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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하뜨크
이 홍사
사무실 옷걸이에 걸린 하뜨크를 이윽히 본다.
원목으로 만든 스탠드 옷걸이에 옷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고 노란색 하뜨크만 걸려있다. 감히 옷이란 존재는 하뜨크와 같이 걸릴 자격이 없는 하찮은 물건이 되어버렸다. 최소한 내 사무실에서는.
하뜨크를 보고 있으니 지난 칠 년간 몽골에서 중기 임대업을 하며 일어났던 꽤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흘러간 시간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 하뜨크를 스님으로부터 받던 무렵이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그 시절을 회상하다가 일어서서 하뜨크를 만져보고 볼에 비벼본다. 하뜨크의 촉감이 모시처럼 참으로 보드랍고 불경을 외며 정중하게 내 목에 걸어주던 안이 스님의 미소가 지나간다. 한마디로 그 시절이 그립고 늘 미소를 물고 있는 스님이 보고 싶다.
안이 스님은 내가 놈비치디크(몽골말로 작가)라고 노란색 하뜨크를 주셨다. 보통 하뜨크는 거의가 하늘색 천으로 목도리처럼 생겼다. 울란바트로 국제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맨 앞에 서 있는 대형 입간판에 몽골 전통복장과 전통 모자를 쓴 미모의 아가씨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하늘색 하뜨크를 두 손으로 받쳐서 내미는 모습 밑에 ‘웰 컴 투 몽골리아’라고 씌어져 있는 간판을 가장 먼저 보게 된다. 몽골식으로 환영한다는 가장 큰 의미이다.
몽골에 가면 게르마다 하뜨크가 걸리지 않은 집이 없다. 이사를 가면 맨 먼저 하는 의식이 하뜨크를 새집 천정의 전등에다 메어다는 일이고, 멀리 길 떠나는 자식 목에 부모가 감아주는 게 하뜨크다. 거의가 하늘색 푸른 천이다. 악귀를 물리치고 행운을 물어다주는 상징으로 굳게 믿고 있다. 게르뿐만 아니라 자동차 룸미러에도 걸려 있고 불교국가라 절에 가면 부처님 주위에 상당히 많은 하뜨크가 놓여있는 것은 물론이요. 양이나 소, 말, 낙타등 동물도 아프면 처방으로 하뜨크를 몇 개 연결하여 목도리를 걸어준다.
7월에 열리는 몽골의 최대 축제인 나담에 나가면 지인들로부터 받는 하뜨크가 몇 개씩이나 된다. 신성한 천에 신성한 마음을 고이 담아 선물로 주고, 받는다. 자동차를 끌고 초원길을 가다보면 고개 마루마다 있는 어워(서낭당 같은 돌무덤)에도 여러 장의 하뜨크가 나풀거리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먼 길을 가는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 탈 없이 잘 다니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대게가 푸른색 천이다. 노란색 하뜨크는 스님이나 선생님께 바치는 특별한 것이다. 그 노란색 하뜨크를 안이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최소한 안이 스님께는 작가 선생님 대접을 받았다는 말이다.
몽골에 처음 가서 놀란 것이 한국의 선교사나 목사에 대한 일이다. 몽골의 한국식당에 가서 접한 한인회 회보를 들추다가 문학회의 모임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모월 모시에 어느 호텔 커피숍에서 합평을 한다고 상세하게 나와 있고 회원을 더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먼 이국땅에 와서 문학회를 하는지 내 궁금증을 자극하기에 충분요소를 갖춘 글귀였다. 연락처가 적혀있지 않아 가서 보는 방법뿐이었다. 그 광고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그 호텔의 커피숍에 갔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나에게는 사업을 지평을 넓히는 일과 다름이 아니었다. 같이 문학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연결고리가 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정확히 기억하건데, 내가 출간한 소설집 두 권을 들고 갔었다. 가서 뒷전에 앉아 얘기를 들어보니 전부 가톨릭 신자였다. 불교나라에 와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열댓 명이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장로, 목사, 전도사, 선교사였다. 합평이라고 하는데 듣고 있으니 거의 시를 쓰는 사람들인데 ‘오! 주여’가 안 들어간 시가 없었다. 그 분들에게는 그 보다 더 큰 감흥을 주는 언어가 없을지 몰라도 내가 듣기에는 문학 합평이 아니라 하나님 찬양을 목적으로 모인 종교집단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갈 때는 설렘을 안고 갔었는데 돌아올 때는 기분이 몹시 꿀꿀했다. 그 자리에 모인 여러 사람들이 종용해서 웃으며 회원으로 가입하고 회비를 냈지만 다음부터는 어떤 핑계를 대던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선교사나 전도사가 그렇게 흔한 줄 몰랐다. 그 때는 몽골의 지리를 잘 몰라서 어딘지 모르지만 어느 지역에 개척교회를 내고 어느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만 들었었다. 그 후에 듣기로는 누가 시내 간단사 앞에 개척교회를 내고 선교활동을 하며 보이는 하뜨크는 죄다 모아서 쓰레기통에 처넣다가 모델케이스로 걸려서 강제추방 되었다고 들었다. 몽골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몽골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펴서 대사관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후문이 있었다.
