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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거창한 주제인데요. 제가 무지한지라.. 부디 관대한 지적 부탁드립니다.ㅠㅠ
조언, 비평, 지도편달 적극환영 =ㅈ=/..ㅠㅠ;
칸트가 당대의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에 자극되어 실천 이성비판을 저술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만, 말도많고 탈도많은 프랑스군의 정신론 또한 이러한 물질문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와 같은 밀집방진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무기의 발달과 함께 차차 대량학살의 목표에 불과하다는 점이 분명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즈음 1866년 보-오 전쟁 이후, 프랑스 군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군 개혁에 대한 논의가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논의 중에서도 군사조직과 참모업무에 대한 논의가 특히 중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의들은 최종적으로 독일 통일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시기에 맞추어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그 이유는 독일의 통일은 필히 유럽의 세력균형을 깨뜨리게 될 것이며 이러한 결과는 결국 프랑스의 국가적인 이익에 중대한 손상을 줄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군사개혁의 큰 흐름은 프랑스 군대를 신무기로 장비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징병제를 통하여 대규모의 현역군과 강력한 예비군를 편성하여 전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생시르 사관학교의 퍼레이드용 복장. 나폴레옹 3세에서 제 3 공화국 때 까지의 고급장교의 복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뒤 삐끄의 인간본위의 군사사상.
뒤 삐끄 Ardant Du Picq 는 1821년 10월 19일, 뻬리그 Perigueux 에서 태어났습니다. 부계에는 대대로 군인이 존재하지 않으나 외증조부와 외조부, 그 외에 최소한 2명 이상의 외종조부가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외가 친척들 중에는 제 1제정 시대에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쀠끄는 21살에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졸업한 후에는 크림전선에서 매우 비위생적인 지역에서 며칠동안 매복을 하는 와중 콜레라에 걸리기도 했으며 (당시에는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자살에 가까운 양동공격을 명령받고 돌격와중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기도 하는 등... 빡센 군생활을 했습니다. 1869년 2월 27일에는 라인강의 보병 제10연대의 육군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연대장으로써 프러시아와 전쟁이 있기 전까지 18개월 동안을 로리앙 Lorient 과 리모쥬 Limoges 에서 복무하면서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전투 연구 Etudes sur les combat" 라는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과거의 전투들을 올바르게 분석함으로써 미래의 프랑스군을 위한 개혁방향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고대의 전투들, 특히 칸나에 전투와 파르살루스 전투를 분석하면서 이 전투들을 결정지은 것은 결국 병사들의 사기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는 프레데릭이 말한 "눈앞의 50명의 적군보다 등뒤의 3명의 적군의 존재가 가져오는 중압감이 비교할 수 없이 높다." 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사기의 중요성은 일반인의 생각과는 반대로 문명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커진다고 역설했습니다. 즉 고대로마의 군단병이나 팔랑스 대형을 이루는 그리스 병사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지켜보는 지휘관의 시야 안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게다가 그들의 옆에는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전우들이 있었기에 전투에서 도망치려는 자기보호본능을 얼마만큼 억누를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투는 점점 장거리전이 되어 갔습니다. 게다가 이전과 같은 밀집대형이 산개대형으로 바뀌면서 병사들은 이제 더 이상 지휘관의 직접적인 시야 밖에서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병사들간의 간격을 증가시켰는 바, 이제 병사들은 이전보다 전역에서 도망가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즉.. 비록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병사들이 겁쟁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는 것이 삐끄의 고민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뒤 삐끄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덕성, 즉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사기는 전문적인 훈련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징병제를 반대했으니,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프랑스 군대는 위에 서술한, 당시의 트렌드였던 징병제에 의해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편성된 오합지졸이 아닌, 오랜 훈련을 통해 애국심과 전우애로 단련된 정예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기왕성한 병사들은 근대적인 무기들까지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보았을때 공격하는 부대는 방어하는 부대보다 물리적으로 더 많은 고통을 받게될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방어자는 더 좋은 질서와 생기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공격자는 무질서하고 공격간에 발생한 손실에 의하여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불전쟁 당시에 도미에가 그린, "공화국이 우리를 부른다, 출정이다" 라는 제목의 삽화.
