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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부레인들 INSUBRES .
인스부레인들은 갈리아 키살피나 지역에 거주한 켈트인들 중 가장 유력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수의 켈트인들과 켈트-리구리아 인 부족들을 포함하는 현재의 포강 이북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러한 인스부레인들의 거점은 메디올라눔 (현재의 밀라노) 였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222년에 벌어졌던 클라스티디움 (현재의 카스테죠) 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하였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로마의 골치거리로 남았으며 특히 기원전 218-201년 동안의 제 2차 포에니 전쟁때에는 카르타고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기원전 196년에 로마에 복속되었으며, 그 후 로마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그들만의 개성을 상실했습니다.
시라쿠사인들 SYRACUSAE .
아르키메데스가 마지막으로 손본 시라쿠사의 방어용 투석탑이죠... 유레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듯^^
시라쿠사는 아르키아스 Archias 가 이끄는 코린트 출신의 이주민들에 의해 기원전 734년, 혹은 733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르키아스는 이 새 도시를 인근의 늪지대를 따 시라코 sirako 라고 불렀습니다. 이 고대도시의 중핵은 Ortygia 지역의 작은 섬들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은 머지않아 이 지역의 흙이 매우 비옥하다는 것과, 이 지역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는 성장하고 번영하였으며, 한때는 지중해의 전 그리스 도시 중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참주였던 히에로는 50년간의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이끌었으며, 그의 치세에 시라쿠사는 고전시대의 가장 유명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히에론 법 Lex Hieronica" 를 제정했는데, 훗날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 로마인들은 시칠리아의 통치를 위해 이 제도를 유용하게 이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극장을 확장하고 많은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시대에 살았던 가장 유명한 시라쿠사인은 자연철학자인 아르키메데스였습니다. 그의 무수한 발명품 중에는 "아르키메데스의 갈고리" 라고 알려진 것을 포함한 많은 무기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무기들은 후에 로마군에 대한 농성전 때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술 방면으로도 테오크리투스 Theocritus 를 포함한 많은 문학가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의 야전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용병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그들의 그리스인 동족으로 구성된 용병들을 신뢰했지만 참주들은 카르타고의 예를따라 다양한 외국 출신 용병들을 고용했으며, 이들 외국 용병들은 시민들의 호감을 그다지 받지 못했습니다.
보이인들 BOII .
할슈타트 문화권..
보이인들의 원래 고향은 갈리아 트란살피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후 그들은 두 무리의 주요 그룹을 형성하여 고향을 떠났는데, 그 중 하나는 이탈리아로, 다른 하나는 현재의 독일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 후 이들은 얼마간 역사의 전면에 그다지 등장하지 않았지만, 제 2차 포에니 전쟁기간 중에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보이인들의 지도자 중 한명인 마갈루스가 그에게 이탈리아로의 진격로를 알려주면서 로마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이들 첫번째 그룹의 이주민들은 이른바 페닌 알프스 (성 베르나르 협곡) 를 지나 포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지역이 다른 이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강을 건너 그 지역의 에트루리아인들과 움브리아인들을 내쫒고 현대의 로마냐 지역인 아펜니노산맥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훗날 카토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열두개의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문화가 일찍이 이곳에 거주했던 에트투리아 인들의 문화와 얼마나 혼합되어 있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역사학계의 관심거리인데, 실제로 발견된 그들의 유물들은 그들의 켈트 동족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명화" 되어 있었습니다.
세노만인들 CENOMANI .
