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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학
영화가 개봉된 당시에는 물론, 후일 1970년대에 비평가 폴린 케일이 이 작품의 완성은 허먼 맨키위츠가 이루어 낸 것이며, 웰즈는 단지 거기에다 약간의 광채를 더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했을 때도 상당한 논란을 야기시켰 습니다. 맨키위츠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작가로서 악명 높은 술꾼이었으며, 매력과 재치가 있었는가 하면, 동시에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맨키위츠가 시나리오 원한 '미국인'을 들고 웰즈에게 찾아왔을 때, 웰즈는 자신의 대본 파트너였던 존 하우스먼으로 하여금 맨키위츠를 도와, 그가 할리우드의 온갖 유혹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한적한 장소에서 대본 집필을 끝낼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웰즈는 맨키위츠의 초안을 광범위하게 고쳤고 그 수정이 워낙 심했던 탓에 맨키위츠는 영화가 자신의 시나리오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 졌다는 이유로 영화에 혹평을 퍼부으며 웰즈의 이름이 각본자로 크레디트에 실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작가 조합에 진정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에 50% 이상의 기여를 하지 않는 이상 각본자로서 크레디트에 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작가 조합은 일종의 타협안으로서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각본자 크레디트에 싣되, 맨키위츠를 윗자리에 두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1970년대에 다시 재연되었을 때 미국의 영화학자 로버트 캐린저가 이 문제에 결말을 지었는데 그는 7개의 주요한 초안과 최종본에 나타난 짤막한 수정 메모와 기타 자료 정밀하게 분석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맨키위츠의 초고는 결국 내버리거나 완전히 바꿔 주지 않으면 안 될 지루하고 우둔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영화가 지닌 최고의 장점인 형식상의 재치와 유연성은 초고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약해서 말하자면, 맨키위츠는 기본 재료를 제공했고, 웰즈는 거기에 천재적 영감을 불어넣었던 것입니다. 각본은 경악을 불러일으킬 만큼 현란했고 등장 인물은 그 당시에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인물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만 대처만이 전통적인 인물로서 1930년대 재벌의 변형된 모습으로 그려 졌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웰즈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시민 케인에도 우리는 '권력자의 몰락'이라는 부제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고전 비극이나 서사시에 연관된 전통적인 주제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권력과 부를 쥔 자들은 부패해 가고, 그 부패가 그들 스스로를 잠식해 가는 것이고 순수한 사람들은 대게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도 깊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웰즈는 "내가 연기한 인물들은 모두 다 파우스트의 변형이었다"고 했으며 그들은 모두 자기의 영혼을 팔고, 잃어버리는 인물들 입니다. 악에 대한 웰즈의 생각은 원숙하고 복합적인 것으로서 거의 관습에 따르지 않는 것이었고 그와 동세대의 미국 감독 중에 웰즈만큼, 단순화한 심리학이나 상투적 도덕주의를 도외시한 채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한 감독은 보기 드물엇습니다. 그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운명론적인 것이었으나, 그래도 거기에는 애매모호함과 이중성 그리고 찰나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웰즈는 스스로 도덕 주의라 자처하긴 했지만, 그의 영화는 결코 엄숙 주의나 경건주의에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손쉽게 비난을 퍼붓는 대신에 시민 케인은 잃어버린 순수에 대해 탄식을 토합니다. 웰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심각한 이야기들은 그 안에 죽음을 담고 있는 실패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또 패배보다 더 깊은 상실의 이야기, 즉 실락원이 있다. 나는 서구 문화의 중심 주제는 바로 실락원이라고 생각한다." 한 스토리가 시간 순에 따라 일직선상으로 전개되지 않을 경우, 그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과 얻는 것이 모두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 잃어버리는 것은 전통적인 설화에서 볼 수 있는 긴장감, 즉 '주인공은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해 주인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야기되는 긴장감 입니다. 시민 케인에서 주인공은 시작 부분에 이미 죽어 있습니다. 관객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으로부터 그의 일생을 하나씩 꿰어 맞추어야 하는데 이처럼 복수의 내레이션을 사용하는 기법은 관객이 각각의 내레이터가 지닌 편견과 선입견을 평가하게끔 만듭니다. 시민 케인은 그 각각의 내레이터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 속에는 각각 다른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다섯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사건들이 서로 오버랩 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르랜드가 수잔의 오페라 데뷔를 평가할 때 그 평가는 수잔에 대한 르랜드의 경멸적 태도를 함께 나타냅니다. 수잔의 공연 장면은 기본적으로 객석, 즉 르랜드가 앉아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전개되는데 수잔이 동일한 사건을 이야기할 때, 카메라는 기본적으로 무대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시퀸스의 톤은 더 이상 희극적이지 않고 고통스럽게 그려 집니다. 웰즈의 내러티브 전략은 일종의 프리즘과 같은 것입니다. 뉴스릴과 다섯 명의 인터뷰 대상자는 제각기 하나의 동일 인물에 대한 독립된 관점을 보여 줍니다. 뉴스릴을 통해서 우리는 케인의 공적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들을 빠르게 훑어볼 수 있습니다. 대처의 설명은 부유한 자와 권력자에 대한 그의 확고한 도덕적 우월감에 의해 왜곡되어 있습니다. 