감동적이면서 슬픈 장면이지만, 삐끄는 이와같은 급조된 예비군의 군사적 가치를 극도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삐끄의 주장에 의하자면, 공격에 의해 이끌어진 "정신적인 우월성" 은 공격자가 공격와중 입은 손실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안겨 준다는 겁니다. 아니, 방어하는 자는 침착하게, 겨냥할 준비를 한 채 남아있으며 각각의 병사들은 자기 앞에 나타날 병사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호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 공격하는 육체는 살상거리안으로 들어간다... 공격군는 자신의 사격효과를 확신하면서 냉정하게 기다리고 있는 방어군의 표적이 될 것이다, 공격자의 첫 번째 대열 전체는 쓰러지고 격파될 것이며, 남아 있는 자들은 그들의 참상으로 오히려 용기를 잃게 될 것이 아닐까? 뒤 삐끄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투 연구" 의 결론에서 1)공격자의 정신적 효과가 방어자의 마음을 애타게 만든다... 공격자의 용기에 질린 방어자는 공중에 대고 사격을 하거나, 아예 사격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최근의 보오전쟁에서 이러한 일이 종종 벌어지긴 했습니다.) 2)방어자는 자신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돌진해온 공격자 앞에서 즉각적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_- 3)이윽고 방어측의 사격은 중단된다.. 공자는 일제사격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돌진한다.. 이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게 되는 것이다! 설명하다보니 글이 좀 이상해졌는데.. 대충 이런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사실 뒤 삐끄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정신적인 반면 -물론 그것이 아주 중요한 반면이라고는 하나- 만을 강조했다는 것이 그것인데, 사실 삐끄의 시대의 프랑스군을 살펴보자면 그렇게 쉽게 비판하기도 어렵습니다. 보불전쟁 이전, 훗날 국방정부의 수반이 되는 루이스 트로슈 장군이 프랑스군은 애국심과 명예를 모른다고 한탄하면서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교들은 사병들을 무식한 촌놈이나 주정뱅이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처벌을 통해 규율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의 기강은 극도로 해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병사들이 극도로 무감각한 지경에 이르게 됐다. 프랑스 사병들은 작업 지시를 받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며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거요.”라며 투덜거렸다. 1865년에 메츠를 방문한 프로이센의 참관인은 프랑스 사병들은 훈련 시간에 동료들과 잡담을 했으며 종종 너무 심하게 잡담에 몰두해 장교가 명령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사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은 무기탓을 못하는게 사실이긴 하지요.
즉 삐끄의 주장은 사실 당시의 프랑스군의 상황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그의 주장을 상당히 왜곡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그의 연구는 연구 자체로는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주장 그 자체보다는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점점 더 경직되어가는 프랑스군.
주지하다시피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제정이 무너지고 편성된, 옛 국민 의용대의 그림자와도 같았던 국민 방위대는 막강한 프러시아군의 공격에 금방 무너지고 말았지요.. 비록 지엽적인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프랑스는 프러시아군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단순히 항복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티에르의 항복에 반발하는 파리 코뮌까지 벌어졌지요.. 결국 사스포총은 프러시아군이 아닌, 코뮌 진압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비록 이러한 혼란이 끝나고 프랑스에는 벨르 에포크 (아름다운 시절) 라 불리운 평화시기가 찾아오게 됩니다만... 이러한 번영은 군대에까지 전파되지는 못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점차 프랑스 정치계의 좌파와 우파간의 격렬한 투쟁에 말려들어갔습니다. 1899년 드레퓌스 사건으로 힘을 얻은, "민주주의자" 로 불린 극좌파는 "카스트" 제도적인 기존의 권위주의적 군대시스템을 시민병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군국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금술을 달고 군복의 솔기를 금빛으로 장식한 참모장교는 이젠 싫다!' 라고 외친 코뮌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군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군은 국민들에게 있어 억압적이었던 과거의 이미지를 되살리게 되었으며, 사회적 입지는 결정적으로 좁아졌습니다.
(드레퓌스 사건 자체야 프랑스군의 잘못이죠, 암암.)
이렇게 군이 정치에 휘말려감에 따라 프랑스 제 3 공화국은 1871년부터 1914년까지 국방부 장관이 무려 42명이나 나왔습니다. 당연히 군 정책의 일관성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군에 부정적인 좌파의 태도는 군인들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켰습니다. 이러한 자신들을 둘러싼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프랑스 장교단은 마치 전간기의 일본군처럼, 민간 정치가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극도로 고집스러워졌습니다. 할줄 아는것이라고는 책상머리에 앉아 난장판이나 만드는 것밖에 모르는 정치가들이 용맹한 프랑스군 Furia Francais 를 이토록 욕보이다니?