구소련의 지배를 70년간 받으며 몽골인들이 민족성을 잃지 않고 자주권을 회복한 것은 간단사가 시내 중심에 있고 그 곳에 모이는 몽골인들이 불심으로 뭉쳤다고 가이드북에 나와 있었다. 그런 마당에 간단사 정문 앞에 개척교회를 내고 하뜨크를 그렇게 천대하다니, 한국의 가톨릭 선교활동은 세계적으로 알아줄만 하다. 내가 아는 지인 누구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환자’라는 말을 버릇처럼 자주 쓰는데 그 후부터 그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하뜨크에 관해서 얘기 하려다가 ‘가톨릭 환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해야 되겠다. 지금은 몽골 사업은 완전히 정리하고 미얀마에서 부업으로 일을 좀 하고 있어서 한 달은 한국, 한 달은 미얀마에서 체류한다. 현제 미얀마에서 체류하는 한국인이 이천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중 이백 명 정도가 목사이거나 선교사, 최소한 가톨릭에 관계된 사람이 그 정도 나가 있다. 미얀마도 불교국가인데 가톨릭 선교에 관계된 사람이 그 정도이니 얼마나 흔한지 한국인을 만나면 무슨 집사고 또 만나고 보면 무슨 목사다. 심지어 내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구한 한국인 지사장마저도 어느 교회의 집사다. 선교활동이나 종교 활동을 잘하면 왜 입에 오르내리겠는가? 물론 개척교회를 세우고 고아원을 설립하여 착실하게 부모 잃은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며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든 한 둘이서 소문의 물을 잔뜩 흐려놓는 부류가 있게 마련이다. 지사장을 고용하고 체류에 드는 비용 전액을 부담하며 가끔 술자리도 같이 하는 사이인데 그의 말에 의하면 다공 지역(양곤의 외곽지역)에 와서 선교활동에 실패하고 농사를 짓는 모 목사가 선교사를 초청하여 자기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돌이키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고 생생 뉴스로 술자리에서 내 귀에 대고 보도를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분노하기보다 귀를 씻고 싶었고 한국인이라는 게 참 부끄럽고, 순진하고 기질이 보드라운 미얀마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아득히 밀려들었다.
입에 담기 껄끄럽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선교사를 초청하여 접대차원에서 자기 집에 데리고 있는 스무 살짜리 가정부를 둘이서 윤간했다는 게다. 그게 접대차원이라고 했는데 말이 되는지 들으며 의구심이 생겼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 도덕성과 상식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더 구체적으로 캐물었다. 한두 번 그런 일을 저질렀으면 왜 소문이 나겠는가? 그 일이 잦아지자 가정부가 생리가 있는 날인지 느닷없이 행위를 거부했고 거부하는 가정부를 구타해서 비오는 날 밤에 그 처녀가 속옷 바람으로 탈출하여 시골 고향집까지는 가지 못하고 시내까지 들어와서 그 사실을 친척들에게 폭로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사건을 무마시켰는지 모르지만 그 목사는 그곳에서 다른 가정부를 데리고 버젓이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들은 이야기라 믿지 않기로 했다. 하긴 우리나라에는 가톨릭 성직자가 너무 많다. 돌아서면 교회고 신학대학은 자꾸 정원을 늘리고 있다. 목사나 선교사가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그 인원을 어떻게 사회가 받아들일지 걱정이다.
신성한 하뜨크를 이야기하다가 입에 담기조차 싫은 이야기로 흘러갔다. 다시 말머리를 바로잡아 옷걸이에 걸린 노란색 하뜨크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늘색 하뜨크와 달리 섬세하게 만들었다. 목도리처럼 생긴 하뜨크 양쪽에 옴마니반메홈이라고 불경 한 구절을 빨간색으로 수를 놓고 그 중간에는 우리가 절에서 보는 후불탱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뜨크에 대해 문외한이 보더라도 정성이 들어간 상당히 고가의 고급품으로 보일 게다. 펼쳐놓고 보면 어느 쪽에서 보는 게 바로 보는 것인지 중간의 탱화는 위아래가 모호하다.