원래 세노만인들은 켈트족의 일파인 아울레르크 Aulerci 일족의 한 갈래였습니다. 기원전 400년경에 엘리토비우스 Elitovius 의 지도하의 대규모의 세노만인들이 이탈리아 지역으로 몰려와 기존의 에트루리아인들을 포강 이남으로 내쫒고 포강 이북에서 동 알프스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리비우스는 그들의 거점이 브릭시아 Brixia (현재의 브레시아) 와 베로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노만인들은 거의 언제나 로마인들의 충성된 우방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들은 보이인들과 인스부레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무기를 잡았던 기원전 225년경의 이른바 갈리아 전쟁때와 한니발 원정 기간에도 로마에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결국 하밀카르에 의해 벌어진 갈리아인들의 반란 (기원전 200년) 때 반란측에 참가했지만, 기원전 197년에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의 군대에 패배당하고 복속당했습니다.
사빈인들 SABINI .
사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 이른바 "움브리아-사벨리인들" 이라고 불린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이민자들이 용합된 이들입니다. 이들 움브리아-사벨리인들의 이주는 라틴인들의 이주시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도 라틴인들처럼 반도의 남쪽으로도 진출을 시도하곤 했지만, 그보다는 주로 반도의 중앙부와 동부의 산악지역에 거주했으니, 이는 평야지역이 이미 라틴인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네 혈족끼리 땅을 둘러싸고 충돌을 벌이곤 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족간 융화가 쉽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그들의 언어와 풍습, 그리고 다른 많은 사항들을 통해 확인되는 사항입니다. 또한 레아틴인들과 사빈인들은 라티움 지역을 둘러싸고 로마와 갈등을 빚었으며, 이러한 충돌은 서부해안을 따라 빈번하게 벌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빈인들은 여전히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하였으며, 이들의 영토에 접한 라티움의 변경지역들은 그들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는 라틴인들의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세력간 융합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사빈인들과 라틴인들간에 형성된 다양한 관계와 후에 사빈인들 사이에서 진행된 급격한 라틴화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삼니움인들 SAMNITES .
삼니움인들의 부족국가는 그 지역의 농촌사회가 발전된 형태의 것이었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는 분명히 초보적인 마을 수준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전된 진정한 도시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어떠한 유물역시 발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치단위로서의 "도시" 의 존재는 삼니움인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정치적, 행정적 단위는 "토우토 touto" 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삼니움인들은 부족사회가 그 정치적 구조의 기반을 이루는 전前-도시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의 준-부족 독립체는 태고때부터 전해진 이탈리아 지역의 제도였던 "파구스 pagus" 였습니다. 즉 각각의 "토우토" 는 다수의 "파기 pagi" 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파구스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 가장 작은 행정적 세부단위였지만, 하나나 그 이상의 정착지를 포함하거나 하는 비교적 큰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야지대의 성벽은 없지만 방책이 쳐진 좀더작은 촌락 ("vici") 이나, 산악지대에 설치된 성벽이 건설된 요새를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삼니움들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는 네개의 삼니움 부족들의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Carricini, Caudini, Hirpini, 그리고 Pentri 가 그것입니다. 아마도 이들 부족들 역시 "tuoto"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삼니움인들은 다양한 이탈리아인 민족들과 싸웠으며, 마침내 기원전 340년대에는 로마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삼니움인들은 기원전 343년에서 290년간에 걸친 일련의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이탈리아 반도안에 존재하는 로마의 가장 강력한 호적수임을 증명했습니다. 부족들은 연합의 형태를 이루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캄파니아의 오스칸인들 Oscan Campani, 프레탄인들 Frentani, 아풀리인들 Apuli, 그리고 마침내는 루칸 Lucani 인들까지도 굴복시켰습니다. 후에 삼니움인들은 피로스의 동맹에 참여하였고 그의 이탈리아 원정기간 (기원전 284-272년) 이후에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으며, 그들 중 다수가 후에 한니발 원정에도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로마 내전기간 동안에 복속되었습니다.
리귀르인들 LIGURES .
