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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kcdc 설교 예화 자료|설교 예화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숲속에서 수십 년 동안 힘으로 왕좌를 지켜오던 호랑이 가문이 동물 회의 개최결과, 토끼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억압과 불합리한 권력을 휘두르던 호랑이 대신 토끼가 뽑힌 것에 기대가 많았다. 호랑이가문은 예전의 지위와 권력이 탐이 났으나, 이미 왕좌를 빼앗긴 자신에게는 별다른 힘이 없었다. 샘이 난 호랑이는 토끼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토끼가 작은 실수를 해도 크게 부풀려서 떠들었으며 인간에 의한 생태계의 파괴 역시 토끼가 잘못해서 일어났다고 억지를 부렸다. 게다가 예전의 자신이 지은 계곡의 구름다리가 무너진 것까지 토끼에게 떠밀었다. 동물들은 처음에는 호랑이의 그런 말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호랑이를 전부터 지지하던 숲의 부자 곰이나, 호랑이에게 먹이를 바치며 먹고 살았지만 토끼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여우 등이 나서서 숲의 오래된 소식통인 다람쥐들에게 토끼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을 퍼뜨리도록 유도 하였다. 토끼는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호랑이와 그의 추종자들이 일을 하는데에 눈엣가시였으나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그들도 자신이 하는 일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호랑이에게 갔지만, 오히려 헛소리 하면 물어죽이겠다느니, 자기 할 일도 못하면서 타협을 구걸이나 하려든다느니 하는 폭언만 듣고 돌아왔다. 그 와중에 숲속은 호랑이의 이간질에 의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싸움만 늘었고, 싸움 때문에 숲의 일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호랑이는 토끼가 무능해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떠벌이며, 토끼 따위는 애초부터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동물들은 점점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었고, 급기야는 토끼를 좋아하던 사람들도 토끼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숲속의 왕을 다시 뽑게 되었다. 당연히도 동물들은 호랑이를 왕으로 뽑았지만, 호랑이는 동물들을 억눌러 자신의 잇속만 차리며, 숲은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호랑이의 예전 모습을 떠올렸지만, 이미 늦었음을 알고 깊게 한탄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리더/모략) ☞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30:19)수 많은 갈림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어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어둠의 절벽을 향해 길을 간다. 순간의 판단이 10년 혹은 평생을 좌우한다. 어린이에게 늘 미래를 바라보는 말과 행동으로 앞서가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중년 남자가 이비인후과 의사와 심각한 상담을 했다. 자기 아내가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서였다. 의사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늘 집에 가거든 정문에서 아내에게 큰소리로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라고 물어보시라고 말했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안 들리면 두 번 째로 거실 문에서 같은 질문을 해 보라고 했다.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세 번 째는 부엌문에서 같은 질문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네 번째로 아내의 귀에 대고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물어보라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남자는 그 날 밤 그대로 실천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까지 그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네 번째 질문하자 그의 아내가 대답했다. “여보, 김치찌개라고! 대답한 것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청각 이상이 있는 사람은 아내가 아닌 바로 중년 남자 자신이었다. (판단/실수) ☞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은 남의 눈의 티를 탓하게 마련이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보면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고 얼마나 후회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판단은 내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을...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옛날 한 선비가 한양을 다녀오다가 나루터에서 친구의 외아들을 만났다. 선비는 배에서 내렸고 외아들은 인사를 하고 선비가 내린 그 배에 오르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 한복판에서 순식간에 뒤집어지며 강물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선비는 너무 놀라 크게 탄식하다가 이내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친한 친구가 갑자가 찾아오니 그는 기뻤다. 즐겁게 친구를 환영하며 술과 안주를 준비시켰다. 그럴수록 선비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래도 도저히 숨길 수 없어 선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방금 목격한 사실을 얘기했다. “저...자네 아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네. 내가 워낙 멀리 있어서 도울 수도 없었고 그 못돼먹은 사공이 어찌 그리 많은 사람을 태우던지...” 선비는 친구의 아들이 물에 빠져죽은 것이 마치 자신의 죄인 것처럼 말을 맺지 못하며 사공을 원망했다. 그런데 친구는 선비의 얘기를 조용히 듣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얘기를 빨리 들려주어서 고맙네. 그러나 너무 걱정 말게. 내 아들은 살아 돌아 올 걸세. 그러니 술이나 들며 오랜만에 얘기나 나누세” 선비는 친구의 태연한 이 모습에 크게 놀랐다. 그가 평소에도 인격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물에 빠져죽었다는데도 태연하기만 하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죽었던 외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아닌가? 선비는 너무도 놀라 친구 아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을 뵙고 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사공이 정원 이상으로 손님을 태우기에 그만 내렸습니다. 평소 저의 아버님께서는 위험은 스스로 피해야 한다고 제게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을 좇아 따라했을 뿐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교육/실천) ☞ 선비는 친구의 가정교육이 삶과 죽음의 길에서도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는 교훈을 얻고 돌아와 그 날부터 스스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친구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독일에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찬양대원들이 주일에 있을 찬양을 위해 열심히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습을 하다 힘들어서 잠시 쉬는 시간, 갑자기 한 어린이가 지휘자 앞으로 다가왔다. 지휘자는 어린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니?” “지휘자님 제가 찬양대원이 되고 싶습니다.” 소년의 대답에 지휘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우리 찬양대는 어른만 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어린이는 받아들일 수 없단다. 