이렇게 프랑스군은 점점 경직되어 갔으며.. 자연스럽게 더욱 더 정신주의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장교들에게 있어 그들의 선배, 즉 뒤 삐끄의 인간중심의 용병사상을 왜곡시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아주 좋은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주의가 판치는 프랑스군의 에피소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군의 붉은 가랑스 바지의 교체건에 있어서 벌어진 에피소드입니다. 1912년의 프랑스 의회에서는 보병의 전투복에 대하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인들은 붉은 바지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1829년 이래 아무런 변화없이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영국과의 꼭두서니 염색산업 경쟁에 있어 국가적 진흥책의 일환이었지만, 그후 석탄에서 붉은 염료를 뽑아내는 기술이 발명된 뒤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1829년 당시에는 라이플의 사정거리가 짧고, 결정적으로 양군이 밀집방진을 이루어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미채색상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논란이 벌어지고 있을 시기에는 이미 영국은 카키색, 독일은 회록색 군복을 채용하고 있었습니다. 라이플의 사정거리로 말하자면, 이미 반세기전의 보불전쟁때 프랑스군 자신들이 사용한 사스포총의 일부 모델이 1800미터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왼쪽이 보불전쟁, 오른쪽이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 군복. 세부사항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지만, 고시인성이라는 데엔 변화가...
의회의 공청회에서 붉은 바지를 포기하는 내용의 새로운 전투복이 제안되자, 국방장관 에띠엔느 Eugene Etienne 는 ..
"붉은 바지를 포기하라고? 절대 그런일은 있을 수 업ㅂ습니다!! 붉은 바지는 프랑스의 상징입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군복의 미채화는 결국 보류되었습니다. 붉은 애국의 물결로 도길군을 몰아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당시 프랑스군들을 샹파뉴와 아르투아, 그리고 알자스 지방 언덕의 손쉬운 표적으로 묘사하는 대중매체를 쉽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맹목적으로 변해가는 정신주의를 다시금 정립한 사람이 바로 포슈 원수입니다. 포슈원수는 1908년에 육군대학교 교장이 되면서 정신주의를 강조했으니, 그의 정신주의를 요약한 "전쟁의 원칙" 에서 엘랑 비딸 Elan Vital 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그 승패>
포슈는 러일전쟁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승리한 전투는 스스로 패배했다고 고백할 필요가 없는 전투이다. 전투를 조직한다는 것은 적의 정신을 분쇄하기 위해 아군의 정신을 최고 수준으로 강화하는 데 있다. 정복의 의지야말로 승리의 제 1조건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의지이다. 즉 한쪽 사령관이 패배를 인식하는 것으로 승패는 결정된다.
2) 이 총사령관과는 일국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즉 보통의 경우 야전군의 지휘관이 아니라, 참모총장일 것이다.
3)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야전군의 지휘관, 참모총장이 승리할 의사를 계속 보유하는 것에 있다.
"Victoire c'est la volonte. 승리란 곧 의지 그 자체이다."
4) 따라서 이를 달성하려면 연속된 공세 의사를 보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엘랑 비딸" 이다.
엘랑 비딸? (그나저나 캐피의 목욕탕 표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러일 전쟁을 제외한 대전쟁은 항상 독일이 선수를 쳐서 미리 세운 작전계획에 근거한 작전이 시행되면서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전쟁기도에 대항하기 위한 포슈의 엘랑비딸의 근저는 침략을 받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는 이것이 독일의 물질적 욕망에 근거하는 전쟁동기에 대해 우수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침략에는 언제나 분연히 반격하는 프랑스군이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군대의 형태가 되었는데, 이러한 군대의 사상의 기초가 되는 엘랑 비딸은 자신의 선배 즉 뒤 삐끄의 정신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1차대전과 2차대전,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한쪽의 전쟁의지가 사라짐으로써 종결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전략 차원의 문제입니다... 전쟁초반 프랑스군의 비극은 이러한 정신주의를 야전에서까지 강요함으로써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1차대전의 서전에서 알려졌듯이 이 소위 "승리에의 의지" 란 기습이라든지 우월한 병기의 위력에 의해서 공격을 성공시킬 준비가 없는 한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꼭 돌격전만 이 전쟁의지의 표명이 아닐진데, 이 엘랑비딸을 주창한 포슈를 위시한 프랑스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비극이었지요.
