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후에는 이 나라에 피가 천리나 흐를 징조이다."
토정 이지함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사태를 내다본 예언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1570년대 이지함은 팔도 강산을 두루 유람하다가 강원도 금강산에 들게 되었다.
어느 높은 산마루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바위 위의 한 암자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댓돌 옆에 지팡이를 세우고
난간에 의지하여 금강산의 석양을 즐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 뒤 몇 명의 중들이 나와 법당을 오가며 병풍과 자리를 갖다놓고 무슨 준비를 하였다.
이지함은 궁금하게 생각되어 물어보니
"지금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을 걱정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나이다"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불이 휘황하게 비치는 가운데 여러 산신령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먼저 온 삼각산의 신령이 지리산의 신령에게 말하였다.
"요즘 천문을 보니 장수별의 움직임이 정상이 아닌데 남에서 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니
남쪽에서 무슨 사변이 생길 듯 하오. 이것은 외국의 요사스러운 기운이 동남쪽으로 해서 온다는 것이 아니겠소."
지리산 신령이 곧바로 말을 이어받았다.
"비단 별의 움직임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에도 염려되는 바가 있으니 남쪽 오랑캐가 날뛰는 것이 날로 심해지고 있소.
그런데 조정에서는 연회만 열고 매일 놀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 말을 듣고 있던 금강산 신령이 매우 놀라면서 이렇게 말을 잇는다.
"조선은 자고로 동방예의지국이요, 우리는 이 나라에 살면서 제물을 받아먹고 있으니 우리 또한 예의지신인 셈이지요.
저 남쪽의 왜는 짐승의 나라인데, 그 추악한 오랑캐가 이 나라에 들어와 살게 되면 우리 또한 짐승의 신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아니 부끄럽고 망신스럽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니 이 자리에 모인 제공들이 제가끔 깊이 생각하여
대책을 세우는 게 좋을 듯 싶소."
산신령들은 모임을 마치더니 서로 손을 흔들어 가볍에 인사를 하고 물러가는 것이었다.
이 때 이지함이 눈을 뜨고 보니 당초에 지팡이를 세워 두었던 곳은 바위 모서리였고,
몸을 의지하였던 곳은 한 그루의 소나무였다.
그리고 훤히 비치던 등불은 봉우리 위에 걸려 있는 새벽달이었다.
그는 비로소 그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꿈이 아닌, 꿈을 통해 산신령이 뭔가를 암시해 준 것으로 받아 들였다.
이때부터 그는 앞날에 반드시 왜놈들이 변란을 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왜놈의 정탐자가 있는지 살피고 다녔다.
그가 삼척 고을에 임시로 가 있을 때였다. 중차림을 한 사람을 만났는데, 말소리나 얼굴 모양이 흡사 왜놈과 같았다.
그 놈을 잡아다가 여러가지 심문을 해보니, 왜놈임을 실토하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은 뒤 14년 후 마침내 왜놈들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때 왜놈의 한 장수는 앞날을 내다보는 이지함의 존재를 전해 듣고,
삼척 고을에는 군사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토정은 왜란이 일어날 줄을 짐작했다.
이것은 한낱 설화다. 토정을 뛰어난 예언가로 간주하게 된 후대의 민중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이 민중들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본래 토정이 특이한 선비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설화를 덧붙여 민중의 스승으로 이상화했다고 풀이된다.
왜란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토정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일찍이 그는 상중(喪中)에 있던 제자 조헌(趙憲)을 조문하였다.그날 혜성(彗星)이 밤하늘에 뻗쳐 조헌이 그 조짐을 물었다.
토정 이지함은 이 혜성이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라며 그때에 대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
"신이 일찍이 고(故) 명신(名臣) 이지함(李之菡)의 유집(遺集)을 보건대, 이지함이 일찍이 인천에서 상중(喪中)에 있는
조헌을 조문하였는데, 그날 밤 요사한 혜성(彗星)이 하늘에 뻗쳤으므로, 조헌이 그 조짐이 어떠한지를 물었더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혜성은 길면서 더딘 것과 짧고도 빠른 것이 있는데, 이것은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하여도 세상에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니, 그대는 더욱 옛 글을 읽어서
국가에 보답하라.’ 하였는데, 임진란(壬辰亂)에 이르러 그 말이 과연 부합하였습니다.
신이 계해년198) 겨울에 겸사(兼史)로서 금중(禁中)에 입직하였는데, 그때 혜성의 재이(災異)가 한 달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이 목격한 바인데,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은 이제 연수를 헤아려보니
마침 이지함이 말한 것과 근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진실로 이지함과 조헌의 미리 아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마는,
두 신하를 깊이 믿기 때문에 늘 남모르게 근심되고 매우 염려됨을 금치 못하였는데, 더구나 수년 이래로 비상하게
놀라운 재이가 또 따라서 거듭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무릇 재이가 일어나면 늦고 빠름은 있을지라도 그 응험이 없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올해에 재이가 있고 내년에 무사하다 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 천지가 경계를 고할 경우 거의 변란이 없는 데에 이르는 일은 없었는데, 시상(時象)으로 말하건대, 아첨하는 자가 다투어
나아가고, 아첨하여 총애받는 자가 위세를 떨치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서 방본(邦本)이 무너지고,
변방이 허술해져 급할 때에 믿을 것이 없어질 것이니, 쌓인 땔나무에 불을 놓는다는 말로도 그 위급함을 비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바야흐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한 자와 출세하는데 교묘한 재주를 가진 자들이 치무(馳鶩)하기를 서로 숭상하고 있는데,
현철하여 어리석지 않은 자도 휩쓸려 함께 빠져드니, 장차 나라의 일이 어떠한 지경에 이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깊은 곳에 거처하여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계시니 또한 어떻게 오늘날의 세도(世道)가 이토록 극도에 이른 것을
아시겠습니까? 재이를 그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도리는 다시 다른 방법이 없고, 참으로 오직 언로(言路)를 넓혀서
곧은 말을 살펴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반드시 한가히 시좌(侍坐)하시는 즈음에 조용히
앙품하여 언자에 대한 견벌(譴罰)을 도로 거둠으로써 간언(諫言)이 오는 길을 밝히소서. 그러면 참으로 두렵게 여겨
수성(修省)하는 한 가지가 될 듯합니다."-조선왕조실록 영조 30년(1754년) 11월 27일 임인 2번 째 기사-
문집의 기록은 사제간의 문답을 확대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토정이란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선비였다.
조카 이산해는 <숙부묘갈명>에서 당시의 행적을 이렇게 묘사했다.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의 제자였던 조헌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이지함, 성혼, 이이입니다.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다른 점이 있지만 깨끗한 마음과 욕심을 적게 가지는 자세,
그리고 뛰어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은 똑같은데,
신이 일찍이 그들의 만에 하나라도 닮아보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