안타깝지만 너는 안 될 같다. 네가 아무리 찬양을 잘한다고 해도 어른만 찬양대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네가 찬양대원이 되지는 못할 것 같구나.” 지휘자의 대답을 들은 이 당돌한 꼬마는 맑은 눈빛으로 지휘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휘자님,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쓰시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이곳으로 왔어요.” 주님께서 쓰신다고 했다는 고백을 들은 지휘자는 감동을 받고 그 어린이를 찬양대원으로 발탁했다. 그 소년은 믿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찬양도 탁월하게 잘해 눈길을 끌었다. 이 아이가 자라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창작한 역사적인 인물이 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찬양/아린이) ☞ 성경에서도 다가오는 어린이를 멀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는 세상의 미래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게 예수님을 더 알게 하는 것은 교회의 몫임을 명심하자.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녀 교육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문객은 이렇게 말을 했다. "저는 어린아이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결심을 하는 법을 배우거든요. 어린아이들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완전하게 키워 나가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콜리지는 말을 중단시키며 얘기했다. "우리 잠시 바깥 정원에 가서 이야기를 할까요?" 이렇게 말하고 콜리지는 방문객을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방문객은 그의 정원을 한 번 둘러보고는 놀라서 얘기했다. "아니! 왜 여기는 잡초들밖에 없습니까? 정원에 꽃은 하나도 없고 잡초만 있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러자 콜리지가 기다렸다는 듯 얘기했다. "여기도 예전에는 꽃들로 가득했었지요. 그러나 올해에는 손질을 안 하고 일부러 내버려 뒀습니다. 꽃들 스스로 자라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정원이 어떤 꼴이 되는지 한번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렇듯 꽃들은 다 죽어버리고 잡초만 무성한 정원이 되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녀/환경) ☞ 아이들은 꽃과 같다. 신경을 쓰지 않고 무성의하게 아이를 방치한다면 정원의 꽃과 같이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아이들에게 있어 교육과 훈육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에서도 미래를 이끌어갈 복음의 전도자를 어릴 때부터 잘 교육시키는 것이 좋다. 아이들을 방치하는 순간 망하는 길로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는 개를 데리고 시내버스를 탈 때, 일반 요금의 반액을 더 내야 하는 법이 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돈이 아까워 개의 몫을 내지 않으려고 박스 속에 개를 집어넣고 짐처럼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자신의 몫만 내고 개의 몫은 내지 않고 탔다. 하지만 기사는 그런 사실을 몰랐고 버스는 출발했다. 그렇게 부인이 버스에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났는데 어떤 신사가 아주 큰 개를 끌고 올라와 자신의 몫의 요금과 개의 몫을 내고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신사가 데리고 탄 이 큰 개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다른 개가 있는 것을 냄새를 맡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인이 들고 있는 상자를 향해서 ‘킁킁’하기 시작하더니 박스 속에 개가 있는 것을 알고는 으르렁대고 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스 속에 들어있는 부인의 작은 개도 지지 않겠다고 같이 짖어대며 상자를 박박 긁으면서 야단치는 바람에 부인의 속임수가 들통이 나고 말았다. 순간 부인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다음 정거장에 이르자마자 운전기사에게 혼나고 버스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속임수/개) ☞ 구원에 이르는 버스에 타려면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위의 부인처럼 속임수를 사용하여 구원에 이르는 버스에 탑승할 수 없다. 버스기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속임수에 당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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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젊은 부부가 아기 하나를 낳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는 하나 밖에 없는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낮에는 산기슭을 일구어서 닭을 키우고 밤이면 자주 고장 나는 재봉틀 하나로 남의 옷을 수선하면서 삯바느질을 해서 자녀를 키웠다. 아들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되었다.. 아들은 졸업을 하는 날 졸업생들을 대표해서 졸업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고 학장으로부터 대통령을 대신해서 금메달을 수여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의 영광스러운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입고 나갈 만한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었다. 어머니는 궁리 끝에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내가 네 졸업식에 마땅히 참석해야 되겠지마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좀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들은 그런 말을 하시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그것은 안 되는 말입니다. 어머님이 참석하지 않는 졸업식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데서 받는 금메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머니,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참석하지 않으시면 제가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아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남루한 옷차림과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 때문에 아들을 부끄럽게 할까 봐 사람들이 보는 앞에 나설 수가 없어서 뒷좌석에 숨다시피 하여 졸업식에 참석했다. 아들은 졸업생댈을 대표하여 연설하기 위해서 강당으로 올라가 졸업연설을 시작했다. “제가 이런 영예를 얻게 된 것은 두 분의 공로덕분입니다. 하나는 제가 아무리 비천하고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지라도 평등하게 길을 열어주신 교수님들 덕분이고, 둘째는 매우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삯바느질 하면서 저의 학자금을 대어 주면서 기도하고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격려하신 어머님의 한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한 아들은 어머니에게 다가가 대통령이 보낸 영광스러운 금메달을 뒷좌석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앉아있는 어머니의 목에 걸어 드리면서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은혜였습니다.”