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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일 스크랩 존 라일, 거듭났는가
강대식 추천 1 조회 192 13.11.02 20: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존 라일 거듭났는가.hwp

 

존 C. 라일, 거듭났는가

 

편집자-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당신은 교회에서 무엇을 구하고 얻었는가? 이제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격과 삶의 변화 대신 다른 대체물에서 위로 받으며 자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각종 동호회처럼 인간관계를 통해 누리는 혜택 때문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교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 자기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 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1.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 거듭남이란 참 믿음을 갖는 순간 인간의 마음과 본성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름과 형식만 갖춘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넓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머무르는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의 변화가 모든 차이를 빚어낸다.

- 성경은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강조한다.

(겔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요3:3,6)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모두 표현만 다를 뿐 모두 마음과 본성의 변화를 가리킨다. 속사람이 철저하고 획기적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는 경험”을 뜻한다.

- 거듭남은 외형이나 육체의 변화가 아닌 속사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는 것이 아닌 내면의 성향과 본성이 전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의지와 취향은 물론 세상과 성경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거듭남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며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마음이 변화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선포되거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 인간은 스스로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거듭남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속한다. 특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에 따라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일2: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3:6)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집례할 수 있지만 성령이 성례에 개입하셔서 축복하지 않으시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수 있다.

- 거듭남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서 필연적으로 비롯하는 결과이며 내적 거룩함(성화)의 근간이자 시초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에 관한 나의 정의가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듭남을 마음의 변화가 아닌 단지 교회의 일원이 되어 신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인정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 돌이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지만 참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그 이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 밖에 어떤 사람들은 중생과 거듭남, 또는 거듭남과 회심을 구분하기도 한다. 성경 어디에도 거듭남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은 없다.

교회의 일원으로서 누리는 신자의 특권과 거듭남은 서로 엄연히 구별된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경험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알 수 있다. 거듭남은 참 그리스도인의 징표이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자아와 세상으로 향하는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2. 왜 거듭나야 하는가

 

(요3: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 우리의 본성이 죄로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악을 추구한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 영혼의 친구를 배척한다. 우리는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죄를 사랑한다.

우리는 온갖 죄를 씻고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의 성향과 의도와 습관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 죄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우리 내면을 지배하는 무질서와 혼란이 제거되어야 한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때는 항상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첫째 칭의로 주님은 죄인의 죄를 보혈로 깨끗이 씻으시고 값없이 용서해 주신다.

둘째 거듭남이다. 주님은 죄인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칭의와 중생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원의 필수 요소이다. 죄사함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권리나 자격이 없고 거듭남으로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성령 천국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곳의 삶을 누릴 수 없다. 칭의와 중생은 서로 분리되거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은 모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다. 거듭남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죄사함과 거듭남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영원한 운명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인생은 짧고 삶은 불확실하며 곧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텐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 성경은 거룩한 삶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엄격한 삶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늘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서 그들은 죄를 해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착하게 살아도 손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진리의 말씀을 듣고 산다. 하지만 임종을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그런 일들을 전혀 접해 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는 경험을 통해 아는 복음의 진리가 하나도 없으며 소망에 관한 이유조차 제시하지 못한다.

-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본래 영적인 일에 둔감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눈이 감긴 상태이고 영혼의 귀가 먼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와도 그것을 들을 수 없다. 사람들은 마치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잠에 곯아 떨어진 여행자와 같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식하지 못한다.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주어도 영혼의 굶주림이나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 위대한 의원이신 주님께 구하라는 권고를 들어도 영혼이 병들었다는 시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지푸라기를 왕관이라, 돌맹이를 다이아몬드라 부르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만큼 슬픈 일은 없으며 죽은 영혼을 해부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그들은 영적 무감각증에 걸려 있다.

-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각자 심판을 받고 천국과 지옥 둘 증 한 곳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 가운데 천국의 삶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각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해 보라. 그들은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어느 때에 적극성을 드러내는가? 그들이 어떻게 주일을 보내는지 그 방식을 유심히 지켜 보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에 기쁨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녀노소, 빈자와 부자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세속적인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천국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미약하고 인간의 머리로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천국이 거룩한 곳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행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이 점만 비춰 보더라도 천국에서 살아가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 그러면 영혼이 죽은 사람이 천국에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겉모습만 약간 바꾸거나 욕망을 다스릴 줄 안다거나 또는 고삐 풀린 정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여전히 호랑이이고, 뱀은 똬리를 틀고 앉았더라도 여전히 뱀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훨씬 더 깊고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다. 마음에 새로운 본성이 거해야 한다. 샘의 근원이 정화되고 뿌리가 온전해져야 한다. 거듭남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 문제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이켜야 한다. 거듭남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이다. 거듭남은 구원 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알고 스스로 경험해야 할 문제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현세 뿐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이때야말로 우리에게는 천국의 삶을 준비해야 할 유일한 시간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즉 부, 학식, 세상의 위로, 건강, 집, 친구는 없어도 얼마든지 구원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지만,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사람이 태어나야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듯이 거듭나야만 천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3. 거듭남의 표시는 무엇인가?

