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릴라 외 1편
서정임
커다란 유리창이 깨졌다
그러나 들여다보이지 않는 내부
닫힌 문이 닫힌 문을 안고 있다
어둠이 어둠을 안고 있다
회색빛 벽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두껍게 쌓인 먼지가 그 햇살들을 날리고
희미해진 문의 전화번호를 물고 있는 종이가
떨어질 듯 아슬하다
저 깨지지 않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사람들의 팔과 다리와 집과 형제와 통장을
한 입 거리로 삼켜버린 저 거대한 건물
믿음은 때로 깨지거나 미끄러지는 유리표면 같은 것을
투명하고 깨끗한 것 같았던
오타 한 자 없는 계약서에
한 잎 풀잎 같은 마음을 묻어두었던 사람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공사를 중지해버린
저 상가와 상가 사이 버티고 서있는
해결되지 않는 오래된 부도
끌어낼 수 없는
한 마리 거대한 짐승 같은 저 건물 옥상에는
오늘도 거리 곳곳마다 뿌려지던
그때 그날의 홍보용 전단 같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능소화가 피어나는 거리
다국적 언어의 간판이 즐비하게 걸려있는 다문화 거리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줄기줄기 피어나는 능소화처럼
거리를 휘감는 소리가 서글프다
사내는 어쩌다 저토록 진한 그리움을 토하고 있는가
몇 년 전 이곳에 들어와 온전한 정착을 위한
국적과 이름을 바꾼 그는
기숙사 앞 은사시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누군가 돌리는 흑백필름 영사기 소리인 듯
지구 저편 두고 온 날들이 눈앞 환하게 펼쳐진다는데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의 뿌리 깊은 뿌리
음표를 짚는 시간이 길어진다
날마다 벗어날 수 없는 잔업과 특근과
어쩌다 주어지는 아르바이트에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이
듣고 있는 악보에 악보를 더하고
저 슬픔에 전이된 사람들이 오래도록 서 있는 거리
저마다 가슴에서 피어나는 능소화가
멀리멀리 그리움을 뻗는다
서정임
2006년 <문학 선> 등단
시집 <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