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1902년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외쳤던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바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머니/효성) ☞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는 아들이었기에 그가 재임하던 1914년, 미국 국회에서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날로 정했다. 그리고 거국적으로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게 했다. 그때부터 전 세계의 교회가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날로 지키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교회도 오래 전부터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꾸어서 어버이께 감사하고 기념하는 날로 만들어서 지키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얼마 전 경찰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불법 건강식품을 비싸게 판 혐의로 업자 10여명을 붙잡았다. 주로 60, 70대의 외로운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업자들은 즐거운 공연과 지극한 정성을 미끼로 환심을 산 뒤 건강식품의 효능을 과장해 최대 7배까지 가격을 비싸게 속여 팔았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사실은 사기를 당한 노인 분들이 경찰서를 찾아와 선처를 호소했다는 사실이다. 오갈 데 없는 자신들을 위해 귀중한 시간과 관심을 보여줬다며 ‘자식보다 낫다’고 경찰서에 탄원을 한 것이다. 한 할머니는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도 “아들과 딸도 우리에게 그렇게는 안 대해줍니다. 물건은 둘째 치고 너무 정성을 다해 섬겨주기 때문에 용돈 준다고 생각하고 물건을 사는 거예요. 마음에 위안이 생기는 것에 비하면 돈은 별 문제가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섬김/용서) ☞ 부모님을 모시는 자녀들이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이야기이다. 부모님들에겐 자녀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안부 인사 한번이 더욱 힘이 된다.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신 부모님의 사랑을 구차한 핑계로 외면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자, 효녀가 되어야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록펠러는 세계 최고의 부자로 미국의 부통령과 주지사, 그리고 유명한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세운 인물이다. 한 기자회견에서 일흔여섯의 록펠러에게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세계 최고의 부자로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록펠러는 기자에게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신앙의 유산을 받은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어머니의 첫 선물은 십일조 생활입니다. 어머니께 받은 신앙 유산은 십일조에 관한 교육이었습니다. 어머니는 20센트씩 받은 용돈에서도 반드시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쳐 주시고 실천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가장 적게 벌었을 때도, 상상도 못할 많은 돈을 벌었을 때도, 정직하게 십일조를 드렸고, 회사의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십일조 전담부서를 둘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두 번째 선물은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항상 누구보다도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제 손을 잡고 언제나 40분 정도 일찍 교회에 나와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때의 습관 때문에 항상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릴 때면 앞자리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세 번제 신앙유산은 교회를 다닐 때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록펠러는 98년을 살면서 자신이 번 돈으로 록펠러재단을 세워 많은 사회사업과 선한 일을 하는 것에 힘썼고 24개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헌납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어머니/교육) ☞ 어머니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돈을 남겨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해주며 올바른 자세를 가지게 하는 것이 최고의 유산이다. 최고의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어머니께로부터 이루어진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에서 최장의 길이를 자랑하는 미시시피강 상류에 한 철교를 가설하였는데 배가 지나가야 하므로 중간이 회전교(Turn dridge)로 되어 있다. 배가 통과할 때는 철교를 개문했다가 기차가 통과할 시간이 되면 또 다시 철교를 폐문하여 기차가 지나가게 한다. 어떤 날 그 철교를 조정하는 기사의 다섯 살 난 아들이 아버지가 일하는 곳을 구경한다고 나왔는데 얼마 후 작동시간이 되어 나가보니 아들이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깜짝 놀란 아버지가 마구 소리를 지르며 찾았는데, 아들은 그 회전교 끝에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차가 회전교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고, 이제 그 회전교를 닫을 시간은 30초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그 아버지가 다리를 닫지 않는다면 수백 명이 탄 기차가 강 속으로 곤두박질하여 많은 생명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 회전교를 닫으면 아들은 이음쇠에 끼어 몸이 산산조각 부서지면서 묵숨을 잃게 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아버지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심정은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많은 생명을 건지기 위해 회전교를 닫는 스위치를 눌러야 했다. 아들은 형체도 없이 으스러져 죽고 말았다. 모든 사람은 그를 위대하다고 했으나 그는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선택/희생) ☞ 그렇다. 하나님도 같은 선택을 하셨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강도나 살인자들이 당하는 그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 죽는 가장 아픈 죽음을 당하게 하셨다. 그때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 마음으로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강철 왕으로 유명한 미국의 실업가인 카네기의 어린 날은 매우 가난하고 불우했다. 그는 본래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사업의 부진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 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한 다음에도 그의 아버지는 책상보를 만들어 가지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였으나 생계는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그의 생활이 가난했던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카네기에게 내의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잠자리에 든 다음, 밤마다 아들의 내의를 빨아 말리느라고 추운 겨울에도 하루 평균 16시간 내지 18시간을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어머니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던 카네기는 너무도 마음이 아파 22세가 되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기어코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님에게 좋은 옷을 한 벌 사 드리고 집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많이 두어 어머님이 타실 마차도 사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약속을 하고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카네기는 뼈 저리는 분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카네기는 그가 어머니에게 서약한 대로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30년 동안을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가 52세가 되던 해 결혼하고 62세가 되던 해에야 첫 자식을 보았다.
