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 윤두수, 정철은 임란 책임이 없다.
통신사 정사 황윤길의 말에 따라 전란 대비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동인 부사 김성일의 말을 따르는 동인 이산해, 류성룡은 전란 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성일은 왜군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막상 왜란이 터지니 민심이 이반될까봐 왜군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은
전쟁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
윤두수는 전쟁전 후 평안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가 있을 때 전쟁이 발발하니 책임이 없다.
1580년대 서인정권
1591년 2월 임진왜란 발발 1년전 동인정권
1592년 4월13일 왜란 발발 후 전쟁 발발 책임, 개전 초기 패전책임, 수도 함락 책임을 물어
평양 몽진지에서 동인정권이 물러나고 1592년 6월12일 서인정권이 들어섬. (서인 항전 주장)
1593년 10월 24일 한양환도 사흘후 27일 이산해, 류성룡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라고
정철에게 사주하여 사주 공작에 말려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이 몰락하고
다시 동인정권 들어섬. (동인 주리학파 강화 주장)
선조는 항전에서 1593년 10월27일 한양환도 사흘후 동인정권이 들어서자 강화를 따르게 된다.
서인만 결사 항전을 주장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다룬 줄 안다.
왜곡된 역사드라마였으며 서인 윤두수, 정철을 간신배처럼 묘사하고
전쟁 책임이 서인정권의 책임인 것처럼 제작된 드라마다.
이순신에 묻어 가면서 동인정권의 책임을 회피하며 그려 낸 드라마였다.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윤두수의 실수라면 평택 출신의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였던 원균을
서인중 주기학파 이순신의 대항마로 내세운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그러나 원균이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는 시기는 동인정권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부산 탈환을 빨리 해보려고 무리하게 이순신을 밀어내고
원균을 내세우는 것임].
전쟁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동인정권이
역사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자체가 역사왜곡이다.
호남만 유일하게 수성하니
전부 호남 옆에 모두 빌붙어서 자기들이 지켜냈다고 주장한다.
과거 고대시대부터 현재 역사까지 통틀어서 역사를 들여다 보면,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고대시대의 주요전투에서 승리해 본 종족이 중세, 근대시대까지 아주 중요한 전투에서도
승리하는 역사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어왔다.
과거 고대역사를 들여다 보면 중요 전투(비수대전, 진도 울돌목 삼별초 대전, 황산대첩, 무풍대첩,
행주대첩, 부산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대첩 ..) 등에서 승리해보지 못한 종족과 민족은
중세, 근현대사에서도 절대 승리하지 못하였다.
[외세와 연합했을 때만이 승리하였음. 그래서 전투에서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패하게 되었던 이유임].
이미 주기학파의 본고장 호남에서는 주기학파 스승들로부터 근대 이성철학을 깨우친 제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선조 당시까지 중간 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까닭에 호남 무관과 선전관 출신들이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지방으로 직급 강등당하며 좌천을 당하면서
호남을 수성하게 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주기철학이라는 학문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왜 호남에서 신분질서가 가장 유연했는지도 모르고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다.
정철은 1591년 2월부터 이산해의 배후 책동으로 주색을 가까이 했다는 모함을 받아
강계, 강릉, 강진 등으로 유배와 좌천을 반복하였고, 양광도 동인 이산해, 류성룡의 정치공작에 말려
1589년 서인정권 때 정여립의 기축옥사까지 일으키게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는 강화도를 거쳐 충남 연기, 논산,연무로 내려가 도체찰사 직을 수행하며
왜 수군의 한양 입성을 차단하고 1592년 10월 청주성을 수성하는데 총 지휘한 인물이 정철이다.
(연기, 논산 연산, 연무가 전략적 요충지임)
그런 정철이 징비록에서 선조랑 말싸움하고 있었다는 것이야 말로 역사 왜곡이다.
동인 간신배들이 전부 평양 이북에서 몸사리고 있을 때
정철은 최전선으로 내려가 왜군의 북상을 막는 도체찰사 직을 수행하였다.