하뜨크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하뜨크를 주신 안이 스님에 관해서 밝혀야겠다. 안이 스님은 내가 몽골에 들락거린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만났다. 당시에 몽골에 KOICA 해외사업단에 지원자로 몽골을 택해서 나간 후배 J가 있었다. J! 그 후배는 일 년 계약이었다.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며 좀 쉬고 싶다고 다니던 회사를 명퇴하고 다른 사업을 구상하는 기간에 울란바트로에 일 년간 나가 있었다. 한국에서 형님, 동생 하던 막역한 사이인데 그 곳에서 만나니 매일 붙어살 수밖에 없었다. J도 말은 않았지만 내가 몽골을 들락거리기에 몽골을 선택했을 게다.
나에겐 현지 매니저에게 맡겨놓은 사륜구동의 자동차가 있었고 J에겐 거실과 주방이 넓고 방이 두 개인 집을 KOICA 체류 자금으로 임대해 혼자 끓여먹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들락거리는 상태라 단골이지만 호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그 집으로 짐을 싸들고 들어가 남는 방의 주인이 되었다. J의 제안이었다. 들락거릴 때마다 호텔 짐을 꾸려서 매니저 집으로 보내지 않아도 좋았다. J가 바쁘지 않은 날이면 매니저와 함께 J를 태우고 시골로 중기가 일하는 현장으로 싸다니며 J는 몽골 초원을 눈에 익히고 나와 매니저인 친바는 중기 상태부터 현장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돌아오곤 했다. 길이 먼 현장은 도시락을 싸들고 종일 가서 현장의 게르에서 같이 자고 오기도 했다. KOICA 해외사업 지원이란 그랬다. 없으면 안 되고 있으면 할 일이 없는, 놀기 좋은 자리다.
아마 봄날이었지 싶다. 한국에서 한 달을 머물다가 들어가니 J가 KOICA에서 까쪼르트에 보건소를 새 단장하고 개소식을 한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사업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길이 밀리지 않는다면 숙소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의 읍이다. 같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몽골 사람이 모이는 잔치는 늘 양고기와 보드카가 있게 마련이다. 현지인들과 같이 먹으면 고기가 한결 부드럽고 보드카도 잘 넘어간다. 내가 술을 마시면 운전을 해야 하는 매니저 친바 녀석은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 날 가서 보니 한국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자금으로 쓰러져가기 직전의 보건소를 뼈대만 남기고 완벽하게 수리하여 새 단장을 하고 현관에 몽골 키릴문자와 한글로 된 현수막을 비롯해 풍선과 꽃까지 매달아 놓아 잔치 분위기를 한결 고조시켜 놓았다. 테이프 자르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읍장의 축사를 마친 뒤에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거의 이삼십 명이 모였다. 읍장을 비롯해 읍의 유지들과 주민들 사진을 찍어서 KOICA에 보고 자료로 남겨야 하기에 J는 행사보다 사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안이 스님을 만났다. 안이 스님은 카메라 렌즈를 향해 내 옆에 서 있던 자그마한 비구니 스님이었다. 한국에서 팔 년간 불법체류를 해서 한국어가 능통한 매니저 친바를 통역 삼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니 보통 박식한 스님이 아니었다.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티베트에서 정통 불교를 공부한 라마였다. 까쪼르트에 절이 있는가 물어보니 바로 뒤에 있다고 했다. 보건소 뒤에는 아무리 보아도 게르촌이지 번듯한 절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차려진 양고기 만찬을 하면서도 스님과 얘기를 나누었다. 비구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권하는 보드카를 마다하지 않았다. 몽골 스님들은 술과 고기를 먹는다. 고기가 주식인 나라에서 고기 먹는 거야 당연한 이치. 특별할 것은 없었다.
만찬 자리가 끝나갈 무렵 내가 절 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안이 스님은 좋다고 하면서 읍장에게로 가서 인사말인지 부탁인지 몇 마디하고는 가자고 보건소 문을 나섰다. 나는 차가 있으니 차를 이용하자고 했는데 스님은 그냥 따라 오라며 앞서 걸었다.
-세상에!
안이 스님의 절을 보고 속으로 내지른 첫마디였다.