번스타인의 이야기는 젊은 시절 그가 케인에게 느꼈던 감사와 충성심으로 인해 편향성을 띠고 있습니다. 르랜드가 제시하는 것은 보다 더 엄격한 관점입니다. 그는 케인을 평가할 때 케인이 말한 것보다는 케인이 실제로 행한 일을 기준으로 삼는데 수잔은 화자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누구보다 동정심이 많고 민감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레이먼드는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 이상으로 많은 사실을 아는 체 합니다. 그의 짧은 회상은 단지 톰슨 형사의 수사를 종결시켜 줄 뿐입니다. 영화 속에는 문자 그대로 수십 개에 달하는 상징적 모티프가 존재 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영화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로우 카메라 앵글처럼 기술적인 것들이며 그 밖의 것들은 보다 내용 지향적인 것들로서, 관객이 케인을 볼 수 있기까지 카메라가 뚫고 지나가야 하는 일련의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또한 정적이나 쇠퇴, 노년, 죽음 등과 같은 지속적 모티프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모티프는 바로 로즈버드와 분절 모티프입니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이었음이 밝혀 집니다. 영화 학자 등과 비평가들은 수십 년 동안 로즈버드에 관한 논쟁을 벌여 왔으며 웰즈 자신은 이에 대해 '프로이드의 치부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순수한 어린 시절에 대한 편리한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1940년대 미국 영화계에는 프로이드의 사상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사춘기 이전의 삶이 그 후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심 요인이라는 사상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로즈버드는 상실에 관한 더 일반화된 상징이기도 합니다. 케인이 유년 시절 부모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케인을 양육한 것은 은행이고 그는 신문인으로서의 젊은 이상을 상실했습니다. 주지사가 될 기회를 놓쳐 버렸고 첫 아내와 아들을 잃었습니다. 수잔을 오페라 스타로 만들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수잔을 잃었습니다. 로즈버드는 그것이 단순한 물건 이상의 것이고, 또한 에덴 동산의 순수성을 넘어서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것이 관객에게 밝혀 질 때 아주 강력한 정서적 충격을 가져 옵니다. 분절 모티프는 어떤 한 단어가 복합적인 인격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생각을 깨뜨리는 작용을 합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다양성과 반복, 더 큰 전체의 분절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모티프의 예로는 그림 맞추기 놀이와 마구 뒤섞인 궤짝들과 상자, 공예품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영화의 구조 자체가 분절되어 있으며 각각의 내레이터는 저마다 단지 단편적인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할 뿐입니다. 위의 사진은 영화 후반부의 레이먼드의 회상 장면인데 늙은 케인은 유리 구슬을 찾아내곤 "로즈버드"라고 중얼거리는데 얼이 빠진 상태로 유리 구슬을 움켜쥔 채 복도를 걸어갑니다. 케인이 죽 늘어선 거울 앞을 지나라 때, 우리는 무한대로 중첩된 케인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미지 모두가 케인인 것입니다. |
10. 이론 시민 케인은 형식주의의 걸작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사실주의적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뉴스릴 시퀸스나 딥포커스 촬영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앙드레 바쟁 같은 사실주의 비평가도 이 영화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들은 역시 화려한 기교로 이루어진 시퀸스들 입니다. 웰즈는 영화사상 위대한 서정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보여 주는 현란한 스타일은 장식적인 화면, 어지럽게 움직이는 쇼트들, 고도로 질감을 느끼게 하는 음향, 변화무쌍한 편집 스타일, 고도로 분절화된 내러티브, 그리고 마구 뒤섞인 상징적 모티프 등에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이 영화에 광채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대담한 기법들입니다. 시민 케인이 작가의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웰즈는 이 영화의 제작자였으며, 또한 대본의 공동 집필자였고, 배우와 스텝을 직접 선택했고,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영화 전체의 제작을 감독했습니다. 이 영화는 웰즈 특유의 주제인 복합적 성격에 탐구를 그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종의 작가의 자기 반영이랄 수도 있는 눈부신 스타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도 역시 전형적인 작가주의 영화에 속합니다. 웰즈는 언제나 자신의 동료들, 특히 배우들과 촬영 팀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전적으로 사령관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민 케인에 얽힌 흥행의 역사와 비평사는 그 자체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머큐리 극단이 파산한 직후 RKO 영화사는 24세의 웰즈에게 전대미문의 계약 조건을 제시했고 영화 한편당 15만 달러와 총 입장 수입의 25%를 보장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어떤 영화든 제작자, 감독, 각본, 혹은 주연을 맡을 수 있었으며, 자신이 원할 경우에는 이들 네 가지 역할을 모두 맡을 수도 있었습니다. 스튜디오의 책임자였던 조지 쉐퍼만이 행할 수 있었던 미술 통제권도 전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RKO사는 그 짧은 역사 내내 그래 왔듯이 재정적인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RKO 스튜디오는 1928년 은행가 조셉 케네디와, RCA 사와 NBC 방송의 사장이었던 데이비드 사르노프가 설립하였다. 사르노프는 이 스튜디오가 '영화판 NBC'가 되어 주기를 희망했습니다. 케네디는 약 500만 달러의 이익을 얻고는 곧 손을 뗐습니다. 