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1V2p0cERog?si=vB7KieIy5VamF0aZ
자유를 실현하는 것은 사실 관용을 실천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복잡하디 복잡하듯 보이는 이 세상은 사실 둘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타자'
내가 알고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믿는 세계와, 내가 불신하는 세계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부모에서 태어나, 제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며 고유의 생각을 갖게 된다.
그 고유의 경험들은 '나'가 절대로 인지할 수 없는 별세계의 양태이다.
그 각각의 모습들에는 사회 맥락상 공유하는 체계는 있을지라도, 구체적인 내용을 담기에는 불가능하다.
자유의 필요성은 여기에서 제기된다.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공유하는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나, 구체적인 내용에 개인들 간에 어긋나는 부분이 발생하면, 사람은 대처할 수 없게 된다.
가상의 예로, 지구평면설을 믿고 있는 고대인과 지구구형론을 믿고 있는 현대인이 대화할 때, 그들은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유할지라도 그 모양의 믿음에 차이가 발생하면 그들은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그러한 내용을 갖게 된 경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지의 불가능성을 대처할 수 없다.
자유는 이 불가능의 평행선을 연결하여 사람 간의, 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내가 의지를 통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타인의 추구하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도 같기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더라도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맥락에서 이를 용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앞의 예시에서도 과거인과 현대인이 서로 자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내용 상의 결함이 있더라도 이를 묵인하고 관용을 베풀 수가 있었을 것이다.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세계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데에 있어 질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다. 어떠한 내용에는 더 옳고 더 그르다의 상대적 차이만 존재할 뿐이지. 완전한 옳음과 완전한 그름은 존재치 않게 된다.
내가 믿지 않는 부분에 대해 상대방이 주장한다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세계의 자유를 존중하기에 서로 간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해준다.
과거인이 아닌 어떠한 현대인이 지구평평설을 믿는다해도 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 내가 모르는 경험을 겪었던 그의 자유를 존중하여 더 나은 사회를 추구할 수 있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믿음의 파편화가 심화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관용이 절실해진다.
타인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갖춰야 된다
옳고 그름이 없듯이 일률적인 세계도 없다.
언제까지 남을 비방하고 욕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의 경험 또한 매양 변한다.
어떨 적에는 지구가 평평하다 믿었다 어떨 적에는 둥글다 믿었다, 어떤 경험을 한 후에는 사실 네모나다 믿을 수도 있다.
매 순간 똑같은 생각을 지닌 그런 불변한 사고를 지닌 인간은 없다.
매 순간 사람의 경험적 내용은 변해가고, 그로 그의 세계 또한 변한다. 이는 또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고, '나'의 생각도 어느 순간 예전의 생각과 달라진다.
관용을 베풀자.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관용없이 살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사람들이 변해가고,
어느 순간 치부스러운 세계만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