 

- 거듭남의 교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요한일서를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요한일서의 내용이 거듭난 자의 상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거듭남의 여섯 가지 징표

첫째, 거듭난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죄인 줄 모르기도 하고 죄를 지은 후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거듭난 뒤에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며 죄에 맞서 싸운다. 거듭난 사람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진정으로 죄를 혐오한다. 거듭난 자의 가장 큰 소망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둘째, 거듭난 사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굳게 믿는다.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거듭난 사람은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근거를 발견하고 그분을 통해 자신의 죄와 불법이 모두 깨끗해졌다고 확신한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담대히 죽음과 심판을 향해 나아간다. 거듭난 사람도 때로는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힐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을 포기하고 다른 것(다른 구원자, 선행, 공로 기도, 사역, 봉사활동)에 두겠는냐고 묻는다면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절대로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셋째, 거듭난 사람은 의를 행한다.

(요일2:29)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거듭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이 미워하시는 일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거듭난 사람은 마음과 영혼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불완전함을 겸손히 고백한다. 때로는 넘어지거나 잠깐 곁길로 치우치는 경우도 있지만 거듭난 사람은 꾸준히 하나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지도 못했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지도 못했으며 내가 또 다른 세상에서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전과 같지 않다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세”-존 뉴턴-

넷째, 거듭난 사람은 같은 신자를 사랑한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지식, 명석한 두뇌, 인간적인 매력, 재산, 신분 등을 높이 치지만 거듭난 사람은 ‘은혜’를 가장 소중히 여겨 은혜가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을 사랑한다. 거듭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한가족이자 형제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전우이자 동반자이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옳고 그름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방법과 관념과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의 삶이 헛되고 무가치하고 무익하게 느껴진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좋아한다. 거듭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어디를 가든지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여섯째, 거듭난 사람은 주님이 그의 영혼을 지켜 주신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주의 깊게 보살핀다.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경계한다.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책을 선택할 때도 신중을 기한다. 거듭난 사람은 친구 관계를 맺을 때도 자신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일상생활의 습관이나 행동에도 신중을 기한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영혼이 적진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늘 경계하며 겸손히 기도하면서 살아간다.

-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도 거듭남의 징표가 나타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남의 징표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난 자”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즉 이 여섯 가지 징표가 있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인 척한다. 하지만 자기기만에 빠져 있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그릇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존재하지 않고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며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2:29).

- 거듭난 것은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던 이 징표를 갖추지 못했다면 두려워해야 함이 마땅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는 공통된 가족의 형질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거듭난 자의 내면에는 순금임을 인정하는 확인 도장처럼 성령의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거듭남의 표징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을 깨닫고 무사안일주의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자신이 거듭 나지 못한 죄인임을 자복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거듭나기를 강청하라.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시34:18, 요일1:8-9, 행3:19).

그런 노력을 거부한 채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거듭남의 징표를 지닌 사람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징표가 더욱 뚜렷해져야 한다. 신중하게 자신의 영혼을 지켜나가는 것이 유익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에 이르는 첩경이자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비결이 그 안에 있다.

 

4. 거듭남에 대한 거짓 교리에 속지 말라

 

- 거듭남의 교리에 제기되는 여러 반론

첫째,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거듭났다.

성경적 근거가 없고 세례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사도 요한이 말한 거듭남의 여섯 가지 표징 가운데 한 하나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과연 거듭난 사람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일까? 세례가 거듭남의 표징은 아니다. (요1:13,벧전1:23,요일2:29,요일5:4,요일5:18)

세례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상징 행위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은혜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항상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외형상의 상징 행위에 참여했다고 해서 곧바로 내적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의 신비는 물과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할례(세례)를 받았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을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롬2:28-29). 예를 들면 마술쟁이 시몬의 경우 세례를 받았지만 거듭나지 못했고(행8:21-23)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거듭남을 체험했다(행10:47).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눅23:43)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직접 천국에 들어감을 확증해 주셨다.

둘째, 거듭남의 교리가 세례를 무익한 의식으로 전락시킨다.