리귀르인들은 켈트어와 이탈리아어의 영향을 모두받은 인도 유럽어계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이탈리아 북서부와 프랑스 남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흡수했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리구리아, 피에드몽, 복부 아펜니노 산맥에 이르는 지역까지 뻗어나갔으며, 후대에 움브리아인들과 더 후대의 갈리아인들에 의해 빼앗길 비옥한 농토를 경작했습니다. 그들은 느슨한 부족 연맹체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위에 서술한 바와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리구리아인들의 농토는 그다지 좋지 못했기에 리귀르인들은 사냥과 약탈, 해적질로 농업의 부족분을 메꾸어가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특히 게누아 (후대의 제노바) 와 같은 항구마을들은 좀더 발전된 상태였으며 상당한 번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리귀르인 용병들은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에 고용되어 싸웠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그들은 인근의 갈리아인들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원전 171-168년 동안에 로마편에서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후대의 마리우스 시절에 상당한 규모로 로마군에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리귀르인들은 체구는 작지만 산악지역의 생활로 단련된 거친 사람들이었으며, 호전적이고 자부심 넘치는 씩씩한 전사들이었지만, 변덕스러운 켈트 이웃들과는 달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베네티인들 VENETI .
베네티인들은 라틴어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인도유럽어계의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기원전 1000년경에 에우가네인들 Euganei 이라고 알려진 전-인도유럽어계의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을 북쪽으로 내쫒고 아드리아 해 북쪽 해안지방에 정착했습니다. 전술한 바와같이 그들은 라틴어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른바 베네티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베네티어를 사용한 이탈리아 인들은 "아테스테 Ateste (오늘날의 Este)" 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문화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기원전 9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번창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다른 부족민들과 용화되거나 하면서 서아시아와 북유럽 지역간의 문화전승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른바 "Ateste" 문화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로는 시공된 청동공예품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래 와인 항아리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시툴라 situla (양동이)" 의 존재는 포도재배법의 전파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배네티인들은 아마도 고전시절의 가장 뛰어난 청동기 제작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판금기술과 세공기술은 남쪽으로는 에투루리아인들에게 전승되었고, 북쪽으로는 브리튼의 소도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아풀리인들 APULI .
이탈리아 반도의 남서부 끝자락에는 다른 지역과 뚜렷히 구분되는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는데, 고대인들은 이들을 가리켜 Iapyges 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Iapyges 의 문화는 인근의 그리스 식민지의 영향을 받아가며 기원전 9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크게 발달했습니다. Iapyges 인들은 주된 혈족적 집단으로 나뉘어졌는데, 거주지역에 따라 가장 북쪽에 Dauni 인들, 중간지역엔 Peucetii 인들, 가장 남쪽, 즉 이탈리아의 "지옥" 부분에는 Mesapii 인들이 살았습니다. Iapyges 인들의 북쪽 영토는 인근 오스칸인들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으며, 기원전 4세기 중반경이 되면 Dauni 인들과 Peucetii 인들 (그리고 아마도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오스칸인 이주민들.) 은 "Apuli" 라 알려진 집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벨리인들 SABELLI .
Vestini 인들, Marsi 인들, Paeligni 인들, 그리고 Marrucini 인들은 이른바 "사벨리 동맹" 이라고 불린 일종의 연맹체를 이루었는데, 후에는 인근의 Frentani 인들이 이 연맹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는 적지만 자부심 넘치고 호전적인 부족들은 고대 사료에 "gentes fortissimae Italiae", 즉 전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용맹한 사람들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며, 그들 중에서도 Marsi 인들의 전설적인 용기는 특기할만 합니다.
사벨리인들은 원래 사빈인들의 한 일파 중 그들의 땅, 사비나를 떠나 중부 고원지대나 인근 남부의 산악지대에 정착한 이들을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빈인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이른바 "성스러운 봄 ver sacrum" 이라는 맹세를 통해 전쟁을 그만둘 것과 전쟁의 해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딸들을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내보겠다는 맹세를 하곤 했는데, 세월이 흘러 이들이 나이가 차면 신탁에 따라 희생되든지, 아니면 새로운 영토를 할당받아 살아가곤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원래 작은 부족들이었던 이들이 그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Vestini 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란 삿소 산악지방에, Marrucini 인들은 그 바로 남쪽지방에, Frentani 인들은 아풀리리아 경계지방에, Paeligni 인들은 마젤라 산맥지대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Marsi 인들은 Fucine 호수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도시동맹 ITALIOTAE .
