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우리은행이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프로젝트 주사업자로 삼성SDS를 선정, 발표하던 날 SDS의 협력업체인 K회사 상무실에는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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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억 원이 훨씬 넘는 프로젝트를 85억여 원에 수주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K회사의 상무는 “그 가격으로 어떻게 먹고살란 말이야”면서 책상을 뒤집어엎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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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은 1백30억 원 규모인 BPR프로젝트의 SI사업자를 선정하면서 막판에 최저가낙찰 방식을 택했다. 한국IBM, 삼성SDS, SK C&C, 한국HP, 현대정보기술, 컴팩코리아, LG CNS 등을 대상으로 제안설명회를 개최한 이후 기술평가를 통해 최종 후보 4개 업체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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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업자로 선정된 삼성SDS는 85억9천만 원을 써내 한동안 덤핑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삼성SDS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던 한 협력사는 낮은 가격에 반발해 프로젝트 참여를 포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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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여신 등 5백여 개 영업점의 후선업무를 집중관리센터에 모아서 처리하는 우리은행 BPR 프로젝트에는 EDMS(이미지처리시스템), 워크플로우 처리 솔루션, 스캐너, 통신장비, PC 서버 등 하드웨어 기기 구입비용을 포함해 당초 약 2백억 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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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측에서는 시스템 구축일정이 급한데다 이미 다른 금융기관에서 EDMS 엔진을 도입해 그 성능이 충분히 검증돼 BMT(성능공개테스트)가 불필요했다고 설명했지만 관련 업체들은 하루 1백40만 건 이상의 후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EDMS관련 장비를 성능보다 가격에 맞춰 도입하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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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銀, 독점적 수요자 지위 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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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은행들이 덩치를 앞세워 IT 프로젝트 비용을 무리하게 낮추면서 관련 업체들 시름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업계에는 “금융IT 사업하면 라면을 겨우 먹고산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공공 및 민간기업의 수요가 줄어든 지금 한해 몇 천억원대의 IT예산을 책정하고 꾸준히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은행들은 IT업체들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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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에서 은행들의 프로젝트 가격 낮추기는 업체간 저가경쟁을 유발하고 서비스나 품질 개선에 힘쓸 여력을 뺏긴 국내 IT업체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합병 등으로 금융기관이 대형화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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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체간 저가경쟁 유발의 핵은 통합 국민은행. 올해 4천9백억원의 IT예산을 책정한 국민은행은 국내 은행권에서도 독점적 수요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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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국민은행이 주전산시스템과 업무별 단위시스템을 옛 주택은행 것으로 통일하자 IT업계 판도가 옛 주택은행에 시스템을 공급했던 업체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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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국민은행은 프랑스계 컨설팅 업체 CVA로부터 구매절차 개선에 관한 컨설팅을 받으면서 ‘반드시 경쟁입찰을 붙이고 대량구매를 통해 가격을 할인한다’ 등의 구매 원칙을 세워놓고 독점적 수요자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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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가 ATM 도입 건이다. 얼마전 국민은행은 ATM기(현금자동화기기) 2천7백40대(1차 50대, 2차 3백50대, 3차 2천3백30대)를 구매하면서 최저가낙찰제로 효성과 청호컴넷을 공급업체로 선정했다. 국민은행의 ATM기 도입 프로젝트는 1천억원대로 단일 건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당시 관련업체들은 ‘목숨걸고’ 수주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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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은 경쟁입찰을 실시하면서 예전처럼 입찰제안서를 한번만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납품가격을 내릴 때까지 계속 수정안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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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효성은 2차 입찰(3백50대) 당시 1대당 평균 2천8백∼3천만원인 ATM기의 가격을 2천1백50만원대로 파격적으로 낮춰 제시했다. 