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통찰
능엄경에서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을 구별하신 부처님의 본회(本懷)는 능히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할 줄 아는 영지(靈知)가 바로 진심(眞心)이라는 사실을 밝혀주시려는 데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진심(眞心)이 영지(靈知)한다는 것이 아니요, 영지(靈知)가 바로 진심(眞心) 자체라는 말에 주목하여야 한다.
공적(空寂)한 영지, 그것이 바로 진짜 나의 마음이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주체(主體)인 그 놈이 마음이라고 말하나니, 알지(知)라는 글자를 빌려서 마음을 설명하고 이름하는 것이지만, 보고 앎을 듣고, 앎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하나니, 따로 아는 주체(主體)가 없다.
즉 진심(眞心)이니, 법신(法身)이니, 자성(性)이니, 진여(眞如)라고 이름 붙일 놈이 따로 없다. 이 고개가 넘기 어려운 고개이다. 다른 종교(宗敎)나 세상의 철학(哲學)들이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못 보듯이, 견성(見性)이 견성(見性)을 못 본다. 그러면 어떻게 견성(見性)을 친성(親省)하고 확인(確認)할 수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내 주위에 두루한 시각(視覺) 현상(現像)을 볼 줄 아는 것이 내 견성(見性)이고, 나아가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이 두루한 사실(事實)을 알아차리는 그 놈이 바로 나의 영지(靈知)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제 마음의 현량(現量)인 줄 알아차리는 그 놈이 바로 자기 자신의 영지(靈知)이고, 그 영지(靈知)가 바로 견성(見性)이요, 문성(聞性)이다. 이것이야 말로 영지(靈知)인 견성(見性)의 실존(實存)을 친성(親省)하는 유일(唯一)한 방법이다.
경(經)에서 말하기를 너희들 성문(聲聞)들은 용렬(庸劣)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淸淨)한 실상(實相)을 능히 통달(通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나니, 마땅히 잘 사유하여 묘(妙)한 보리(菩提)를 공부하는 길에서 피곤(疲困)하다고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는 도다.
汝等聲聞 狹劣無識 不能通達 清淨實相 吾今誨汝 當善思惟 無得疲怠 妙菩提路
-- 황장원 능엄경 해설서에서 발췌 --
세계의 눈
의식에서 의지가 소멸 됨에 연유(緣由)하여 개인의 개성은 물론 이에 따르는 괴로움도 재앙도 모두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남아 있는 인식(認識)의 순수한 주관을 영원의 세계의 눈이라고 기술하였다.
세계의 눈은 분명히 그 밝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생명체(生命體)의 발생이나 소멸에 전혀 관계가 없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바라보고 있다. 이리하여 세계의 눈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언제나 변하지 않고 지속(持續)되는 이념의 세계를 지향해 가고 있다. 즉, 의지의 타당한 객체화(客體化)이다.
이와는 다른 관점으로 각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한 개성에 의해 인식이 흐려진 개체의 주관은 단지 개개의 사물을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며, 개개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한 의미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중(二重)의 존재방식을 부여할 수 있다. 의지로서, 다시 말해 개체로서는 누구나 단순한 1인이니, 이 한 사람은 자기의 스스로의 주관자나 객관자로서 일하고 고민하기에 분주하다.
그런데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표상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은 순수한 인식의 주관이 되어 이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후자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게 될 때, 이 사람은 자기가 보는 한도 내의 모든 사물 자체이며, 이 사람 안에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사물은 이 사람의 표상 속에 존재하는 한 이 사람의 존재 자체이다.
그러나 그 때 의지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사물이 의지인 경우에는 사물은 이 사람 속에는 없다. 누구나 그 사람이 모든 사물과 동일(同一)한 상태에 있을 때는 축복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개라는 한 사람의 인간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불행하다.
인간이나 인생사나 삶의 상태가 흥미있고, 사랑스럽고 부러워할 만한 것으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펜의 힘이건 말의 힘이건, 이것을 오직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기술하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 속에 몰입해 버리면 대상 자체가 된다.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되면 악마도 도사리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삶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것도 형상 속에서는 기꺼이 즐길 수 있나니"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
위의 문장 중에서 각각 다음의 구절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며 음미해 본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진심(眞心)이 영지(靈知)한다가 아니고, 영지(靈知)가 바로 진심(眞心)이라는 말이다. 공적(空寂)한 영지(靈知)! 그것이 바로 진짜의 내 마음이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아는 주체(主體)인 그 놈이 마음이라고 말하면, 알지(知)라는 글자를 빌려서 마음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보고 듣고 앎 그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말하니 따로 아는 주체(主體)가 없다.
세계의 눈은 분명히 그 밝기에 여러 가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생명체(生命體)의 발생이나 소멸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이리하여 세계의 눈은 자기 자신과 동일(同一)하다.
혜담 오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