보건소에서 비포장 큰길은 건너 안이 스님께서 절이라고 일러준 곳은 널찍하게 하샤(몽골의 나무 담장)를 쳐놓은 곳이다. 그 안에는 게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동이 쳐져있었고 특이한 것은 그 하샤 안에 말 한 마리가 거닐며 마른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마냥 평화스럽게 밖에서도 보였다. 스님이 법당이라고 일러준 곳은 오른쪽 게르였다. 하샤는 'ㄷ‘ 자로 쳐져있고 하샤가 쳐지지 않은 한쪽은 테를지에서 뻗어 내려오는 강이었다. 경내에서 강으로 내려가자면 어른 키 높이의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 언덕을 담장삼아 강을 끼고 있다. 물이 귀한 몽골에서 그렇게 강을 끼고 있으면 일단 명당자리다. 들어가면서 보아서 오른쪽 게르는 법당이고 왼쪽 게르는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체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법당 문을 열자 원형 게르 안에는 정면 불단에 하뜨크에 쌓인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주위에 큰 액자에 든 탱화가 둥글게 전시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불 꺼진 장작난로가 있었고 그 뒤에 향로와 꽃꽂이 병이 있었고 바닥은 양털로 짠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신발을 벗고 법당에 들어서자 스님이 옆으로 비켜서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는 한국식으로 향을 올리고 삼배를 하면서 앞으로 내 손이 많이 필요한 절이 되리라라는 아득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삼배를 올리고 주머니에서 불전이라고 만 투그럭짜리 지폐를 한 장 불단에 올려놓고 나와 요사체로 건너갔다. 요사체는 몽골의 여느 게르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든 침대 두 개가 있었고 중앙에 난로와 간단한 취사도구가 한쪽에 있었다. 몽골은 아무리 시골이라도 게르마다 나무로 만든 침대가 있는 입식이다. 여름이라도 바닥에서는 자지 못한다. 낮엔 덥더라도 바닥에 자면 땅에서 냉기가 올라와 추워서 못 견딘다. 난방은 난로 하나지만 양털로 짠 천으로 게르에 감싸서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장작 난로 하나로 겨울의 영하 사십오 도의 혹한을 난다.
다른 게르와 마찬가지로 들어가니 늘 준비된 비스킷과 사탕을 내밀어 줬고 안이 스님이 티베트에서 가져온 차라면서 커피포터의 스위치를 누르고 차를 다렸다. 커피포터에서 나는 김이 금세 좁은 실내를 채웠고 입에 머그고 있는 차의 그윽한 향이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처음 접한 차는 향이 입안에서 오래 갔다. 차를 마시며 친바의 통역으로 스님과 듣기 좋은 이야기와 하기 좋은 말만 골라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J가 밖에서 돌아가자고 우리를 찾았다.
게르 밖으로 나오니 풀을 뜯던 말이 게르 앞에 다소곳이 엎드려 우리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나는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말은 사람 손길이 그리웠던지 다소곳이 갈퀴를 내개 맡기고 있었다. 참으로 온순한 말이었다. 이곳에서 키우는 말이냐고 묻자 스님이 그렇다고 했다. 처음에 말이 한 마리 경내로 들어와서 풀을 뜯기에 내쫓았더니 다시 들어오고 또 내쫓았더니 다시 들어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말이 전생에 이 절과 떼어놓지 못할 어떤 인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웃으면서 스님께 말했다. 스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며 말이 들어온 지 벌써 삼 년째 난다고 했다.
그 날 스님과 더불어 말과 그렇게 연을 맺고 바로 다음날 또 스님을 찾아 까쪼르트에 갔다. 물론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는 친바를 대동해서다. 당시에는 몽골 어디에 사업에 관련된 일이 아니고는 마음 줄 곳이 없었다. 한 번 가 본 문학회도 그 모양이고 한인회도 감투 싸움만하는 내 관심의 괄호 밖이고 한인식당은 입맛보다 이문만 밝히고, 어디고 마음 줄 곳이 없던 참인데 이상하게 안이 스님에게 마음이 고요히 끌렸다. 지금 생각하건데, 그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 끌렸지 싶다.
가면서 까쪼르트 입구 길가에 묶어놓은 장작과 자루에 든 석탄을 사서 승용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도 욕심이 나서 뒷좌석에까지 싣고 갔다. 가난한 절에 시주차원이었다. 전화도 해보지 않고 스님이 출타 중인지 어떤지 개의치 않고 무작정 갔다. 가서 보고 스님이 안계시면 땔감만 내려놓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그게 진정한 시주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서 보니 스님은 안계시고 법당과 요사체 문은 열려 있고 전날 본 말이 말이 요사체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문이 열인 것을 보니 라마가 멀리 가진 않은 모양이다 그치?
