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악 (宗廟祭禮樂)
* 무형문화재 제 1호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 왕후의 신위< 神位 >를 모신 종묘의 제향< 祭享 >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킨다. 종묘제례 의식에는 각 절차마다 보태평< 保太平 >과 정대업< 定大業 >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여러 음악을 연주하며 동시에 종묘악장< 宗廟樂章 >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보태평지무< 保太平之舞 >와 정대업지무< 定大業之舞 >라는 일무< 佾舞 >를 춘다. 조선 세종 31년에 세종이 고취악< 鼓吹樂 >과 향악< 鄕樂 >을 토대로 하여 보태평, 정대업, 발상< 發祥 >, 봉래의< 鳳來儀 > 등 많은 음악을 새로 창제하여 보태평에 11곡, 정대업에 15곡을 지었다. 이것에 조종< 祖宗 >의 공덕을 기리는 악장을 얹어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아악기와 당악기와 향악기를 두루 섞어 편성하여 연주하고 문무< 文舞 >와 무무< 武舞 >를 일무로 추도록 하여 이것을 연향< 宴享 >에서 연행< 演行 >하였다. 세조 9년(1463)에 보태평과 정대업을 개편하여 세조 10년에 처음으로 종묘악장에서 보태평, 정대업이 연주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선조 때 약간 고치기는 하였지만 1946년까지 춘하추동 사계절에 행하는 제향에서 연주해왔다. 그리고 1946년에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에 행하는 종묘대제< 宗廟大祭 >에서 종묘제례악과 악장과 일무가 동시에 연행되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 말기까지 장악원< 掌樂院 > 악사< 樂士 >들에 의하여 전승되었고, 일제 때에는 구왕궁아악부< 舊王宮雅樂部 > 악사에 의하여 전승되었고, 해방 후에는 국립국악원< 國立國樂院 > 악사들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보유자에는 성경린, 김기수, 김성진, 김태섭, 김종희, 박영복, 이강덕, 김천흥, 봉해룡, 이석재가 처음 인정받았는데 이들은 모두 구왕궁아악부와 국립국악원 악사를 역임하였다. 현행 보태평은 희문< 熙文 >, 기명< 基命 >, 귀인< 歸仁 >, 형가< 亨嘉 >, 집녕< 輯寧 >, 융화< 隆化 >, 현미< 顯美 >, 용광정명< 龍光貞明 >, 중광< 重光 >, 대유< 大猷 >, 역성< 繹成 > 11곡으로 구성되었고 정대업은 소무< 昭武 >, 독경< 篤慶 >, 탁정< 濯征 >, 선위< 宣威 >, 신정< 神定 >, 분웅< 奮雄 >, 순응< 順應 >, 총수< 寵綏 >, 정세< 靖世 >, 혁정< 赫整 >, 영관< 永觀 > 11곡으로 구성되었다. 보태평은 황종궁평조< 黃鍾宮平調 >로 되어 있고 정대업은 황종궁계면조< 黃鍾宮界面調 >로 되었다. 종묘제례악은 박< 拍 >, 편종< 編鍾 >, 편경< 編磬 >, 방향< 方響 >, 축< 각 >, 어< 가 >, 장고< 杖鼓 >, 절고< 節鼓 >, 진고< 晋鼓 >, 당피리< 唐피리 >, 대금< 大가 >, 해금< 奚琴 >, 아쟁< 牙箏 >, 태평소< 太平簫 >, 대금< 大金 >으로 편성된다. 종묘제례의 영신례< 迎神禮 >, 전폐례< 奠幣禮 >에서 악사들은 희문이라는 보태평 제일곡< 第一曲 >을 아뢰고 초헌례< 初獻禮 >에는 보태평을 아뢰며 도창< 導唱 >은 조종의 문덕< 文德 >을 기리는 악장을 노래부르며 무원들은 손에 약< 가 >과 적< 翟 >을 갈라 쥐고 문무< 文舞 >를 팔일무로 춘다. 아헌례< 亞獻禮 >, 종헌례< 終獻禮 >에서 악사들은 정대업 전곡< 全曲 >을 아뢰고 도창은 조종< 祖宗 >의 무공< 武功 >을 찬양하는 악장을 부르고 무원< 舞員 >들은 목검< 木劍 >이나 목창< 木槍 >을 들고 무무< 武舞 >를 팔일무로 춘다. 진찬< 進饌 >, 철변두< 徹가豆 >, 송신례< 送神禮 >에는 아악곡< 雅樂曲 >을 아뢰고 악장과 일무가 있다. 종묘제례악은 장엄하고 웅대한 음악이며 500년 전에 전승되던 고취악과 향악이 제례악으로 승화되어 살아남은 소중한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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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mct.go.kr%2Fimagesofkorea%2Fkor%2Fjongmyo%2Fimages%2Fsec_text.gif) 종묘제례(宗廟祭禮)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에 봉안된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음악·노래·춤 일체를 일컫는 말이다. 종묘의 제례는 선왕이 이룩한 업적을 찬미하여 신명(神明)에게 고하고, 후손들의 창성(昌盛)과 복록(福祿)을 구하기 위해 지극한 예와 조화로운 음악으로 공경을 표현하는 엄숙한 의식이다.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에는 일종의 모음곡인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2곡이 사용된다. 보태평은 역대 왕들의 문덕(文德)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종묘제례에서 첫잔을 올리는 절차인 초헌(初獻) 등에서 사용되는 음악이고, 정대업은 역대 왕들의 무공(武功)을 기리는 내용으로 종묘제례에서 둘째, 셋째 잔을 올리는 절차인 아헌(亞獻), 종헌(終獻) 등에 사용된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1449년 세종이 전래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처음에는 궁중 내에서의 각종 의식과 잔치 등에서 연주되다가, 세조 때인 1463년에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에서 연주하기 위해 개편하여 세조 10년(1464년)부터 종묘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음악 노래 춤을 갖춘 제례악의 기본 양식과 특수한 아악기의 편성, 음양(陰陽) 이론에 따라 등가(登歌: 위패를 모시는 신전의 대뜰 위에서 연주하는 것)와 헌가(軒架: 대뜰 아래에서 연주하는 것)를 구분한 악대의 배치, 음악의 시작과 종지 및 악절의 형식 등은 동양의 고전적 아각(雅樂)을 참고하고, 음악의 주 내용인 선율은 고려가요 등 전래의 향악(鄕樂)을 편곡하는 방식으로 작곡되었다. 