이때부터 저가경쟁이 벌어져 3차 입찰에서는 LGCNS가 효성보다 낮은 2천1백만원을 제시했고 청호컴넷도 결국 정상적인 가격을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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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 근무제’실시 등으로 무인점포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에 ATM기의 기능이나 유지보수 효율성에 초점이 맞춰져야 함에도 ‘최저가입찰’로 업체를 선정한 것은 국내 최대 소매금융 은행답지 못한 처사였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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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민은행과 비슷한 가격에 ATM기를 공급해 달라는 은행들의 요구가 이어지면서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해진 시장에서 ATM업체들은 품질 개선이나 신제품 개발에 투자할 자본을 확보하기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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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8월 초, 조흥은행은 ATM과 CD기 1천3백대를 구입하면서 공급업체에 2백억원에 못 미치는 가격을 지불하는 국민은행의 덕을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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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동화기기 업체 관계자는 “주5일제 시행 이후 자동화기기 업체가 수혜를 입었다고들 하지만 국민은행 ATM 도입 건 이후 오히려 사정은 이전보다 나빠졌다”며 “ATM기에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고 디자인을 개선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었으나 일단 저가 경쟁 구도가 자리잡는 바람에 이에 투자할 자본이 빠듯해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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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월드 베스트를 지향하는 국내 최대 은행이라면 IT업계와 금융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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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은 EMC로부터 5백억원 물량의 스토리지를 구입하면서도 대외적으로 입찰 과정이나 구입 금액을 정확히 밝히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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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은 지난 5월, 2백억원 규모의 신공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8월 4일 삼성SDS와 컴팩코리아 2개사를 대상으로 ‘시스템개발 및 SI부문’에 대한 최저가입찰을 실시, 69억원을 써낸 컴팩코리아를 최종 사업자로 선정했다. 2위인 삼성SDS는 최종입찰가로 약 1백10억원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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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금융권과 IT업계 최대의 관심사항은 기업은행 차세대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한국IBM이 입찰제안서에 솔루션 개발 및 패키지 비용으로 4백80억원을 써냈으나 기업은행은 이를 2백50억원까지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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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계에서는 기업은행이 요구하는대로라면 시스플렉스 시스템을 구현하는데만 80억원이 들어가고 관련 인력의 비용도 높기 때문에 한국IBM이 가격을 맞춰주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반면 은행권에서는 메인프레임의 퇴조로 국내 금융권에서 수세에 몰린 한국IBM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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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은행의 승리. 한국IBM은 고민 끝에 코어뱅킹 솔루션으로 제안한 ‘글로버스’의 가격을 60% 이상 낮추고 개발 인력 투입 비용을 조정해 입찰가격을 2백50억원까지 끌어내렸다. 원래 한국IBM이 제안한 가격 중에서 개발 비용을 제외한 글로버스 패키지의 가격은 약 2백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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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銀 횡포에 IT업계 주름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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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 대형 SI업체 관계자는 “IBM이 IT업체의 자존심을 지켜주길 바랐는데 실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저가 선호 관행은 IT업체 뿐만 아니라 은행에게도 손해다. 프로젝트의 품질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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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체들이 은행이 원하는 가격을 맞추려면 개발인력과 하드웨어 비용을 줄이는 수 밖에 없는데 인력의 질이 떨어지면 시스템은 자연히 부실해진다. 맞춤복을 제대로 입으려면 실력있는 재단사를 채용해야 하는데 가격을 턱없이 깎으면 바느질이 변변치 않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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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가낙찰 방식을 통해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부실공사의 위험을 막기 위해 은행이 외부 감리제도라도 도입해야 하지만 이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한 IT업체 관계자는 “IMF 이후 은행 수익이 좋아진 지금 최저가낙찰 방식을 고집하면 도리에도 맞지 않을 뿐 더러 은행 전략에 부합하는 시스템을 만들기에도 부적합하다”라고 말하고 “IT업체도 은행의 고객이기 때문에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며 은행들의 이기적인 구매행태를 은근히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