(효도/약속) ☞ 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약속이었지만, 그 약속과 어머니를 향한 효도 때문에 카네기는 세계적인 강철 왕으로 대 부호가 될 수 있었다. 부모 공경이 자식을 복되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어 우리에게 꼭 지킬 말씀을 주셨다. 그 중 하나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고 부모에게 잘 하는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약속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는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그의 글 가운데 저주에 관한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가장 큰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아니며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저주가 있다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제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버림받은 심령이 바로 저주받은 심령이다. 두 번째, 아무리 성경을 읽고 요절을 외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으며 머릿속에 성경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의 사람이 쓴 지식적인 책이 아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와야 한다.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성령의 감동이 오지 않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 뜻이 들리지 않는다면 저주받은 사람이다. 세 번째,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원망과 불평만 하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노라.”(빌 1:3-4)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저주/불신) ☞ 날마다 원망하고 분하고 한이 맺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알고 보면 저주받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저주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저주받은 사람인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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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 <!--[endif]--> 일본의 한 청년이 남의 집 가게에서 일을 할 때 주인 몰래 돈을 훔쳤다. 그 때 그 젊은이의 나이가 17살이었다. 그 청년이 18세가 되던 해에는 주인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그녀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 지내는 도중 하루는 밤에 꿈을 꾸는데 환한 빛이 비취더니 천사가 그에게 와서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지금 내가 네게 보여 주는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행하여라.” 천사는 그에게 커다란 성경을 펼쳐 보여 주고는 곧 사라졌다. 며칠 후 그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그는 고민 끝에 감옥에서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는 밤낮으로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혼자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읽어주기까지 했다. 그 후 교도소 안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고오찌 요시다로오의 변화는 물론이요, 그와 동일하게 혹은 그 이상의 죄를 지은 죄인들이 하나 둘 변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은 모든 죄수들의 공동 소유물로써 그들로부터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물건이 되었다. 그리고 교도소 안을 변화시킨 장본인이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고오찌 요시다로오는 특사로 가출옥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변화/말씀) ☞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이루어지는지 우리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 성령님은 미리 예고하고 임하시지 않는다. 항상 성령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임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1907년 1월 6일부터 열렸던 평양 장대현교회의 저녁집회는 날이 갈수록 그 열기가 더해 갔다. 그러다 14일 저녁집회 때 능력의 종으로 말씀을 선포하던 길선주 장로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통회하는 일이 일어났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죽을 때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날 것 같으니 내 재산을 잘 정리해 주시오. 내 아내는 계산에 약하기 때문이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내가 잘 돌보아 드릴 테니 염려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다 나는 미화 100달러 상당의 금액을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 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미망인에게 가서 사죄하겠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길선주의 예기치 않은 고백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상한 심령을 주님께로 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길선주의 회개가 있은 후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임재해 주셨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회개/거듭남) ☞ 성령님의 임재하심은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다. 하지만 거짓을 모두 없애버리고 진심으로, 마음 깊숙이 우러나는 회개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회개가 있다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한 잡지에 '어 브라더스 기프트(A brother's gift)', '형제의 선물'이라고 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자신이 자기가 경험한 것을 그대로 적은 글이었다. 그녀는 전남편에게서 낳은 21살 된 아들 제임스가 있었다. 지금 재혼해서 사는 남편 사이에서 낳은 12살 된 러키라고 하는 딸이 있고, 또 그 뒤에 지금 4살 된 아이가 있었다. 이 4살 된 꼬마가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 4살짜리가 간에 악성 바이러스가 침투하여서 제 기능을 못하게 막아서 죽어가고 있었다. 12시간 내에 간을 이식 받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절박한 시간에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살아있는 간 기증자를 얻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간은 하나 밖에 없다. 