차에서 땔감을 내리는 친바를 돌아보며 말했다. 스님이라는 한국 존칭을 친바는 잘 모르기에 라마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요. 그 여자 라마가 잠시 나갔네요.
녀석의 한국어 구사 능력도 올바르지 못하다. 친바가 땔감을 내리는 동안 나는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하며 예를 올렸다. 나와 보니 친바는 장작은 장작대로 석탄은 석탄대로 요사체 문 옆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친바가 그 일을 하는 동안 조용히 엎드린 말의 갈퀴를 쓰다듬어 주고 있으니 스님께서 하샤 안으로 들어오시는 게 보였다. 나는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친바는 스님과 몇 마디를 나누고는 나에게 통역이라고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옆 집 화장실 가서 똥 싸고 왔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하샤 안에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이 없냐고 스님께 물었다. 스님은 바로 옆 강가에 언덕 아래에 있는 천막을 가리켰다. 그건 하샤가 없는 언덕 아래 강가에, 바깥 길에서는 보이지 않게 ‘ㄷ’자로 양털로 짠 보온덮개로 가려놓은 곳이었다.
궁금해서 가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언덕을 내려가서 보니 얕은 물가에 천막을 치고 넓적한 돌 두 개를 놓아 양쪽 발로 밟고 앉아 볼일을 보는 자연 그대로 수세식이었다. 아마도 밤에는 강가를 이용하고 낮에는 옆집에서 볼일을 보는 모양이다. -오스 한 벤 웨?
내가 직접 우물은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이 가리킨 곳은 화장실 보다 조금 위의 강이었다. 마른 풀밭을 가로 질러 또 그곳을 확인했다. 강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고 강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모래를 통해 한 번 정수되어 배어나오는 강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울란바트로보다 상류지역이니 물은 오염되지 않을 것이나 겨울이 긴 고원에서 물이 얼면 얼음덩이를 깨어서 난로에 녹여 사용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우물과 화장실을 보며 내가 그 열악한 절에 시주할 품목을 마음속에 굳혔다. 그렇게 안이 스님을 만나고 절에 들락거리며 일주일을 보내고 귀국했다. 귀국하는 내 머릿속에는 조립식 화장실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수세식이 아니라 속칭 ‘푸세식’ 이었다. 그곳의 기후와 사정을 고려해 며칠을 고민하여 그려진 도면을 머릿속에 넣어 귀국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동실은 부피가 커서 가져갈 수도 없을뿐더러 모양새가 나지 않는다.
당시에 조립식 주택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친구가 있어 그의 공장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몇 시간 만에 자투리 자제로 그럴듯한 화장실을 만들었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타일 가게에 가니 재래식 변기도 있었다. 문도 달리고 창도 달린 화장실을 완벽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해체했다. 해체과정을 지켜보며 매직으로 나만 알 수 있는 표시를 했다. 몽골로 보내서 푼 나사를 역순으로 조아서 조립만 하면 될 수 있게 만들어 포장을 해서 운송회사를 통해 몽골로 보내고 그 물건이 몽골에 도착할 때쯤 한국의 볼일을 마치고 몽골로 나갔다. 그렇게 벌크로 탁송시키면 거의 삼 주가 걸려서 울란바트로에 도착한다. 물론 화장실 제작비보다 탁송료가 곱절이나 드는 프로젝트다.
운송회사에 탁송시키고 한국의 볼일을 마치고 다시 몽골에 들어가서 파악하니 그 물건이 벌써 도착해서 운송회사 창고에 있었다. 그 물건을 찾아 화물차에 싣고 내 소유의 소형 포클레인을 데리고 절로 갔다. 안이 스님은 계셨지만 그 물건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다. 법당과 좀 떨어진 강가 언덕이 화장실 장소로 적당했다. 스님에게 말도 하지 않고 맨땅에 적당한 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통나무 네 개를 우물정자 모양으로 걸쳐놓고 조립한 화장실을 올려 바람이 불어도 꿈쩍도 하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키니 그럴듯한 화장실이 되었다. 요사체의 전기를 끌어다가 밤에도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등까지 밝혀주니 스님께서 합장하며 그렇게 좋아했다. 모르긴 해도 그런 소재로 만든 화장실은 몽골에서 처음이지 싶다.