희망찬 출발을 한 뒤 RKO는 곧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데, 이는 주로 계속된 경영진의 교체와 이로 인한 일관성 있는 정책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과 달리 RKO에는 지속적인 일관성이나 독특한 스타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르노프와 그의 새 동업자 넬슨 록펠러는 RKO가 세련되고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어 내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예술적인 가치와 흥행적 성공은 쉽게 일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쉐퍼가 웰즈를 고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들고 왔을 때 사르노프와 록펠러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흥행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고급 영화를 제작하는 데는 이 젊은 천재, 브로드웨이와 라디오에서 이미 대성공을 거둔 바 있는 웰즈야말로 적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9년 웰즈가 할리우드에 올 당시, 분위기는 대단히 험악했고 대부분의 감독은 나이 서른 다섯 이전에 'A급 영화'의 연출을 맡을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여기는 판국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인이며 풋내기인 웰즈는 첫 작품에서부터 완벽한 자율권을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이건 어린애가 가져 본 제일 큰 전기 기차 같구먼." 웰즈가 RKO의 제작 시설을 둘러보고 던진 비아냥거림 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한 웰즈에 대해 대부분의 영화 관계자는 예술가인 척하고 시건방지며 오만한 녀석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웰즈는 영화계를 공개적으로 비웃음으로써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웰즈는 "할리우드는 골펀 정원사, 평범한 사내들, 자아 도취에 빠진 스타 지망생들에게나 어울리는 황금의 도시" 라는 식으로 할리우드를 조롱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웰즈는 제멋대로인 젊은 수재였고 젊은 혈기에 멋대로 내뱉은 경솔한 농담 탓에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시작부터 시민 케인의 제작에는 불꽃 튀는 반대가 터져 나왔는데 홍보에 관한 한 전문가였던 웰즈는 영화계 전체가 공론으로 웅성거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촬영은 '철저하게 비밀 속에' 이루어졌는데 주인공이 어떤 인물과 비슷하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허스트 신문 그룹의 가십 칼럼니스트 라웰라 파슨스의 귀에 이 영화가 그룹 회장의 사생활을 다룬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어가자 그는 허스트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 영화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의 제작이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허스트의 캠페인도 치열해 졌습니다. 영화 개봉 전에 필름을 파기 하지 않으면 차례로 스캔들과 비리를 폭로하겠노라고 영화사를 협박했습니다. 허스트의 심복이며 영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MGM의 루이스 메이어는 RKO에 만약 네가 필름을 파기한다면 제작 비용과 약간의 이익금을 합쳐 배상하겠노라고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허스트는 다른 스튜디오 산하의 극장에 영화를 걸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자신의 신문들을 통해 웰즈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으며, 징병 기피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RKO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웰즈는 이에 대해 영화가 개봉되지 않으면 법원에 제소하겠노라고 위협했고, 결국 RKO는 모험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민 케인은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보슬리 크라우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의 하나"라고 이 영화를 평가했습니다. 수많은 걸작이 쏟아져 나왔던 1941년의 뉴욕 비평가협회상에서 이 영화는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에서는 아홉 개 부분에 걸쳐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웰즈는 야유를 받아야 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직 각본 부분에서만 오스카상을 받았다는 것이고 폴린 케일은 이에 대해, 할리우드 정통파인 맨키위츠를 지원하고 남우주연상, 감독상, 최우수 작품상에서 탈락한 웰즈를 일종의 벼락 부자로 깍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시민 케인은 흥행 면에서 참패를 기록했으며 이로써 웰즈의 할리우드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걸작인 위대한 엠버슨가는 비밀 시사회에서 관객의 호흥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고, RKO는 131분짜리 영화를 88분으로 줄여 버리는 대신, 엉뚱한 해피엔딩을 추가시켰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바로 이어 RKO는 경영진을 교체했고, 웰즈와 쉐퍼는 회사에서 밀려났습니다. 웰즈에 대한 비평가들의 애정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그러했습니다. 1950년대초부터 거의 대본에서 발췌된 내용이 "영상과 음향" 이나 "오늘의 영화" 같은 잡지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누벨 바그를 주도한 "카이에 뒤 시네마"지의 비평가에게 웰즈는 영감의 원천으로서 거의 우상 같은 존재였습니다. 장 뤽 고다르는 "우리 모두는 웰즈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트뤼포는 영화를 시작하는 수많은 프랑스 감독에게 시민 케인이 자각이 되었으며, 자신의 영화 미국의 밤에 이 유명한 영화에 대한 찬사를 포함 시켰습니다. 웰즈에 대한 비평적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고 웰즈가 사망한 1985년에는 그에 관한 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영국의 고급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비평가를 대상으로 10년마다 실시하는 국제 설문 조사에서 시민 케인은 언제나 베스트10의 첫머리를 차지해 왔습니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을 뽑는 투표에서도 언제나 가장 많은 표를 얻고 있는 감독도 오손 웰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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