하나뿐인 간을 그 절반을 잘라서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이식 받아야만 산다고 하는 말은 정말 힘든 일이며, 기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짧은 시간에 이러한 기증자를 구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초조하고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런데 전남편의 아들인 이복형제 제임스가 자기 동생을 위해서 간을 나누어주겠다고 나셨다. 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가 같았지만, 가능한지 우선 검사를 받아야 했다. 어느 정도 이식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보고 간이식 수술을 하는 시간동안 수술실 밖에서 어머니는 딸의 손목을 잡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하나님, 저 4살 난 꼬마를 살려주십시오! 또한 제임스도 건강하게 이식을 잘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잘못되면 아들 둘을 다 잃어버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자기 생명 같은 간을 동생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나선 제임스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전부 이기적이고 이 세상이 사악한데, 어떻게 자기의 친동생도 아닌 이복동생에게 간을 나누어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수술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면서 고맙기 그지없었다. 다행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두 아들은 건강이 회복 될 수 있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랑/나눔) ☞ 사랑은 주는 것이다. 가장 큰 줌은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도저히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다. 당신은 그런 사랑을 나눠본 경험이 있는가?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교향시의 창시자이자, 작곡가이며,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오늘날까지 명성이 높은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가 한 시골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극장에서 여류 피아니스트의 연주회가 있다고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얼마나 유명한 피아니스트면 이렇게 떠들썩할까 알아보니 그 연주자가 리스트의 제자라는 것이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내 제자라,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if !supportEmptyParas]--> <!--[endif]--> 리스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질 않았다. 리스트는 극장에 한번 들러볼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냥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이때 누군가가 리스트가 있는 방의 문을 조심히 두드렸다. 리스트가 문을 열자 한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빌려 연주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방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제가 선생님의 가짜 제자 노릇을 하여 명예를 얻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즉시 연주회를 중단하겠으니 일을 처리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인은 너무나도 죄송스러워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스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호텔 음악실로 데려가 피아노 앞에 앉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번 음악회에서 연주될 곡 중 아무것이나 쳐 보시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여인은 한동안 망설이더니 결심을 한 듯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연주를 했다. 곡을 다 듣고 난 리스트는 연주에 관한 여러 가지 소감을 들려주면서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자 이제 나는 당신에게 피아노 연주에 대해 지도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스승이 된 것이고, 당신은 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오늘밤 나의 제자로서 연주회를 열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최선을 다해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치도록 하십시오." 고개를 숙인 여인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그녀는 연주회를 무사히 잘 끝마칠 수 있었다.
(스승/제자) ☞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분명 위의 여인과 같이 거짓으로 제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 제자라고 해서 영원히 거짓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끌림에, 인도 하에 진짜 제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심은 금물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국 땅에서의 캐나다 선교의 시작은 선교사 맥켄지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신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선교부에 내놓으면서 한국에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캐나다 선교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맥켄지는 자비를 드려 독립선교사로 1893년 12월에 서울에 도착했다. 맥켄지는 한국말과 풍습을 빨리 배우기 위해서는 외국인 사회를 떠나 한국인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을 떠나 황해도 솔내로 옮겨가서 한국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살았다. 이런 맥켄지의 태도는 한국인들에게 큰 호감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때 언더우드는 맥켄지를 위하여 빵, 과일, 야채, 차, 의복, 음식 등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서 “내가 만일 이것들에 맛을 들이면 다시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맥켄지의 마지막 일기에 의하면 그는 8개월 동안 외국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영어 한마디 쓰지 않고 지냈다. 이런 생활이 맥켄지의 정신과 육체를 쇠약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1895년 6월 22일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땡볕 가운데 여행했고, 밤늦게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 설교한 것이 나의 실수였다.”