그 다음은 우물을 팔 차례다. 강변 우물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강의 수면보다 깊게 파니 자갈층에서 물이 나왔다. 포클레인으로 그 깊이를 파는 데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우물을 파며 친바를 시켜 화물차를 끌고 시내에 나가서 고물상에서 드럼통 네 개를 사오라고 시켰다. 사온 드럼통을 세워 드럼통 위아래를 잘라내고 세로로 포개서 묻으니 간단하게 두레박으로 이용하는 우물이 되었다. 우물 주위에는 약간 경사지게 강에서 걷은 자갈을 깔아 사용한 물을 버리면 배수가 잘 되도록 만들었다. 그 우물을 완성시키고 스님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안이 스님은 공부하는 스님이라 일을 모른다. 그렇게 불편을 겪던 화장실과 우물을 만드는데 한나절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스님 눈에는 눈 깜짝할 사이였을 게다. 안이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걸 보고 그 동안 얼마나 절실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 얼른 뚱땅 불사를 기화로 스님과 극도로 가까워졌다.
최소한 스님의 눈에는 내가 입만 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척척박사 일꾼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별 일이 없으면 매일 까쪼르트 절에 갔다. 친바를 데리고 갈 때도 있었고 친바가 없으면 손수 운전해서 가곤했다. 친바가 없어도 스님과 소통이 된다. 조금 아는 몽골 단어를 넣고 손짓 발짓 바듸랭귀지를 사용하면 무슨 말이든 다 통한다. 가면 법당에 들어가 먼저 기도를 하고 말을 돌본다. 자주 들락거리니 말도 나를 알아본다. 스님도 상의할 일이 있으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울란바트로에 있는 동안은. 하샤가 바람에 넘어졌다고 전화가 오고, 법당 게르의 지붕 끈이 떨어져서 바람에 펄럭인다고 전화가 오면 바로 달려가서 고쳐놓았다.
한국에 나올 때도 스님에게 알리고 또 들어가면 맨 먼저 스님께 보고를 하고 한국에서 준비한 선물을 드리곤 했다. 나가지 않고 경내에 어슬렁거리는 야생마도 길을 들였다. 나랑톨 시장에서 말 고비와 나무로 만든 안장을 사서 고비를 채우고 안장을 얹어서 끌고 다니며 길을 들여서 나중엔 올라타고 다녔다. 적토마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말을 잘 들으면 사 간 사료를 한 줌씩 주곤 했다. 동물은 먹이 앞에서 참 단순하다. 풀만 뜯다가 인공 사료를 주니 그렇게 잘 먹고 사료를 먹기 위해 내 말을 잘 들었다. 종내엔 자주색 내 차가 들어가면 적토마가 먼저 알아보고 풀을 뜯다가 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 해 여름에는 말이 호강을 했다.
바로 옆 강가에 데려가서 물을 끼얹어 목욕을 시켜주고 자갈로 생식기를 문질러 주면 생식기를 벌떡 세우고 몸서리치며 좋아했다. 말이란 동물은 신체 구조상 제 생식기를 개나 고양이처럼 혀로 핥을 수 없다. 그저 자위라는 게 생식기를 세워 제 뱃가죽에 툭, 툭 치는 행위가 고작이다. 절에 사는 말도 그 본능적 신체욕구에는 어쩌지 못하고 꼬리를 사렸다. 목욕시키면서 자갈로 생식기 주위를 문질러 주면 바로 발기시킨다. 그 때 생식기를 자갈로 문질러주면 뒷다리를 바투 세우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세우며 그 짜릿함을 한껏 즐기곤 했다. 그런 다음에 고비와 안장을 채우면 백번 순종한다. 그러면 그 놈을 타고 톨강을 따라 테를지 쪽으로 올라가다가 첫 번째 마을에서 백양나무에 말을 묶어놓고 보드카 작은 병과 육포를 사서 먹고 그 쪽 사람들과 떠들며 놀다가 기분 좋은 취기에 말에 올라타면 제가 알아서 절로 돌아온다. 그 쪽 마을 사람들 눈에는 이방인이 말을 타고 올라와 술을 마시며 떠들다 가는 것이 그저 신기한 모양이다. 갈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다. 같이 보드카를 마시고 어떤 사람은 집에 있는 고기도 가져다준다. 그 작은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을 타고 자주 들락거렸다. 절에 돌아오면 안이 스님께서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고 밥을 지어 놓는다. 하얀 쌀밥에 삶은 양고기를 썰어서 상추에 싸서 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스님과 둘이서 공양을 하면 더 맛이 있다. 그 해 여름에는 절에 갈 때면 친바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다녔다. 가을이 들어서자 KOICA 일 년 계약을 마친 J가 마무리 보고를 하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J가 들어가는 바람에 내 매인켐프가 없어졌다.