이러한 포슈의 영향하에서 가장 두각-_-을 나타낸 장교가 그랑메종 Loyzeau de Grandmaison 대령이었습니다. 그는 포슈가 육군대학교 교장이던 시기 프랑스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써 장래의 장군이자 참모총장감으로 유력시되던 소장파 청년 장교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었던 그가 한말 중 유명한 것이: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이다... 우리는 언제나 전진해야 하지만, 전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격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두가지 뿐이다. 첫번째는 적이 어디에 있는가? 이며, 두번째는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다. 적의 의도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
... 마치 아기스 2세가 말한, "스파르타인은 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적들의 수는 묻지 않는다." 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폭언-_- 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른의 영웅이었던 조프르 장군역시 "전통을 회복한 프랑스 군대는 이제 공세 이외의 다른 어떤 법칙도 고려해서는 안된다. 모든 공격이 적을 섬멸하기 위해 보병을 적진에 돌진시키겠다는 확고한 결의 속에서 극단으로까지 수행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등, 초, 중기 프랑스군에는 정신주의의 맹신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18년 초에 페탱이 행한 개혁, 즉 후방에 편안한 침상과 목욕시설, 세탁시설을 갖춘 휴식캠프의 설치, 그리고 주류의 판매의 통제, 휴가의 증가, 차량수송율의 증가, 철도시설의 확장, 매점과 기차역 부근의 값싼 숙박시설과 식당을 설치등등이 프랑스군 상층부에게 있어 놀라움과, 동시에 반발을 가져온 것은 놀랄일이 아니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프랑스군의 사기는 회복되지 않았으며 결국 페탱은 반격을 위해 미군이 도착할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1930년판 구판. 프랑스군의 돌격부분입니다.)
사실 이러한 정신주의의 강조는 영국과 독일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그 폐해는 프랑스군에서 더욱 심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정신주의의 강조는 프랑스군이 1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만, 그 대가로 너무나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군의 정신주의는 저 멀리 극동의 일본이 답습하게 됩니다. 사실 정신주의를 강조한 것이나, 군부가 문민 정치가를 곱게 보지 않은 것이나, 1차대전 이전의 프랑스군과 전간기의 일본군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일본군의 통수강령 중 "갈리아를 정복한 것은 시저에게 이끌린 로마인이다. 고로 단순한 로마인이 아니다." 가 사실 1869년판 프랑스군 교범에 실린 문장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병사들의 사기는 중요합니다만, 20세기의 전쟁은 정신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되어버렸다랄까요.
출처: http://ww1.m78.com/topix-2/elan.html
오스프리, "The French Army 1914-1918"
오스프리, "Imperial Army in Franco-Prussian War"
Du Picq, "Battle study" (Etudes sur les combat 의 영역본.)
http://en.wikipedia.org/wiki/Du_Picq
배군님 블로그. "모 프랑스 장군의 나쁜 선례"
어린양님 블로그.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군기이완"
뒤 삐끄(Ardant du picq)의 군사전략사상, 허광환.
참호에서 보낸 1460일.
그외 기타 등등...
조언, 비평, 지도편달 적극환영 =ㅈ=/
첫댓글 정신도 중요하지만 저런 것은 좀 아닌 듯 싶습니다.
마치 현재의 우리나라로군요.. 뭐 말도안되는거 좀 고쳐보자면 새퀴 빠져가지고 편할라고 한다고 하고..ㅋㅋ 쓸데없는짓 하면서 그냥 악으로깡으로.. 열악하게 생활해야만 전투력이 나온다는 사고방식이나..
오늘 예비군훈련 다녀와서 그런지 조금더 짜증나는군요...ㅡㅜ
급하게 번역하셔서 그런지 지난글보다는 약간 어색합네다; 이것도 조언(?) 일지는 모르겠는데, 예를들어 삐꾸(...) 씨의 주장을 설명하실때 "공격하는 육체" 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혹시 "Attacking Body" 의 번역인가요? 그렇다면 이때 body 는 인간의 몸이 아니고 군대의 몸, 그러니까 집단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번역으로는 "공격하는 군대" "공격군" "공격자" 가 나을듯 합니다.
정신과 육체는 상호작용하듯; 군대로 치면 사기와 무기(보급)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요?? 참;; 저런 사상의 지휘관 밑에서 싸운다면 정말 죽을 맛일듯;;;-_-
2차대전때 일본의 정신승리전법이...1차대전때 프랑스군의 전투를 참관한 일본군장교들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서 전파된거라는 얘기를 듣고 알딸딸.프랑스가 원조라니 너무 안 어울려보임.