며칠 후 맥켄지는 소래교회의 신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은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왔으며, 죽으면 자신의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시체는 교회 옆에다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눠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젊고 유능한 선교사 한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맥켄지가 죽자 소래교회 신자들은 캐나다장로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해달라는 진정서를 보냈다. 이렇게 해서 캐나다장로교회는 한국에 정식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선교/사랑) ☞ 맥켄지의 방식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자살하는 것은 명백한 죄의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맥켄지가 한국을 사랑했고, 복음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했던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선교는 쉬운 것이 아니다. 선교는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힘들 수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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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 <!--[endif]--> 우리가 태양이라고 부르는 실재는 세 가지 모습이 있다. 태양은 우주 공간 속에 떠 있는 광원이 있다. 태양의 중심부는 매우 높은 고온이기 때문에 수소가 헬륨으로 변하는 열핵융합반응이 일어나며 이것이 태양의 에너지원이 된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저기에 태양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태양이 방출하는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기 때문다. 진정 태양 광선이 없다면 모든 색상 색도 조명도 밤과 낮도 다 없어져서 우리 지구에는 예술도 없고 문학도 없고 종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맹인들은 태양이 뜨고 짐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빛과 함께 태양에서 오는 열의 감지로서 알 수 있다. 광열이 없다면 광합성 작용은 일어날 수 없고 곡식과 과일도 열매 맺을 수 없다. 우리는 같은 태양이지만, 이렇게 광원, 광선 광열을 구별해서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셋은 다른 것이 아니라 태양의 세 가지 존재방식입니다. 광원 속에 이미 광선과 광열이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신비/비유) ☞ 햇빛이 비추는 곳에 이미 열이 있어 만물을 화육생성 시킨다. 광원을 성부하나님이라면 광원에서 나왔으되 빛으로서 태양이 저기 있음을 알려주는 광선은 성부를 계시하시는 성자하나님에 비유된다. 빛과 함께 광원에서 함께 나오되 열에너지로서 만물을 키우며 열매를 맺게 하는 광열은 성자하나님에게 비유 할 수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중국인이 인천에서 제법 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기쁨은 돈을 모으는 것이며, 유일하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돈인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게 한 귀퉁이에 거대한 금고를 설치해놓고 하루에 수십 번씩 돈을 바라보며 삶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 결혼, 친구 등은 관심 밖이었다. 그만큼 돈을 좋아해서인지 직원들에게는 쥐꼬리만큼의 급여와 적은 휴가, 야근 등을 시키면서 부려먹었다. 직원들은 그를 ‘자린고비 할배’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그런 그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돈을 보기 위해 금고에 들어갔다가 그만 밖에서 문이 잠기고 말았다. 금고에는 비상구멍이 뚫려 있어 공기 소통은 가능해 살아있을 수는 있었다. 메이슨은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긴 돈과 함께 금고에서 꼬박 이틀을 보냈다. 그는 금고 안에서 돈과 함께 삶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추위와 굶주림과 고독을 느꼈다. 그 상황에서 그에게 돈이 쌓인 금고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차라리 지옥이면 더 좋을 것이라고 느꼈다. 금고에 갇힌 지 사흘째 되던 날 출근한 직원에 의해 그는 구조됐다. 그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 “이제 비로소 돈의 올무에서 벗어났다. 나는 금고에서 삶의 진리를 깨달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증거/실력) ☞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존재만으로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시 위탁한 것이다. 왜 하나님보다 못한 돈에 삶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가? 그것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래리 도비는 미 프로야구 최초로 발탁된 흑인 선수이다. 그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팀에 들어가 출전하는 첫날(1949년)의 일이었다. 3만 명의 시선과 관심이 첫 흑인 선수인 그에게 쏟아졌다. 전국의 라디오 청취자들도 그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도비의 실력이 얼마나 탁월하기에 감히 흑인이 프로구단에 뽑혔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극도로 긴장한 탓인지 첫 타석에 선 도비는 어이없이 3진 아웃되고 말았다. 몹시 실망한 그는 자리에 돌아가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 다음의 이야기이다. 도비 다음으로 타석에 나간 선수는 구단 최고의 강타자 조 골든이었다. 그는 나가자마자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해 버렸다. 골든 선수는 도비와 똑같은 행동으로 힘없이 자리에 돌아와 두 손으로 머리를 껴안고 고개를 숙였다. 골든은 ‘나같이 경험 많은 강타자도 안 맞을 때가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나타낸 이다.
(공동체/동참) ☞ 우리는 한 배에 탔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 말은 ‘우리는 한 팀이다’는 말과 같다. 이겨도 함께 이기고 져도 함께 진다는 뜻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된 우리가 이렇게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가정교육에 있어서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식들이 나쁜 길로 가는 것 같으면 질책하고 꾸중하며 무서운 체벌을 가합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자신도 모르게 ‘저 사람이 정말 나의 아버지가 맞을까?’ 하고 의심한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호된 질책을 할 때면 어머니는 자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해 준다고 한다. “얘야, 네가 잘못할 때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픈 줄 알고 있니? 너를 때릴 때마다 아버지는 가슴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다. 절대로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며, 자신을 위해서 너를 때리는 것이 아니란다. 다만 한 가지, 네가 바른 길로 가는 것을 인도하기 위함이란다. 너는 항상 이것을 알아야 한다.” 보혜사란 말은 이처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의미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이토스’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하여 눈물 흘리고 있을 때 보혜사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 맞은 아들을 위로하는 어머니처럼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신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성령/위로) ☞ 인생이 광야처럼 삭막하고 힘들 때 아무도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고독한 순간에도 내 영혼을 안아주시는 위로의 보혜사 성령님의 손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의 위로의 힘으로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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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비유 몇 가지가 있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명백하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비유하는 대상이나 개념이 제각각 다르다. 비유가 잘못되면 잘못된 신학을 갖게 된다. 가장 흔한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한 사람'으로 비유한다. 