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여 유희강
서예사에서 검여의 역할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60-70년 대의 한국 서예의 현황을 알아야 한다.(이 방의 27-1960년 대의 한국 서예에 대강이나마 살펴보았습니다. 참고 하십시오.)
60년 대의 한국 서예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던 한국 서예가 출구를 찾으려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출구를 찾기는커녕 오히려 더 난맥상을 드러냈다. 국전이라는 왕국을 구축하고 문화권력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이때 검여 유희강의 활동은 하나의 신선한 바람이었지만, 이 역시 후대에 이어지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오늘의 현실을 짚어보기 위해서도 검여의 활동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검여는 1911년에 태어나서 1938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떠나 있었으므로 한국 서단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어릴 때는 가학으로 한학을 배웠고, 중국 유학시절에는 서양 문화를 맛 보았다. 유화도 손을 댔다. 중국의 금석학과 남화와 강유위의 진보 예술론까지 섭렵하였다. 특히 북비의 서예에 심취한 것은 강유위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는 원칙적으로 고법을 따르는 전통주의자이다. 북비의 서체가 가미된 그의 서예가 국전을 통하여 소개되자 한국 서예계는 충격을 받았다.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 일변도의 한국 서예에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 한국 서예의 폭이 더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검여가 한국 서예계에 미친 영향이다.
유희강이 서예가로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는 1960년 대와 1970년 대 초반이다. 귀국하여 인천에 정착한 검여는 7년 간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그가 중국에서 공부한 미술이 서예에 회화성을 가미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서예에 회화성 도입은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서예사에서는 높이 평가할 일이다.
국전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느 만큼 확보한 후에는 개인전을 열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작가가 개인전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평가받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한국 서단에서는 개인전이 낯설었다. 개인전보다는 국전을 통하여 이름을 알리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정작 작품의 평가는 소홀하였다. 검여는 이 개인전에서 큰 성공을 거두므로 서예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로 개인전이 증가한 것은 분명하다. 개인전은 경제적인 부담이 많다. 개인전이 많아진 것은 사회적 여건의 변화를 꼽을 수 있지만, 서예가들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평가를 받겠다는 의식이 싹튼 것도 틀림없다.(사실은 오늘까지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서예 비평가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평가는 어렵다.)
1960년 대에 개인전으로 성공을 거두고,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서예가가 검여 유희강이다. 특히 1964년에 열린 제 2회 개인전이 주목을 받았다. 임창순은 이렇게 평하였다.
“서풍이 북위의 웅강기초한 격이 보이므로 강유위 서론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한국 서예는 부드럽고, 온건한 남조의 서첩을 바탕으로 하였다. 유희강이 힘을 강조한 북비의 서체는 한국 서예계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서예계에서는 검여풍 서체라고 하였다.
유희강은 자신의 서체에 상형적인 형태, 즉 그림도 그려서 작품을 만들었다. 글씨와 그림의 조합이었다. 작품의 가운데에 바위의 형상을 그리고 여백에 행서를 쓴 ‘자제화백 自題畵百’을 1965년에 발표하였다. 1965년에 발표한 완당정게 阮堂靜偈는 또 하나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가운데 그림을 그리고, 어린아이 글씨처럼 치졸하기 짝이 없는 예서체로 쓴 작품이었다. 특이한 회화 구성과 교巧가 아닌 拙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1965년에 뇌졸중으로 오른손이 마비되자 왼손으로 글을 썼다. 이때의 글을 유희강의 좌수서(左手書)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예를 완숙한 기능으로 쓴 글만이 아니고 유치하고 치졸한 것도 美의 개념으로 수용하였음을 뜻한다.
이제 유희강의 작품 활동을 평가해 보자. 유희강은 서예에 회화를 도입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서예인이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서예에 회화만이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장르의 작품세계를 도입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탐구하고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지금의 서예인에게는 다른 장르의 예술을 받아들여서 혼합하고 복합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더 넓다.
유희강은 개인전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여주었고, 성공하였다. 흔히 말하기를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고 한다. 오늘의 서예인이 과연 작품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가? 문화권력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아양을 떨고, 아부성 발언을 쏟아내면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는지를 생각해 보자. 개인전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장치이다. 개인전을 하지 않는 서예인은 존재가치가 없다. 개인전을 가지더라도 자신만의 작품세계가 아닌 작품으로 전시회를 가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개인전을 하는 작가더러 오히려 입을 비쭉거리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하였다. 이유야 있겠지만 이건 아니지 않는가?
수많은 예술인이 당대에는 천시를 받은 일이 비일비재하다. 왜냐면 당대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주류에서 밀려나서 조명도 받지 못하고 사라졌던 예술인들이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예술사를 장식한다는 사실은 예술계에서는 너무나 명백하다. 유희강은 국전이라는 거대한 왕국에서 소외된 아웃 사이더이고 타자였다. 이제는 우리가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국전이라는 철옹성 같은 왕국에서 작품보다는 정치적으로, 인맥으로 득세를 하는 한국 서예에 미래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사에서 하나의 금자탑을 이루며 조명을 받고 있는 영국의 화가 ‘터너’를 미술사가 러스킨은 이렇게 소개하였다.
“어렸을 때는 가난하게 살았고, 청년 때는 마음을 나눌 벗도 사귈 수 없었으며, 장년 때는 기억에 남는 사랑을 해보지도 못하였다. 늙어서는 희망도 없이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터너는 자신만의 세계가 담긴 그림을 남겼다. 미술인이라면 모두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