이 동맹은 그들간의 내전이나 인근의 오스칸인들의 확장에서 기원전 4세기경까지 살아남은 그리스 식민지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들 중 특기할만한 대도시였던 타라스시 (로마인들이 타렌툼이라 부른 현대 이탈리아의 타란토 지역) 가 이 동맹의 맹주였습니다. 타라스시는 그 강력한 함대 외에도, 스트라보의 기록에 따르자면 3만명의 보병과 3천기의 기병대 그리고 1천기의 이른바 "Hipparchoi" 라고 불린 정예 기병대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타라스시의 기병의 대부분이 "Tarantines" 라고 알려진 방패로 무장한 경기병대였다면, 이들 "Hipparchoi" 들은 아마도 중기병대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민군 외에도 타라스시는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상당한 규모의 용병대를 고용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타라스시가 부유해지면서 타라스시의 부유층들은 점차 군복무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군복무에 대한 인식의 저하와 점차 증가해가는 오스칸인들의 압력은 기원전 350년 이후의 타라시로 하여금 외국 용병대에 의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원전 343년에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Archidamos 가 스파르타 시민병들과 용병들과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투와중에 전사했으며 그의 병사들은 루칸인들과 메사피인들에게 항복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원전 334년에는 에피루스의 왕 알렉산더 Alexander 가 아풀리리아 거의 전역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성공적인 작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타라스시는 그의 권력에 대한 야망을 두려워하여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지원을 받지못한 그는 그는 루칸인들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위망을 뚫기위해 루칸인들의 장군과 단독대결을 벌여 그를 죽였지만, 그의 군대는 뒤이은 전투에서 몰살당했으며, 알렉산더 자신역시 아마도 이전에 자신의 용병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한 루칸인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브레티인들 BRETTII .
라틴인들에 의해 흔히 브루티 Bruttii 라고 불리고 그리스인들에 의해 브레토이 Brettoi 라고 불린 브레티인들은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 남서부의 칼라브리아 지방에 위치한, 그들의 이름을 따 명명된 브루티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브레티인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들로서, 일찍이 루칸인들에 의해 정복되어 오스칸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기원전 456년에 반란을 일으켜 그들만의 독립적인 동맹을 결성하고 서부 해안가의 몇몇 그리스 도시들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브레티라는 명칭은 아마도 루칸인들이 "도망노예" 를 부르는데 사용한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나타나는 브레티인들은 불굴의 전사들이었습니다. 몸젠은 브레티인들의 의복이 그리스의 전前-헬레니즘 시대의 주민들의 복식과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으며, 그들이 일반적으로 "지중해 민족" 이라 불리는 집단의 일원인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브레티인들의 세력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초에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들의 거점은 콘센티아 (코젠차), 페텔리아 (스트롱골리), 그리고 클람페티아 (아만테아) 였습니다. 그들은 헬레니즘 세계의 일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복에는 그리스 복식의 특징이 나타나 있으며,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그리스인으로 간주하지 않았음데도 불구하고 그들역시 오스칸인들처럼 그리스어에 능통했습니다. 그들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은 그 표면에 풍부한 장식이 베풀어져있는 묘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노네인들 SENONES .