한 사람이 아빠도 아들도 남편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아빠를 성부로, 성자를 아들로, 성령을 남편으로 설명한다. 한 사람이 세 가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동시에 사역하셨으며,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한 사람으로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다. 2. 나무에 비유한다.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뿌리는 성부 하나님, 줄기는 성자 예수, 가지는 성령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의 일부 즉, 나무의 뿌리나 줄기 혹은 가지가 아니라 성부도 나무 전체이고, 성자도 나무 전체이며, 성령도 나무 전체다. 삼위일체란 부분적으로 셋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이면서 셋이고, 완전한 셋이면서 하나다. 따라서 나무의 일부분을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3. 물에 비유한다. 물이 수증기와 얼음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 그릇 안에 물, 얼음, 수증기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비유된 하나님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하는 하나님이라는 설명이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니다. 각 위격이 완전한 한 분이시고, 또 동시에 나타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삼위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 4. 전기에 비유한다. 전기를 전구에 연결하면 빛이 나고, 전열기구에 연결하면 열이 나며, 동력에 연결하면 큰 힘이 나온다. 전혀 나타나는 모양이 다르지만 전기는 하나이니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중계자가 없다. 사역에서도 전기의 빛, 열, 동력의 구분처럼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한다. 5. 태양에 비유한다. 태양의 세 가지 요소, 즉 불덩어리와 빛과 열을 예로 든다. 태양이라는 불덩어리와 거기서 나오는 빛과 열이 있는데 불덩어리가 하나님이라면, 빛은 예수님이요, 열은 성령님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나 태양처럼 하나님은 물체가 아니다. 뿐만아니라 불덩어리를 태양이라 할 수 없으며, 빛을, 열을 각각 태양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똑같이 하나님이 되신다. 6. 세잎크로버에 비유한다. 한 줄기에 똑같은 잎이 셋이니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버의 세 잎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서로 다른 세 신적인 주체가 한 하나님을 이루시는 사귐을 표현한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사귐을 나누시는 분이다. 7. 정삼각형에 비유한다. 삼각형의 세 뿔이 하나의 삼각형을 이룬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러나 성부나 성자나 성령은 삼각형의 한쪽 뿔에 해당되는, 즉 삼각형의 일부가 아니고 삼각형 자체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모두 한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인격과 사역과 특성에서 서로 구별되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용어가 바로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비유) ☞ 세상적인 것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을 '양태론'이라고 한다. 주의할 것은 '양태론'이 이단 신학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위의 비유를 인용하고 있었고, 많은 성도들이 이런 비유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설명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고, 비유로 가르칠 수도 없다. 만일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실적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잘못된 설명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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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헨델의 일화이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한참동안 난처해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으로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습.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그 이발관에 다시 들렀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이발을 하러 온 한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치/무비) ☞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지만 그 말씀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셔야만 그 깊이 있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한 권의 책으로 볼 뿐이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임을 알지 못하게 마련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코끼리는 우둔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지혜는 가히 경이롭다. 코끼리는 더울 때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목욕을 하여 더위를 이겨낸다. 또는 침을 잔뜩 괴었다가 코로 들이마신 후, 몸에 뿌리는 식으로 더위를 피한다. 물론 이 방법은 근처에 개울이나 연못이 없을 때 쓰는 비상수단이다.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을 찾아서 몇 시간이고 꼼짝도 않고 서 있을 때도 있다. 코끼리의 지혜는 음식 섭취에서도 나타난다. 코끼리는 이빨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대나무를 즐겨 먹는다. 코끼리는 단단하고 질긴 통 대나무를 으깬 다음, 코로 말아 올려 먹기도 하고, 그냥 입으로 ‘우지직’ 씹어 먹기도 하면서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섭취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 지대의 코끼리는 죽은 동물의 뼈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칼슘을 보충하기도 한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300kg 정도의 먹이를 먹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찾아 섭취하는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동물/지식) ☞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도 무슨 음식을 섭취하는가와 직결된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편식에 길들여져 버린다. 어린아이가 밥상에서 편식을 하듯 말씀에 대한 편식을 하는 것이다. 코끼리는 달콤한 야자열매만 찾아다니지 않는다. 코끼리는 칼슘을 보충하기 위해 억센 대나무를 씹기도 하고, 죽은 동물의 뼈를 먹기도 한다. 당신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공자의 제자 중에 전자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자방은 위나라 태자의 스승이었는데, 하루는 길을 가다가 태자를 만났다. 아무리 스승이라도 당연히 땅에 엎드려 공손히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는 거만하게 태자를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태자가 전자방에게 물었다. “부하고 귀한 자가 남을 업신여기느냐? 가난하고 천한 자가 남을 업신여기느냐?” 이 말에 전자방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빈천자는 거만해도 얻는 것이 없지만 잃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귀한 자는 거만하여 얻는 것이 없고 잃는 것이 많으니, 거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을 듣고 태자는 스승이 자기를 교육하려는 의도임을 알고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하자, 전자방도 이에 공손히 답례했다. 