)을 벗어난 걸림 없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아상(我想) 인상(人想) 중생상(衆生想) 수자상(壽者想)을 여윈(벗어난)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 지식의 죽음이 윤회라면 지혜의 죽음은 열반이고 반야의 죽음은 남음이 없는 열반 무여(無餘)열반이라고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뜻하는 것이다.
무소유의 깨달음 부처님의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
누가 감히 반야를 논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