그런 정철이 간신배라는 것은 얼토당토 말도 안되는 말이다.
동인 간신배들에게 속아서 정권을 빼앗기고 유배가고 정여립을 죽인 것밖에 뭐가 더 있었나?
정철은 정치는 못했지만 군사분야에 대해서는 전략적 요충지가 어디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1587년 호남 동인을 대표하는 정여립학파가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사전탐색을 나왔던
왜군 지리정찰대를 토벌하고 합천, 산청의 조식학파와 연합하여 호남 동부, 영남 낙동강 서안지방으로
동인권력이 급속히 이전되는 시기에, 양광도 동인 이산해파가 정치공작을 벌여 서인 정철을 내세워
정여립, 이발, 백유양, 최영경 등 호남, 영남 동인 2천여 명을 역모로 몰아 죽이거나 유배보내고
동인권력을 다시 양광도 이산해, 류성룡파가 독차지하였다.
정치공작을 잘하는 것이야 말로 간신 모리배들이 아니고 누가 간신배란 말인가?
서인 정철은 주자학 원리주의자로서
우직하고 성리학 원리 원칙에 충실한 보수적 학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원칙론자의 아둔함으로 인해 간신 모리배들의 정치 사주공작에 쉽게 당하고 마는
역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정철은 1593년 강화사절로 명나라를 다녀 오다가 강화도에서 동인 이산해, 류성룡의 정치공작에 말려
병사처리되고 만다.
윤두수, 정철이 비판받는 것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로서
서인 개혁, 혁신파/근대 이성철학파이자 근대식 개혁학파인 주기학파를 멀리 하려 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서인은 기호사림파 70명(70명이 기묘사화로 사약받고 제거됨)에 이어 그후신인
주자학 개혁혁신파이자 주기학파(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박순, 김인후 등의 제자 40여 명),-
근대 이성철학파/근대식 개혁학파.
주자학 중도파(성혼,조헌)-윤증의 소론학파로 이어짐.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송익필, 정철, 윤두수, 김장생, 김류, 김집, 이서(신경진과 함께 인조 반정계획 수립),
신경진, 송시열의 노론학파로 이어짐)로 나뉜다.
동인은 영남사림파-김종직 (밀양), 김굉필(대구), 정여창(함양), 김굉필(선산) [영남 중심학파]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인 양광도 주리학파/이황학파,-이언적, 이황, 이산해, 류성룡, 김성주, 김성일....
영남 조식학파,-합천, 산청 중심의 도교학파 [노장철학, 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 중심학파]-북인, 대북
주리철학 개혁파인 남인 윤휴학파 [청소북/청남학파. 청풍~청도,청송 중심학파]
주리철학 원리주의 학파 남인 허적학파[탁소북/탁남학파. 진주이남 마산, 창원, 진해, 거제]로 나뉜다.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vs 영남 사림파간의 권력투쟁에서 양광도 동인이 훈구파 서인 남원의
유자광 [영광 유씨]을 내세워 무력진압하는 게 무오사화이며 이는 갑자사화로 이어진다.
광해군 이전까지 영남 사림파[무오/갑자사화]와 기호 사림파를 기묘사화[조광조]로 제거하고
영남 조식학파 역시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제거하여 동인 권력을 독차지하는 게
양광도 동인과 그 후신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이황학파]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조식학파 후예 정인홍, 이이첨 등은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에
정치적 보복을 해댄다. [주기학파와는 친분관계 유지].
89세까지 살았던 대북 영수 정인홍이 나중에 깨닫고 북인 영수 이산해를 골북 영수로 몰아내 버리고
이이첨(선산/음성까지 대변)에게 대북 영수 자리를 물려준다.
동인에서 갈라져 나가는 남인 윤휴학파 역시 서인 노론학파 영수 송시열에게 정치보복을 해대고,
효종 때 남인 윤휴학파/허목학파 유직은 이이가 승려 출신인 것을 명분삼아 성리학의 이단파라며
이이의 주기론을 맹공격하여 주기철학을 완전 몰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