그 사실을 안 스님은 법당 옆에 또 하나의 게르를 준비할 터이니 그곳을 매인켐프로 삼아 같이 살자고 하셨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것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날씨가 쌀쌀해져서 게르 생활이 씻는 게 불편할 것 같아 사양하고 단골 여관으로 짐을 옮겼다. 몽골사람들은 겨울이 들면 목욕을 하지 않는다. 목욕 문화가 없다 세수하는 게 고작이다. 우리처럼 때를 밀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단골 여관에 있으면 더운 물을 받아 매일 목욕을 할 수가 있다. 한국에 나올 적마다 트렁크 두 개나 되는 짐을 친바 집으로 보내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지만 순전히 목욕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단골 여관 욕실에는 더운 물이 콸콸 나온다. 내가 몽골에 들어간다고 연락하면 친바가 단골 여관에 방을 잡아 짐을 옮겨다 놓고 공항에 픽업을 나왔다. 한 달에 한 번씩 들락거리니 집을 임대해서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그 일 년 후에 친바를 독립시켜 포클레인 한 대의 사장으로 만들어 주고 다시 매니저로 기용한 다시카 아파트에는 남는 방이 하나 있어 그 곳에 둥지를 틀었다.
다시카를 기용하고 가장 먼저 인사를 시킨 사람이 바로 안이 스님이었고 그 다음이 적토마였다. 다시카는 적토마를 보고 가장 먼저 한 말이 맛있게 생겼다고 하다가 나에게 뒤통수에 철썩 소리가 나도록 맞았다.
다시카도 한국에 불법체류를 육 년간이나 해서 한국말을 보통 잘하는 게 아니다. 다시카 아내인 바기도 한국에서 같이 체류하여 한국말을 그럭저럭해서 다시카 아파트에 있으면 불편한 게 없었다. 다시카에겐 본업이 따로 있었다. 몽골말로 알트라고 하는 금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금방이 아니라 금 도매상이었다. 닌자나 금광에서 세금을 피해 뒤로 빼돌린 금 부스러기를 사들여 녹여 금괴를 만들어 되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금들은 거의가 중국으로 밀수로 나간다. 단속이 나오면 걸리는 일이지만 리스크가 큰 만큼 이문이 괜찮은 업이다. 금광에서 금을 채굴하여 몽골 중앙은행에 팔면 53%의 세금을 매긴다. 광업주들은 세금을 피해 약간의 금을 빼돌려 다시카에게 가져와 바로 현금을 만든다. 그런 금들은 시세보다 싸게 산다. 얼굴도 모르고 심부름꾼으로부터 금을 받고 돈은 정해주는 계좌로 송금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큰 건은 비밀리에 거래가 되고 정작 금 부스러기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은 닌자들이다. 닌자란 금광 주위에 대나무 바구니를 거북이처럼 메고 다니며 금이 있을만한 모래를 대나무 바구니에 퍼 담아 물에 흔들어서 금 부스러기를 채취하는 무리들이다. 그렇게 하루에 몇 그램을 채취하는 자도 있고 운이 좋으면 노다지 하나를 건져서 팔자를 고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금광이 없이 대나무 바구니를 메고 금광 주위를 떠도는 종족을 통칭해서 닌자라고 한다.
다시카는 가게에 있으면 할 일이 없고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내 매니저도 마찬가지다. 있으면 할 일이 없고 없으면 안 되는 자리다. 다시카가 투 잡을 하기에 딱이다. 다시카가 바쁜 날이면 다시카 아내를 데리고 다니기도 한다. 다시카 아내인 바기도 안이 스님을 잘 안다. 자주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몽골은 초원이나 사막 길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멀리 갈 때면 혼자 나서면 안 된다. 하루 종일 가야하는 현장도 있고 가는데 이틀이 걸리는 현장도 있다. 그럴 땐 기름을 차에 스페어로 싣고 교대로 운전하면서 가야 한다. 바기도 몽골 여자라 별자리를 읽으며 길을 찾는다. 다시카없이 바기를 데리고 몽골 북부 흡스굴 위의 현장을 두 번이나 갔었다. 한 번 다녀오는 데 나흘이 걸리는 현장이었다. 그 현장에 일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트레일러를 보내 중기를 싣고 오는데 울란바트로를 출발한 트레일러가 아흐레만에 중기를 싣고 울란바트로에 도착한 멀고 험한 길이다. 그런 길을 혼자 다니는 건 금물이다. 트레일러 기사도 조수를 데리고 다니고 몽골 사람 누구라도 동행인이 있어야 출발한다. 심지어 차가 노후 되었으면 두 대가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출발하면서 하뜨크를 잊지 않고 챙긴다.