세노네인들은 기원전 400년경에 알프스산맥을 넘어와 아르미눔에서 앙코나에 이르는 이탈리아 동부해안을 차지했으며, 그들의 거점은 후에 세나 갈리카 (세니가글리아) 라고 알려지게 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391년에 에트루리아를 침략하고 클루시움을 포위했습니다. 클루시움 시민들은 로마에 도움을 청했는데, 이렇게 이 전쟁에 관여하게 된 것은 로마에게 있어 대재앙을 초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세노네 인들에 맞선 알리아 전투 (기원전 390년 7월 18일) 에서 참패당하고 로마 자체마저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 후 100년이 넘도록 세노네인들은 로마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나, 기원전 283년에 P.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결정타를 입고 그들의 땅에서 쫒겨났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그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데, 아마도 그들은 다뉴브강과 마케도니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던 갈리아인 무리 중 일부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후에 로마인들은 이들의 거점이었던 지역에 식민지를 세웠는데, 이 지역은 에트루리아의 로마 식민지인 세나 율리아와 구분하기 위해 세나 칼리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포에니인들 POENI .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 건설된 페니키아인들의 도시 중 가장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프리카의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과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그리고 스페인 일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을 "포에니 (페니키아인들)" 라고 불렀습니다. 카르타고는 근본적으로 군사력이 아닌 상업과 해운에 중점을 둔 국가였으며, 그 육군은 언제나 대부분 용병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장군직은 선출식 종신직이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전문적이고 경험많은 장군들을 배출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들 장군들은 대부분 카르타고의 귀족계층 중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은 군사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용병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동향출신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지만, 오직 스파르타 인이었던 크산티포스만이 고위 지휘권을 잡을 수 있었던 외국출신 장교였습니다. 카르타고 시민들 역시 장교들만 배출한 것이 아니었으니, 비상시에는 그들 역시 무기를 잡고 전장에 나섰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카르타고 육군에는 해외주둔 경험까지 있는 시민병들이 있긴 했지만 그 수는 결코 많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로는 카르타고에는 그리스나 이탈리아인들과 달리, 보병의 주력을 공급할 소토지 보유자들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카르타고는 대부분, 혹은 완전히 용병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기병대는 언제나 육군의 25% 가량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비율은 설혹 그리 높지 않다고 보일지 몰라도, 그들의 그리스와 로마인 적들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용병들의 출신은 극도로 다양했습니다. 서부 지중해의 모든 지역에서 온 남자들이 카르타고 군에서 일자리를 찾곤 했습니다.
움브리아인들 UMBRI .
움브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에 거주했던 주요 민족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이탈리아로 향한 두번의 성공적인 이주를 벌였는데, 이들은 각각 이른바 고故-움브리아인들 Paleo-Umbrians 과 그냥 움브리아인들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고-움브리아인들의 기원과 문화적 특성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그들의 이주시기와 출발지점,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등으로 미루어 볼때 이들 고-움브리아인들은 선사시대 그리스의 아카이아인들과 모종의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고학적인 연구는 이러한 심증을 굳혀 주는 바, 팔레오-움브리아인들은 이른바 "해양영토 Terramare" 문화권의 범주에 속하는 동시에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서 발견되는 "빌라노비안 Villanovian" 문화권의 범주에도 속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청동기시대 초엽에 북서쪽에서 내려와 이 지역의 원주민인 리구리아인들을 대체한 것으로 보입니다.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기록에서 이들을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에 틀림없다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움브리아인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날 때 반도에 이미 존재하던 다른 인근의 부족들을 흡수해가며 움브리아인, 사빈인, 사벨리인, 그리고 오스칸인등으로 분화된 한 민족의 지류였습니다. 그들은 라틴인들과 관련이 있는 아리아계 민족이었습니다. 움브리아인들의 정치적 조직으로는 도시 ("tota") 가 있었으며, 그 외에 리비우스의 글과 Eugubine 표에서 볼 수 있는 Umbri Iguvini, Umbrii Camertes, Umbri Veii, Umbri Nahartes, Umbri Sarsinates 등등과 같은 보다 큰 준-혈족적 단위 ("trifu") 를 이루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트루리아인들 ETRUSCI .