음악의 연주는 등가와 헌가로 나뉘며, 등가는 편종·편경·방향·대금·당피리·아쟁·절고·장구·축·박·노래로 편성되고 헌가는 편종·편경·방향·태평소·대금·당피리·해금·징·진고·장구·축·박·노래로 편성되며 이 두 악단이 제례의 절차에 따라 교대로 연주하게 된다. 한마디로 종묘제례악은 장중한 리듬과 곡조의 우아함이 단연 돋보이는데, 아악기와 함께 대금과 같은 고유 악기도 함께 편성되어 독특한 가락이 편종이나 편경과 같은 맑은 음을 내는 타악기의 음색과 어울려 장중하고 느린 선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종묘제례악에는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 뒤따르는데 보태평 춤인 문무(文舞)와 정대업 춤인 무무(武舞) 두 종류가 있다. 문무를 출 때는 손에 관악기의 일종인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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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mct.go.kr%2Fimagesofkorea%2Fkor%2Fjongmyo%2Fimages%2Fsec_text_02.gif) 그런데 종묘제례악은 그 음악에서뿐 아니라 연주되는 장소인 종묘의 독특한 건축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종묘의 정전(正殿)은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각각의 신실(神室)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나 건물 한 칸마다 한 왕의 위패를 모시기 때문에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선이 강조되어 독특한 형식미를 지니고 있다. 종묘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위패를 모신 한 칸(間)의 신실(神室)이다. 각 신실은 동일한 모습이다. 그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이 단순하고 형태가 같은 신실이 19번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에 종묘의 건축적 엄숙함과 형태적 장엄함의 비밀이 숨어 있다. 월대의 한없이 넓게 펼쳐지는 돌바닥도 정전 앞 공간의 엄숙함과 고요함을 더해 준다. 처음 종묘를 세울 때 건물은 7칸으로 지었다. 그러다가 종묘에 모실 신령이 늘어가자 종묘 건물과는 별도로 그 서쪽에 부속건물을 지었다. 영녕전(永寧殿)이라는 집이다. 이 부속건물에는 최초 왕의 4대 할아버지나 또는 직계 자손으로 왕위가 계승되지 않은 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영녕전과 구별하기 위해서 본 건물을 정전(正殿)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속건물이 아닌 정식 건물이라는 뜻이
다. 정전에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太祖)를 비롯해서 직계 자손으로 왕위를 이어가고 또 큰 공로를 세운 왕이 모셔졌다. 영녕전에서는 우선 건물 가운데에 태조의 4대조 위패를 모시고 이 4칸(間)과는 별도로 서쪽 끝에서부터 오래된 위패순으로 동쪽으로 순서대로 위패를 모셨다.
종묘 정전은 대단히 넓은 네모 반듯한 낮은 단(壇)을 두고 그 뒤편에 목조의 단층 긴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단은 월대(月臺)라고 부르는데 한쪽 길이가 100미터를 훨씬 넘는 크기이다. 제사가 있을 때 이 월대 가득히 사람들이 올라선다.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은 물론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나 춤추는 무희도 모두 이 월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월대 위는 거칠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덮여 있다. 일부러 돌을 불규칙하게 다듬고 또 가지런히 줄 맞추어 깔지도 않았다. 거친 표면과 불규칙한 배열이 오히려 이 월대 바닥에 생동감을 준다.
종묘는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인구 1천만을 넘는 초 거대도시이며 콘크리트로 지어진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심 한복판에 60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과거의 건물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쉽게 믿어 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뿐 아니라 6백 년 전과 다름없는 제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문화적 경이라고 하겠다. 이런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봉안된 장소인 종묘는 이미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이어 종묘제례의 종묘제례악이 또한 2001년 유네스코의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수상한 바 있다. 종묘에서의 제례 재현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되며, 종묘제례악은 국립국악원의 공연 및 음반 등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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