그 후 태자는 위나라 무왕이 되어 좋은 임금이 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교만/겸손) ☞ 거만한 자는 잘못을 지적 받으면 잘못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적해 준 사람의 약점을 잡아 공격을 한다. 또한 악한 자는 자신의 잘못을 꾸짖는 사람의 흠을 찾아내어 보복한다. 이러므로 거만하고 마음이 악한 자를 책망하는 것은 곧 화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의 훈계와 교훈을 통해 인격을 다듬고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사관학교 2학년이었을 때 일이다. 사관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을 상급생들이 붙잡고 기합을 넣고 호통을 치며 군기를 잡곤 했다. 하루는 신입생 한 명이 뛰어가다가 아이젠하워를 들이받았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 상황이 잘됐다 생각하고 그를 세워놓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는 명예로운 사관생도라기보다는, 겨우 시시한 이발장이 같은 녀석이로구나!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자 그 신입생은 어깨를 탁 펴더니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네, 선배님! 저는 이발사였습니다. 저는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발사로서 가족들을 부양해 왔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설마 이발사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지금 남의 생계를 모욕하고 무시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자기 방에서 홀로 앉아 다시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언행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의 그 행동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을 깨닫게 하는 큰 교훈이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큰일을 담당할 때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직분을 수행할 때나 늘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교만/후회) ☞ 그렇다. 교만은 사망의 지름길이라고 한다. 교만에는 후회가 찾아오고 겸손에는 지도력이 따라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한 인기 가수가 대마초 사건에 걸려 구속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3개월가량 징역을 살았는데 거기서 어느 사형수로부터 전도를 받았다. 사형수의 진지한 전도에 감동을 받아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때 사형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곧 나가게 되겠지요.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못 다한 몫까지 합해서 해주시오” 그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인하여 감방에 들어와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형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악과 고통에서 건져내었다. 대마초에서 해방을 받았던 것이다. 출감한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왜 사형수가 판사보다 구원받기 쉬운지 아는가? 사형수는 자기에게 대해 절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감방 밖에 있을 때보다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쉬운지 아는가? 감방 안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절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믿음/변화) ☞ 그렇다. 우리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시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자신을 땅 바닥까지 낮추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을 붙들어야 한다. 그분만이 우리를 이 절망에서 건질 수 있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23전 23승으로 꺼져 가는 조선을 구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할 때도, 적선과 비교할 때 비교가 안 되는 수의 판옥선을 가지고 있을 때도, 동료 장군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도 간신배들의 모략에 의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될 때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죽음 직전에서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할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몰아내고 수군의 최고 지휘관이 된 원균이 일본에게 대패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임금이 나라가 위급하자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재임용할 때 그는 원망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으로 다시 시작했다.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133척의 왜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려 전쟁의 방향을 조선의 승리로 장식 했고, 전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승전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원망/충성) ☞ 어떤 경우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감동적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기를 원한신다는 것을 믿자.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남미의 어느 섬에서 사역했던 선교사가 있었다. 원주민들은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지켜오던 잘못된 종교를 신봉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삼 년이 지나도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었다. 어느 날 원주민 중에 착하다는 한 사람이 선교사를 찾아와서 그에게 충고했다. “당신의 고국으로 돌아가시오. 여기서 계속 있어봐야 허송세월을 보낼 뿐이오. 더 이상 소득도 없는 짓은 하지 마시오.” 그러나 이렇게 충고하는 원주민도 있는 반면, 과격한 원주민은 선교사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의 세간을 도적질하는 등 갖은 핍박을 다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선교사는 낙담하여 여기서는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허락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바로 이때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와 함께 여기 머물러 있으라.’ 선교사는 마음에 큰 감동과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고난당하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음성을 들었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은 낙심하고 있던 자신에게 큰 위로와 평안이 넘치는 말씀이었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이후, 이 섬은 일곱 개의 교회와 아홉 분의 목사님과 칠백 여명의 성도들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고난/선교) ☞ 고난이 없이는 축복도 없다. 고난당하는 자리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고난은 축복의 전주곡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