"눈앞의 50보다 등뒤의 3" 을 듣고 "적의 뒤로 프랑스군 세명을 보낼 기술을 닦자" 가 안나오고 "우리 뒤에 적군 셋이 있어도 쫄지말자" 가 되니 거참 =ㅈ=;;
프랑스의 무대포 공격 정신은 100년 전쟁부터 악명을 떨쳤으니까요 -_-;;
치우승천님// 뭐든지 과유불급인 게죠... 기관총앞에서 근성이라; CrimPie님//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 훈련을 잠시 봤었는데, 뭐랄까, 개인의 사고능력의 박탈이 최종목표가 아닌가 싶더군요. 롹상//그 부분은 출처중의 허관황씨의 논문에서 그대로 인용한거라;;; 그리고 "50명보다 3명" 의 해석은 참으로 촌철살인입니다;
그 훈련영상 좀 보여주실 순 없나요.
에, 영상은 아니고요. 이전에 봤던 1915년의 New York Times Current History: The European War 에 나오는 미군의 훈련스케쥴과 훈련내용에 대한 글에서 본 것인데요, 동시대의 프랑스군의 것을 거의 그대로 카피한 것이라고 나와 있는걸로 기억합니다.
ds2lie님// 그렇죠. 저 당시의 지휘관들이 그런 방면에 소홀했던 것은 그들이 상정했던 전쟁이 단기결전이라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치너같은 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1차대전이 장기전이 될줄 몰랐으니.. 진셍티님// 프랑스군의 영향은 막부말기부터 쭉 이어졌지만, 말씀대로 1차대전 전훈의 뻘해석은 참... 리카르도님// 그런걸 생각하면 좀 구식 생각이긴 해도, 국민성이라는게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ㅡㅡ;;
서부전선이상없다 구판영화가 태극기휘날리며 보다 나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김없이 등장하는 보병 최고의 육박전 무기......삽 -_-
거기에 양쪽을 갈아서 날을 세우면 칼보다 더 좋다능 ~0~ 우왕 ㅋ굳ㅋ
50명의 적 보다 배후의 3명이 더 무섭다라는 건... 확실히 상당한 심리전 적인 압박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무엇보다 전투 중에 뒤에서 공격해올 때 정면의 적 보다 병력을 뒤로 돌려서 공격하는 건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전히 상대하기 무척 까다롭죠. 특히 그 배후의 3명이 보이지 않는 적이라면 더더욱 치명적일테지요~ 가령 스타 크래프트에 빗대서 프로토스가 정면의 메카닉 테란 기갑 사단을 상대로 한창 교전 중인데 느닷없이 은신 중인 고스트가 프로토스의 병력 등 뒤에서 총을 겨누고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 경고가 들리면 프로토스 쪽은 당연히 당황하겠죠. 정면의 적들과 싸우고 있는 데 어느 틈에 자기 본진에 고스트 특공대들을
투입해 핵 공격하는 건가라고 말이죠. 그런데 정작 핵은 고스트 3명과 메카닉 기갑 부대 일부를 희생으로 버리는 대신 정면의 그 메카닉 부대와 싸우던 프로토스의 주력 병력들 모두 핵 공격을 뒤집어 써버리게 된다면(그것도 테란이 돈이 넘쳐나 예비 병력이 당장 출동할 수 있는 반면 프로토스에겐 대규모의 주력 병력이 유일한 병력이고 돈도 거의 바닥이라면)~ 뭐... 사실 이건 단지 전쟁 게임의 내용을 약간 빗대봤을 뿐입니다. 게임과 전쟁 현실은 극단적으로 다르니까요~
아무튼 전쟁을 정신력 싸움이라고 하는 건 그냥 악바리 근성을 가지고 무대포로 밀어 붙이면 이길 수 있다라기 보다는 전쟁도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하다라는 뜻에서 나오는 얘기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유틸님// 제작시, 참전자들의 경험을 많이 활용했고 실제 엑스트라중에도 참전자가 있다고;; 압니다^^; 공비님// 서부전선 이상없다 읽어보면, 삽으로 얼굴을 내리쳤더니 쫙 쪼개졌더라.. 는 얘기가 나오죠 ㄷㄷㄷ 풀 메탈 건슬링님// 그렇지요. 잘못된 결론을 냈다고나 할까요. 당시 프랑스군이 그러한 점도 대비못할만큼 상황이 안좋지도 못했는데... 따라서 결국 개전되자마자 기습되어 버린 것이죠.
아니 굽본좌의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