이 시기에 에트루리아인들의 세력은 갈리아인들과 로마인들의 공격을 받아 이미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갈리아인들은 기원전 400년경에 포강 유역의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격했는데, 아마도 펠시나 (볼로냐) 는 기원전 350년 정도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남쪽의 캄파니아 지방에 존재하던 에트루리아인들의 지배는 오스칸인들의 확장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이미 베이는 로마에 넘어갔으며, 베이의 오랜 동맹이었던 카에라에는 기원전 353년에 로마로 흡수되었습니다. 나머지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때때로 삼니움인들, 혹은 갈리아인들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했는데, 이러한 에트루리아인들과 보이인 갈리아인들의 연합은 기원전 282년, 281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Vadimon 호수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함으로서 분쇄되었습니다.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은 조용히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기원전 225년에는 갈리아인들에 맞서 혼성군을 내보기도 했으며, 한니발 전쟁 시기에는 로마편에서 싸운 에트루리아 기병대에 관한 언급이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리비우스가 기록하기를, 기원전 400년경의 에트루리아인들은 그 어떤 이탈리아 민족들보다도 숫자가 많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의 신분구분은 명료했으니, 농민들의 태반은 억압받는 농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절한 무장을 갖출수도 없었고, 지베계급에게 신뢰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때문에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구성원들의 비율이 다른 민족들보다 떨어졌습니다. 시민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의 홉라이트 방식으로 무장한 중보병이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필라" 가 대신 사용되기는 했지만, 기존의 장창역시 동시대의 로마군단이 "필라" 와 창으로 무장한 것처럼 퇴출되지 않고 함께 쓰였습니다. 경보병들은 그다지 언급되지는 않는데, 이들은 아마도 귀족집안의 가솔들인 것으로 보이며 보조적인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의심할 바 없는 경무장 보병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몇몇 민병대 조직이 기원전 310년의 로마인 공격자들에 맞서 "급하게 징모된 에트루리아 농민부대" 라고 언급되는 이름하에 편성되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S.P.Q.R.
라틴인들과 아우룬크 Aurunci 인들, 볼스크 Volsci 인들, 헤르니크 Hernici 인들과 카푸아의 캄파니아인들의 결정적인 복종을 받아낸 라틴 전쟁 (기원전 340-337년) 의 종전과 함께 로마는 이탈리아 역사의 명백한 주인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리비우스는 이른바 "카밀루스 군단" 이라고 불린 로마의 군단 조직에 대해 설명하면서, 맨 먼저 마니풀 전술의 도입에 관한 설명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로마군들은 장비할 수 있는 무장의 정도에 따라 구분된 부대에 소속되었지만, 이 새로운 체계는 그러한 경제적인 조건 만큼이나 나이와 경험의 정도를 중요하게 고려하여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군단은 세개 라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첫번째 15개 마니플은 젊은이들의 꽃인 "하스타티 hastati" 들이었으며, 이들 각각의 마니플에는 20명씩의 "레베스 leves" 라고 불린 투창병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두번째 라인은 이른바 "프린키페스 principes" 들이었는데, 이들은 인생의 절정에 있는 좀더 나이든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세번째 라인은 15개의 "ordines" 로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ordo" 는 세개의 "벡실라 vexilla" 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베테랑인 "트리아리 triarii" 와 좀더 젊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로라리 rorarii", 그리고 그 전투력을 가장 신뢰받지 못한 "악센시 accensi" 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군단에 군적이 올려진 시민들은 로마 자체뿐만 아니라 정복이나 동맹의 결과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던 다양한 도시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때때로 이것은 군복무를 포함한 시민의 의무와 다른 시민의 권리들은 허용하지만, 투표권만은 포함하지 않았던 이른바 "투표권 없는 시민권 civitas sine suffragio" 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이러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라틴인 이웃들, 나중에는 이탈리아 전역을 아우르는 지역에서 동원되는 동맹군을 소집할 수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로마 군단은 같은 크기이거나 혹은 좀더 큰 규모의 이러한 동맹군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라에트인들 RHAETI .