- 물은 우리를 상징적으로 씻을 뿐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의식으로 놀라운 영적 축복을 베푸는 수단이다. 세례는 거듭남에 이르는 한 가지 방편이다. 올바른 자격을 갖춰 세례를 받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 세례는 여러 가지 외형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유익이 있다. 유형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여 불신자들에게 차단되어 있는 생명의 떡에 쉽게 다가 갈 수 있고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특권들은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에서처럼 세례만 받았을 뿐 진정한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진리의 빛에 더 많이 드러나 있는 만큼 책임도 불신자보다 더 크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하면 그 죄가 더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셋째, 어린 아이는 세례를 받을 때 자동적으로 거듭난다.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 구절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유아는 자의식이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하지는 않으나 유아 역시 진노의 자녀에 해당된다. 유아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부모를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부모나 후견인의 믿음과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시효적 은혜’라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효적 은혜란 성례 의식을 거행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한다는 교리를 말한다. 그런 교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미신과 형식주의를 조장할 뿐 아니라 자녀를 위해 성경을 배우고 기도해야 할 부모의 책무에 소홀하게 만든다.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을 뿌리면 세례는 성립되지만 세례를 베풀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주장은 전혀 터무니없다. 카톨릭 교회 선교사(인도, 남미 일본 등지에 활동)들은 매일 수백명의 영혼을 거듭나게 했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포로들을 사살하기 전에 그들의 영혼을 구원한답시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하나님은 그런 의식에 스스로 얽메이지 않으신다(사1:11-14).

넷째,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유대인보다 열등하다.

-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 이유는 민족적 특권 때문이었다. 그들은 특별 언약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특별히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으며 외적 증표와 거룩한 의식으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자녀의 권세란 혈통에 근거한 외형상의 신분에 불과할 뿐 자동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효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 이와 달리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약시대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과 내적(신분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외형적으로 교회 일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요8:42)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영적 차원이 아니라 혈통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유대인인 니고데모에게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유형교회에 속했다는 증표가 아니다. 거듭남은 참 신자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표징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은혜가 휴면상태로 존재한다.

- 하나님의 은혜는 방치해 둔다면 소멸되거나 잃을 수도 있고 또 정지된 상태로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아 거듭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라는 주장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 안에 존재하면 반드시 드러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많든 적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휴면상태의 은혜’라는 주장은 성령이나 은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성령이 있고 단지 그분을 활용하거나 활용하지 않는 차이만 있다고 하면 성령이 유한한 인간에게 죄지우지되는 종에 불과하고 구원 사역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는 주장 밖에 되지 않는다.

- 어린 아이일 경우 거듭났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쉽게 속단하기 어렵다. 선한 것을 추구하고 악한 것을 멀리하는 성향이 발견되지 않으면 아직 거듭났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린 사람이라고 해도 스스로 살펴서 자신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잠20:21).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셰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장차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7:23)라는 엄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 그릇된 거듭남의 교리를 경계하라. 거듭났는데도 다른 사람이 의식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삶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바람이 부는데도 느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거듭남의 은혜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역동적인 원리이다.

 

에필로그 -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이제 내적 은혜를 받았으니 이미 마음에 존재하는 은혜의 씨앗을 틔우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당신은 죄로 인해 죽은 상태이니 반드시 거듭나야만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죄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어 잠들게 하는 효과를 후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죄인을 일깨우는 효과를 가각 만들어 낸다. 전자는 마음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원하면 얼마든지 은혜를 활용할 수 있어 양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 자연인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 하지만 후자는 양심의 가책을 자극하고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케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영적인 존재로 만든다.

-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거듭났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 그릇된 중생 교리는 기독교 교리들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그릇된 중생 교리를 억지로 옹호하려다 보니 그 밖의 중요한 교리들을 아전인수격으로 이리저리 뜯어고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를 성례에 의존하는 종교로 만들어 성만찬으로 유지되는 의식종교로 변질시키게 된다. 바울이 그렇게 그의 서신에서 공들여 전했던 중요한 교리들이 한갖 종교 의식의 둘러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호소한다. 모든 신자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주위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관찰해 보라. 안타깝게도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거의 없고 육신의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례를 통해 영적 은혜를 받으려면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사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들은 과연 죄에 대해 죽었는가? 그들은 “의에 대해 자유로운 죄의 종”(롬6:20)일 뿐이다. 그들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의에 대적하는 원수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하면서도 고의로 죄를 지으며 부끄러움을 모른 채 부도덕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며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기독교를 불명예스럽게 한다.

 

(2011. 8. 29.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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