몽골에서는 흰색 차를 선호하지 않는다. 초원에 눈이 내리면 온통 하얀 바다다. 흰색 차가 고장이 나서 초원 어디에 서 있으면 지나는 차량들이 모르고 지나치기에 유색 차를 선호한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었다. 흰색 차가 눈밭에서 고장이 나서 발견되지 못하고 얼어 죽은. 흰 색 차가 고장이 나면 그 자리에서 꼼짝 없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다. 그런 말을 들어서 내 차를 구입할 적에 자주색으로 샀다. 하뜨크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다른 길로 샜다.
노란색 하뜨크를 안이 스님으로부터 받은 건 그 해 겨울이었다.
한국에 나왔다가 들어가니 길에 온통 달라이 라마의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달라이 라마계서 몽골을 다녀간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한국에 한 번 오고 싶다고 간절히 얘기를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비자를 내어주지 않는다.
왜?
중국이 싫어하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내어주지 않는 것이다. 중국에서 달라이 라마 비자를 내어주면 수입 금지 조치를 시킨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를 빼앗았지만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주인 달라이 라마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중국으로선 굉장히 자존심 상한 일이지만 달라이 라마는 인도의 망명 정부에서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묵묵히 하고 있다.
몽골은 우리와 입장이 다르다. 중국의 간섭을 우리보다 더 받고 있지만 전 국민이 불심으로 뭉쳐 있기에 달라이 라마 초청이 가능하다. 죽이려면 죽이라는 태도다. 몽골은 중국의 간섭을 어지간히 받는다. 모든 물자가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고 내몽고 인구 육백만을 중국에 빼앗겼다. 남은 몽골인은 겨우 삼백만이다. 땅덩이 조금 빼앗긴 건 아깝지 않은데 인구 육백만 빼앗겼다는데 대해선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몽골인이다. 그런 나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니 중국에서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와서 간단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고 했다. 물론 안이 스님도 그 자리에 참석 했다. 그 때 내가 한국에 있지 않고 몽골에 있었으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참석했을 것인데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노란색 하뜨크는 달라이 라마가 안이 스님에게 준 것이다. 몽골 스님들 이백여 명을 모아놓고 법회를 마친 뒤에 노란색 하뜨크를 한 장씩 선물했다는 바로 그 하뜨크다. 그 하뜨크를 스님께서 보관하고 계시다가 내가 들어간 뒤 어느 날 절에 법회가 있다고 참석할 수 있느냐고 전화가 왔다. 그날은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법회에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가 싶었더니 법당 게르에 열 명 남짓 모여서 법회를 했다. 법회가 아니라 기도였다. 나도 늦게 도착하여 뒤에 앉아 기도에 동참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몽골말로 기도를 하는데 나는 합장만하고 앉아 있었다. 기도가 끝나고 안이 스님께서 나를 보고 향을 올리고 절을 세 번하라고 했다. 그건 한국의 여느 절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예를 올리고 나니 스님께서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말로 경을 외고는 부처님 앞에 놓인 노란색 하뜨크를 두 손으로 정중히 받쳐서 가져와 내 목에 걸어주셨다.
노란색 하뜨크는 그날 처음 보았다.
하늘색 하뜨크가 아니라 노란색 하뜨크라 다른 의미가 있나 싶어 물어보니 그건 스님이나 선생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도 선생님도 아닌 내가 노란색 하뜨크를 받을 자격이 되나 물어보았다. 놈비치디크(작가)니까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하며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글을 쓰라고 하셨다. 하늘색 하뜨크는 수 없이 받아보았지만 노란색 하뜨크는 처음이었다. 특별히 귀한 물건이라 노란색 하뜨크를 한국으로 가져와서 내 사무실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다시 옷걸이에 걸린 하뜨크를 본다.
하뜨크에 겹쳐 안이 스님의 미소가 흘러가고 중생을 제도할 글을 쓰라는 스님의 말이 귀에 울린다. 나는 중생을 제도할 그런 글을 쓰고 있는가 자문하며 내가 쓴 글들을 머릿속으로 들추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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