고대 라에트인들은 현대의 오스트리아인 티롤지방과 트렌티노, 그리고 현대의 이탈리아에 편입되어 있는 서부 베네토 지역과 동부 스위스 지역, 현대 독일의 바바리아와 바덴-뷔르텐베르크 지역 등등의 중부유럽에 분포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라에트인들은 북서부 알프스산맥 지역의 가장 강력하고 호전적인 부족들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으며, 일종의 느슨한 연맹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라에티인들을 이루고 있던 중요한 부족들로는 Tridentini, Stoeni, Feltrini, Catubrini, Breones, Isarci, Bergalei, Vennonetes, Venostes, Anauni, Camunni, Tumplini, Genuani, Focunates, Calucones, Sarunates 등등이 있었습니다. (헥헥;;) 리비우스는 확고한 어조로 이들이 에트루리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니부어와 몸젠역시 이러한 시각에 찬성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대大 플리니우스가 기록한 그들의 풍습으로 보건데 그들은 원래 포강 유역의 평야에서 살다가 갈리아인들의 습격으로 산악지역으로 쫒겨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들의 명칭인 "라에트" 는 그들의 지도자인 라에투스 Raetus 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좀더 그럴듯한 설명이 있으니, 켈트어로 산악지대를 뜻하는 "rait" 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에트루리아 기원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지역이 로마인들에게 알려져 있을 무렵에는 이미 켈트인들이 원주민들과의 통합을 끝낸 상태였습니다. 비록 라에티인들은 에트루리아 언어의 한 갈래를 사용했으며 그들의 언어가 인근 포강지역의 에트루리아인들의 언어와 켈트이웃들의 언어적 특징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에트루리아인들의 직접적인 후손이라는 주장은 오늘날에는 부정되고 있습니다.
메사피인들 MESSAPII .
이탈리아반도의 남서부 끝자락에는 뚜렷히 구분되는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는데, 고대인들은 이들을 가리켜 Iapyges 라고 불렀습니다. Iapyges 문화는 인근의 그리스 식민지의 영향을 받아가며 기원전 9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크게 발달했습니다. Iapyges 인들은 주된 혈족적 집단으로 나뉘어졌는데, 거주지역에 따라 가장 북쪽에 Dauni 인들, 중간지역엔 Peucetii 인들, 가장 남쪽, 즉 이탈리아의 "지옥" 부분에는 Mesapii 인들이 살았습니다. 메사피인들의 언어는 아폴리아 지역 중에서도 살렌틴 salentine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상당한 수의 일련의 장송가, 신에게 바치는 봉납가, 화폐에 적힌 글,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문장들로 알 수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식 알파벳으로 쓰여졌습니다. 그 외에도 고대 작가들의 글과 고대의 지명에서도 그들의 언어에 대해 많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알려진 메사피인들의 언어는 의심할 바 없는 인도-유럽 어계이며 라틴어와 움브로-사벨리 방언과는 구분되지만 발칸지방과 중부 유럽지방의 언어와는 다소간 유사점이 있습니다. 준 혈족적인 집단인 Sallentini 인들과 Calabri 인들을 포함하는 이들 메사피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와 Iapygian 유래의 풍습들을 오래동안 지켰습니다.
루칸인들 LUCANI .
루칸인들은 남쪽으로 이동한 오스칸인들의 한 일파입니다. 루칸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그들이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정복한 지역에 붙였습니다. 그 전 시기에 후대의 루칸인들의 소유가 될 이 지역은 Oenotria 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이탈리아의 최남단이라는 뜻으로서 그리스인들이 붙인 것이었습니다. 산맥이 이어진 내륙부는 Oenotrians 인들과 Choni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해안가는 틀림없이 그 내륙부를 보호령으로 삼고 있었던 강력한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영토였습니다. 우리는 스트라보의 기록을 통해 루칸인들이 전시를 제외하고는 민주적인 정치치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인 행정관들 가운데에서 독재관이 선출되는 구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루칸인들은 차차 삼니움과 캄파니아의 경계에서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이르는 모든 지역 (동부 해안의 그리스인 마을들을 제외하고) 을 차지하였으며, 포세이도니아-파에스툼과 엘레아와 같은 유명한 그리스 도시들까지도 루칸인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오늘날 칼라브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들은 브루티인 ("Brettii" 혹은 "Bruttii") 의 이름하에 독립을 선포했으며 결국 루칸인들의 영토는 옛 영토의 북쪽 지역만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우리는 루칸인들과 타라스인들, 그리고 에피루스의 왕 알렉산더와의 전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알렉산더가 타라스인들의 요청에 의해 기원전 333년과 326년에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298년에 루칸인들은 로마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이들의 연합작전하에 로마의 영향력은 베누시아 (기원전 291년), 파에스툼 (기원전 273년), 그리고 기원전 272년에는 타라스 (타렌툼) 그 자체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마와 루칸인들은 서로 협력할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빈번하게 적대관계에 있기도 하였으니, 이는 주로 삼니움 전쟁 기간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피루스가 이탈리아에 상륙했을 때 (기원전 281년) 루칸인들은 그의 편임을 선언했으나, 피루스가 결국 그의 동맹군들을 로마인들의 자비에 맡겨놓고 떠나버리자 자신들이 로마인들의 분노에 노출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와우~ 20개나 지도가 있으며 영역보기엔 너무 좋네요. 로마도 생각보다 다민족국가라니까요. ㅎㅎ 여러 민족,부족을 성공적으로 합침으로써 나중에도 성공적으로 영역및 세력을 확장하죠. 플루타르코스의 말도 그렇지만 정말 대단하긴해요. 뭐 미국도 다민족을 성공적으로 통합해가고있지만, 문제가 있긴있죠. 로마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다민족으로인한 나라가 쪼개지지않은 최악은 미국이나 로마나 않당할것같아요. 그정도만해도 대단한듯해요.
다른점이라면 미국은 이방인들의 집합이지만, 로마는 기존원주민들의 집합체라는거 좀 다른거같군요... 아주큰 차이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라면 이탈리아 반도 통일 정도로 만족하고 안주할텐데 로마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외 정복에 나서는게 독특해 보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무한 정복이야말로 대제국의 특징이지만 로마만의 동인도 있는 것 같은데...
뭐 이탈리아 반도도 따뜻하고 살기 좋은 동네니까요..ㅎㅎㅎ
시라쿠사 요새에 대한 내용은 어떤 책에 나오나요??
지고의황제님//물론 그 과정이 쉽지많은 않았지만 말이죠... 어쨋든 대단한 성과임엔 분명하죠. 로마의멸망님//그런 차이도 있죠. 완전 이민자들과 오랫동안 뿌리내리며 살아온 원주민들을 똑같이 대할수는 없겠죠. 리카르도님//그러고보니 저도 궁금하군요. 원래 확장적인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단순히 메시나 사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좀,,, 델카이저님//롬탈워 해보시면 이탈리아의 부, 쩔죠... 그리스만큼은 아니래도. 여러 세력들이 꼬일만 합니다. Phalanx님//전 "유레카" 라는 만화와, 프랑스제 인류생활사에서 봤습니다. 참고로 인류생활사는 이 카페에서 제 아뒤로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Tear님//ㅎㅎ;;;
아 그리고 처음읽을때 '보이'를 읽는순간 워해머의 그 '보이'들이 생각났다는...ㅡ_ㅡㅋㅋㅋㅋㅋ
결론 로마인들이 전부 짱먹었습니다.
보이족의 몰락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